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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Sep 25. 2021

명절에 음식을 안 하기까지 9년이 걸렸다

명절 이야기

와인은 주운 돈으로 산 와인. 처음 먹어 보는 사 먹는 동그랑땡

명절에 하는 수많은 음식을 하지 않게 하는데 9년 정도가 걸렸다. 부모세대가 물려받은 전통이라는 이 고난만이 가득한 노동을 줄이려고 마찰, 타협, 설득, 공감 같은 시도가 있었고 그 기간이 9년 정도 만에 올해 추석에는 음식을 아예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니까 올해 구정까지는 음식을 했다는 말이다.


우리 집은 일 년에 명절을 합쳐 총 세 번의 제를 지낸다. 가족도 조촐하거니와 음식을 하는 그 중노동에 비해 전통을 앞세워 우리가 느끼는 그 정당함은 별로 없다는 것을 어머니에게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힘들었다. 무엇보다 어머니는 나와 동생의 말보다는 친구들이나 옆집 아주머니의 말을 더 신뢰하는 편이다.


상다리 부러지게 음식을 차리는 이유를 물어보니 ‘누가 되지 않게, 다른 집이 봤을 때, 옛날부터 해 왔으니까’ 같은 이유가 있었다. 음식을 먹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이 먹는 건데 사람 수는 적은데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리면 후에 두고두고 꾸역꾸역 먹을 수밖에 없다.


보통의 집에서는 음식을 먹고 난 후에 남은 음식(이라고 부르는 식은 음식이나 나머지 음식)은 어머니들이 자신의 집에서 먹는 것에 반해 우리 집에서는 내가 잔반을 다 처리해야 한다. 특히 엄청난 나물과 딱딱해져 버린 생선을 먹어 치워야 하는데 참 별로였다.

무슨 송편인지 모르지만 맛있어

전통이라는 문화가 부모세대의 머릿속에 가득 들어가 있으니 그게 악습이라는 것을 잘 알지 못한다. 전통이라는 건 좋은 것, 해야만 하는 것, 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것, 옆집에서 보기에 누추하게 보여서는 안 되는 것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이걸 바꾸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최초로 돌아가서 그때는 5년이면 될 줄 알았다.


상차림이 있다면 3분의 1씩 줄여가는데 3년씩 걸렸다. 이렇게 한 상 가득 명절에 음식을 차리게 된 건 그렇게 오래전부터 그런 것이 아니라 한국경제의 부흥기를 맞이해서 전통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국가차원에서 그렇게 분위기를 만든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대부분의 서민들이 먹고사는 문제로 허덕이기 때문에 너무 잘 차려서 명절을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러니 오래전 조상부터 이렇게 명절에 분에 넘치게 큰 상을 다 가릴 정도로 한 상 가득 음식을 차리는 건 아니라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또, 엄청나게 흘러넘치는 음식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살이 찌는 것도 생각을 해야 했다. 특히 남은 음식을 전부 때려 넣고 끓이는 전 찌개를 없애는데도 몇 년이 걸렸다. 그 고집을 꺾을 수 없어서 먹지 않았더니 자연스럽게 전 찌개를 끓이지 않았다. 그것도 다 먹어 없애야 하는 사람이 나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그런 걸 먹지 않는다. 거기에 방송 같은 곳에서도 언젠가부터 전통상차림이 너무 과하다는 말을 하는 곳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복숭아도 몇 개만 사서 먹고, 맛있어

어머니들이 아침에 하는 방송을 철석같이 믿고 보기 때문에 아침에 병원에서 진찰하지 않고 티브이 생방송에 잔뜩 나온 의사들이 건강 어쩌고 하는 말을 듣는데 그중에서 몇몇 의사가 명절에 하는 음식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공격적으로 밀어붙였다. 우리가 제사를 지내는 사람은 아버지이고 아버지가 좋아했던 음식 위주로 간단하게 차려서 제사를 지내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구색에 신경이 쓰인다면 한 접시씩 시장에서 만들어 놓은 걸 사 먹으면 된다. 그렇게 9년 동안 하나씩 하니씩 음식을 줄여 나갔다. 떠먹는 음식이 있는데도 탕국에, 찌개에, 고기에. 이래서는 음식이 공포스러울 뿐이다. 가족이 많다면 모를까 온 가족이 다 모여도 5명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조촐하게 음식을 하고 고요하고 편하게 보내는 명절이 우리에게 훨씬 나은 추석이다.


결국 9년 만에 이번 추석에는 아무 음식도 하지 않았다. 동그랑땡도, 송편도 요만큼씩 시장에서 사 먹었다. 어머니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렇게 사 먹는 동그랑땡과 송편이 훨씬 맛있다. 왜냐하면 요만큼 먹기 때문이다. 먹다 먹다 남아서 보기 싫을 정도의 음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명절이라는 게 끝나고 나면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들린다. 행복하게 보내야 하는데 점점 그렇게 보내지 못하는 가족이 늘어난다. 참 이상한 일이다. 오전 라디오를 듣는데 사연으로 남편이 이번 명절에 시댁으로 친정으로 천 킬로미터를 운전했다며 고맙고 미안하다는 아내의 사연이 나왔다. 그러고 디제이가 자신도 모르게 바로 “보통 이 정도 거리면 번갈아가면서 운전을 할 텐데 말이죠”라고 하고서는 뒷수습을 하는 말투가 나와 버렸다.


명절에 음식만 줄여도 꽤나 편안한 연휴가 된다. 다 모여서 라면을 먹어도 맛있다. 추석에는 역시 컵라면이지.

명절에는 역시 다 같이 둘러앉아 먹는 컵라면이지


그래서 오늘의 선곡 https://youtu.be/hTWKbfoikeg

너바나의 스멜 라이크 틴 스피릿.


네버마인드


너바나의 네버마인드 앨범이 나온 지 30년이 되었다고 한다. 이 앨범의 표지는 자본주의 강하게 비판한다고 해서 빌보드지에서 선정한 최고의 앨범 표지 7위에 올랐다. 그 덕분인지 주인공인 꼬마 아기는 30살이 되었고 그동안 정신적인 고통이 심해서 너바나 측을 고소했다고 하는데 결론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너바나의 중심이었던 커트 코베인은 왜 죽었을까. 그런 의문이 당시에는 들어서 여러 곳에서 앞다투어 커트 코베인에 대해서 다루었고 그의 부인 코트니 러브가 조명을 엄청 받았다.


너바나가 등장함으로 최고의 팝 자리를 10년 가까이 굳건하게 지키고 있던 마이클 잭슨의 아성이 무너졌다. MJ의 엄청난 무대가 팬과 스타의 경계를 확실히 했고 슈퍼스타의 의상은 일반인들이 우러러봐야만 했던 그 경계를, 너절한 스트라이프 티셔츠 한 장 입고 왼손으로 기타를 치며 나타난 너바나가 MJ의 굳건한 성벽을 무너트렸다.


커트 코베인의 어린 시절은 암담했다. 엄마가 19살에 커트를 낳았다. 커트가 9살에 아버지가 바람을 피우는 것으로 부모는 이혼을 한다. 9살짜리 커트는 그때부터 친척 집을 돌아다니며 생활한다. 커트의 곁을 지켜주는 건 오직 기타 하나 달랑이었다.


87년 머리가 긴 커트는 베이스의 크리스 노보셀릭과 함께 너바나를 만든다. 밴드 이름을 지을 때, 약이나 본드, 권총 같은 저속하고 강한 닉 네임 말고 무정부주의적인 아름답고 세속적이지 않는 닉 네임으로 하고 싶어서 ‘열반’의 의미 ‘너바나’로 하게 된다.


열반이란 번뇌와 고뇌가 소멸한 상태를 말한다. 무의 상태.


그러다가 부치 빅이라는 대단한 프로듀서와 작업을 하면서 내놓은 앨범이 바로 ‘네버마인드’였다. ‘스멜스 라이크 틴 스피릿’이 들어있는 악마의 앨범이었다. 개팬레코드사는 소닉 유스가 내는 앨범의 25만 장 정도의 수준으로 너바나의 네버마인드 앨범도 그 정도 팔릴 것이라 예측했다. 하지만 92년도에 500만 장이 팔려 나가고 만다.


$#^$%&^$#%$%#% <= 이런 이유로 해서 코트니 러브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된다. 커트는 코트니와 결혼을 하고 딸을 낳아서 깊은 행복감에 젖는 듯 보였다. 인 유트로 앨범도 정상에 오르지만 커트는 네버마인드로 너무 유명해져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압박감에 시달린다. 우울증과 정서적인 불안으로 약을 하고 또 약을 하고 술을 마시고 약을 했다. 유 인트로 앨범은 그런 커트의 망가진 정신세계를 그대로 드러낸 앨범이었다.


미국 투어를 다니며 엠티비에 자주 나오게 되었다. 엠티비는 미국에서 톱클래스, 주류 음악을 하는 음악인들이 나오는 것인데 커트는 자신이 그 속에 있다는 것에 대한 모멸감을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은 비주류로 기성세대의 삐뚤어진 주류를 실컷 밟아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런 물질을 쫓는 인간들을 짓누르는 음악을 했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 주류가 비주류인 자신의 음악에 도취되고 미치도록 열광하는 것에서 말할 수 없는 극도의 모멸감을 느낀다. 결국 약을 하다 헤로인에 빠져들게 되고 세계 투어 중 로마에서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되고 만다. 이후 헤로인을 치료하는 재활병원에서 치료를 거부하고 탈출해 시애틀의 집으로 와서 94년 4월 8일 자신의 집에서 권총 자살로 시체로 발견된다.


커트 코베인은 왜 주류에 들어가기를 극심하게 싫어했을까. 60년대부터 불던 부모 세대에게서 저항을 느낀 이들이 일명 부모 세대, 전쟁세대에게 도움을 받기를 거절하면서 창고 같은 곳에서 지내면서 자기들의 생활은 자기들이 알아서 책임지겠다며 나오게 된다. 그것이 뉴 제너레이션 세대인데 그중 스티브 잡스도 있다.


커트 코베인 역시 친척 집을 떠돌면서 물질만을 쫓는 부모 세대들에게서 미래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창고 같은 곳에서 자기 마음대로 지내며 이전 세대를 비판하는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다.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은 번뇌와 고뇌가 소멸한 상태로 가는 것이다.


부모 세대처럼 살면 안 된다, 이전 세대, 물질을 찬양하고 쫓는 세대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자신의 음악을 부모 세대가 열광하는 것에 괴리감을 느끼고 고통스러워했다. 불행의 시작인 것이다.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된다. 정신적으로 받은 손상은 쉽게 치유되지 못한다. 경멸하던 사람들이 자신의 음악을 찬양하는 것에서 오는 모멸감은 대단했다. 오로지 헤로인 만이 그를 zilch의 상태, 무의 상태로 되돌려 놓았다.


커트 코베인은 아주 잠시, 잠시 행복을 맛보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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