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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Nov 29. 2021

끝은 늘 기억나지 않는다

여기가 어디지



영화를 보고 나서 시간이 조금 흐르면 영화의 끝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영화를 필요 이상으로 너무 많이 봐서 그런 건지 아니면 뇌의 어떤 구간이 끝이라는 걸 애써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인지. 어제도 영화를 두 편 봤는데 역시 하루가 지나니 끝이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끝은 늘 그렇다.


꿈을 꿨는데 나의 꿈은 정말 뒤죽박죽 초현실이다. 그래서 꿈을 꾸고 나면 꿈을 잊어버리기 전에 메모를 해 놓는다. 잠이 까무룩 공격을 해도 꿈의 정경을 메모를 한다. 그래야 꿈 전체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꿈이라는 건 신나게 꾸고 나면 끝은 고사하고 무슨 꿈을 꿨는지, 내용이 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꿈을 꿨다는 기억만 있다. 그래서 초현실 꿈을 꾸면 메모를 해 둔다. 으 하는 얼굴로 미친놈처럼.


아니 그런 꿈 따위 기억이 안 나면 어때?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메모를 해 놓으면 현실에서도 꼭 꿈속에 있는 것 같은 기이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게 꼭 좋은 것은 아니나 나쁘지는 않다. 왜냐하면 초현실이니까. 좋다고만 할 수 없는 이유는 꿈속에서도 불안에 떨고 있거나 무서운 것들이 주위에 도사리고 있어서 이다.


[꿈의 내용]

어제는 나를 잘 안다는 사람이 나를 횟집으로 데리고 갔다. 가면서 나에게 자신의 아내와 신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이 사람을 모르는데 왜 따라갈까, 생각을 했지만 그것도 잠시, 곧 횟집에 들어갔다. 횟집인데 횟집 같지 않고 여느 선술집 같았다. 그 사람은 여기의 술집을 잘 아는 사람 같았다. 직원이 구십 도로 인사를 하고 우리를 한 테이블로 안내를 했다. 뒤돌아 보니 직원은 계속 구십 도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했고 직원은 구십 도로 꺾인 몸으로 나를 안내했다.


안내를 받고 따라가니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나서 이 복도를 타고 가라고 했다. 또 다른 사람은 직원 복장은 아니었다. 복도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는데 앞니가 입 밖으로 튀어나와있고 머리는 아주 짧은 스포츠형에 눈의 초점이 없었다. 예를 들자면 영화 '잭 더 자이언트 킬러'에 나오는 못생긴 거인이나, 영화 '베오울프'에 나오는 그렌델을 닮았다.


나는 복도를 따라 끝까지 갔다. 복도의 끝에는 문이 달려 있고 그 문을 여니 또 다른 횟집(이건 진짜 바닷가에 붙어 있는 횟집 같은 횟집) 같은데 계단을 타고 내려가서 화장실에 가야 했다. 그런데 계단이 동남아 지역의 계단식 논처럼 타원형에 밑으로 한 없이 내려가야 했다. 계단을 내려 내려가니 횟집의 바닥이 나왔는데 화장실은 계단의 중간에 있었다. 그래서 다시 계단을 오르려 하니 내려올 때는 몰랐지만 오를 때는 말 그대로 올라야 했다. 낑낑 거리며 벽을 타듯이 계단을 올라야 이동이 가능했다.


다시 계단을 올라 중간에서 빠져야 화장실로 갈 수 있다. 거기서 화장실용 실내화를 신어야 하는데 신발이 가오리처럼 아주 컸다. 한쪽 신발에 두 발을 다 집어넣어도 될 것 같았다. 가오리 실내화를 신호 기우뚱 거리며 화장실에 가니 소변기가 3개가 있는데 2개는 망가져 있고 하나만 제대로 있었다. 제대로 된 소변기 앞에는 이빨이 사람 같은 개가 변기를 핥고 똥 같은 것을 먹고 있었다.


꿈 해석가님들, 저는 꿈을 꾸면 화장실이 압도적으로 많이 나옵니다. 저의 삶이 더러워서 그런 겁니까. 화장실도 집에서처럼 깨끗한 변기가 아니라 아주 더럽고 움직일 수도 없을 정도로 재래식 화장실에서 무서워 벌벌 떨고 있다가 결국 똥통에 빠지기도 합니다.


나는 할 수 없이 고장 난 두 개의 소변기 중에 하나의 소변기에 오줌을 누려했다. 그런데 소변기가 아예 박살이 나고 시멘트 벽에 소변기가 박혔던 흔적에 소변을 보려 하는데 사람 이빨을 가진 개가 와서 나의 다리를 핥았다. 그 순간 등으로 더럽다는 느낌이 척추를 타고 뇌를 건드렸다. 개는 온몸이 하얀 털을 가졌는데 이빨은 사람 이빨이고 입 주위에는 똥을 먹은 표가 났다. 그리고 화장실에는 또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아주 더러웠는데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묻고 사람 이빨의 개와 그 사람과 함께 사진을 찍고 화장실을 나왔다.


그래서 끝은 어떻게 됐냐고 하면 모른다. 메모를 하다가 잠이 다 달아나버려서 그냥 일어났다. 꿈이라는 게 늘 이런 식이다. 그 시간이 한 6시 30분쯤 된다. 잠은 안 오지만 머리는 몽롱하고 아직 실제로 생리적 현상이 나오는 시간은 아니고, 이렇게 일어나면 애매하다. 예전에는 바닷가에 맥도널드가 24 시간 해서 일찍 일어나면 거기에 가서 커피를 홀짝이며 맥모닝 같은 걸 먹으며 책을 좀 읽고 있으면 사람들이 하나둘 출근을 하고 학교를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버지의 마지막도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마지막을 지켜봤는데, 그래서 그 마지막의 장면을 컴퓨터에 길게 기록을 해 놨는데, 그런데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 세상에 없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왜 그렇게 많이 하냐고 하는데 그렇게 많이 하지 않으며, 또 내 아버지는 너무 하찮아서 나 정도가 이렇게 언급을 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기억하지 않기 때문에 왕왕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하루키도 70이 되도록 언급을 하지 않았던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2019년 문예지 문예춘추 6월호를 통해 꺼냈다. 제목은 ‘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이며 후에 한국에는 단편집으로 출간이 되었다. 나는 코로나가 덮치기 전, 한국 출간이 되기 전 하루키의 신작 에세이가 실린 이 문예지를 구입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서 달랑 이 책 한 권을 사들고 왔다. 그러고 나서 세상에 코로나가 도래했다. 하루키라는 대작가도 아버지를 잊지 않기 위해 어딘가에 자신의 아버지를 언급한다.

 

이 세상의 어떤 유명한 사람, 지도자, 대작가, 배우, 예술가. 세상을 호령했던 자들도 일단 달의 뒤편으로 가고 나면 누구도 애써 기억하려 들지 않는다.

나는 일어를 전혀 읽을 줄 모른다


나와 아버지는 그렇게 좋은 관계도, 그렇다고 안 좋은 관계도 아니었다. 어릴 때 목욕탕에 같이 가던 사이에서 후에 혼자 가게 되면서 사이는 보통의 서먹한 부자지간이 되었다. 누군가 먼저 다가가려 하지도 않았고 으레 그것이 마땅한 것처럼 지냈다.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걸 아버지와 나는 알아서 그랬는지 필요 이상의 말이나 친한 척은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나는 나로서 지냈다. 서로의 영역에 침범하거나 더 멀리 떨어지지 않고 그저 관조하거나 안부를 묻거나.

 


조깅을 하고 오는 길에 이제 잘 볼 수 없는 오래전에 지어진 집과 여인숙과 슈퍼를 봤다. 메타버스 시대에 언제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들이다. 시작은 있지만 언젠가 끝을 맞이하게 되면 그 끝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철거되기 전에 주민은 이곳을 떠날 것이고, 철거를 하는 사람들은 늘 하는 일상이라 특별히 이곳의 끝을 기억하거나 기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끝은 기억에서 배제된다.


매년 반복되는 가을이지만 올해 가을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래서 올해의 가을 끝을 기억하는 사람도 어쩌면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내년에 다시 가을이 오기 때문에 지나간, 그간의 가을의 끝은 그대로 기억에서 사라진다.


얼마 전에 넷플 지옥을 봤다. 연상호의 ‘사이비’를 볼 때가 떠올랐다. 그때 상영관에서 3일인가 상영을 했고 이른 오전과 오밤중이거나 마지막에 영화를 틀어줬다. 마지막 상영을 봤는데 보는 사람은 우리 둘 뿐이었다. 사이비라는 영화를 보면 지옥이 정말 무엇인지, 그 세계관에 대해서 조금 알 수 있다.


지옥 시리즈도 그 속을 살짝 벌리면 그 지옥이 어떤 것을 말하는지 보인다. 내가 구치소에서 근무를 할 때 재소자(죄수)들의 접견(면회)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듣던 소리가 “우리 애는 죄가 없어요, 다 친구를 잘못 만난 겁니다”라는 말이었다.

 

“원래 그런 애가 아니에요, 너무 착해서 그래요”가 결국 죄를 짓고 구치소를 거쳐 교도소로 가기도 한다. 그리고 제대로 그에 타당한 죗값을 받지도 않고 출소되기도 하고, 또 엇비슷한 죄를 짓기도 한다. 죄는 유전자처럼 사람에게 옮겨 붙어 계속 반복하기를 바란다.


아이러니하지만 죄를 짓고 잡혀야 보호를 받을 수 있다. 편하게 잠들 수 있고 밥도 맛있게 잘 먹을 수 있다. 피해자 가족들이 돈을 들여 사람을 사서 가해자를 괴롭힐 수 없고, 아무래도 구치소는 안전한 곳이니까.


모두가 구치소, 교도소, 그곳이 지옥이라고 하지만 그곳은 사실 아주 평온하고 고요하게 흘러간다. 밥도 맛있고, 누구든 들어오면 규칙적인 생활로 인해 살도 찐다. 그래야 교정 시절의 인식이 좋기 때문이다. 진짜 지옥은 구치소 밖이다. 이 세상이, 이 현실이 지옥인 것이다.


밖에서는 자존심 뭉개지며 하하 호호 웃으며 사회생활을 하고 늦은 밤 파김치가 되어서 집에 들어와 잠자는 아이의 얼굴을 보며 눈물을 떨구며 이를 악물고 살아가야 하는 이곳이 지옥인 것이다.


넷플 지옥을 보면서 감독은 형태가 모호한 이 사회에 대한 불만을 등장인물의 대사를 통해 전부 쏟아낸 것 같았다.


친구가 근래에 억울한 일을 당해서 약을 먹으며 겨우 잠을 청하고 있다. 친구는 보스턴에 있다가 요리를 잘해서 자신의 키친을 가지고 열심히 일을 했다. 한국으로 와서 자신의 샵을 차리고 사람들에게 쉽게 요리를 해서 맛있게 먹는 것도 알려줬다. 준비해서 출간한 책은 굉장히 인기가 좋다. 인스타그램의 팔로워도 십만 명이 넘었다. 조금 푼수 끼는 있지만 그래서 사람들이 더 좋아한다. 그런데 얼마 전에 건물주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었다. 서류상으로,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세를 밀린 것도 아니고 계약기간이 2022년까지인데 강제집행 서류가 나와서 당연하게도 법원에 정지를 신청했지만 기각이 나왔다. 황당하게도 이유가 없음이었다. 너무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곧 대법원으로 가고 변호사까지 선임을 했다. 변호사도 너무 이상한 일이라 고심을 하는 것 같았다. 건물주 여자는 부동산업자로 이런 쪽으로 아무래도 잘 아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친구는 어제 잡지사와 인터뷰까지 했다. 거기서는 헤헤 호호하며 해야 하는데 너무 힘든 것이다. 소모하지 말아야 할 일에 에너지를 쏟아붓고 매일 지옥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왜 법은 억울한 사람을 자꾸 나타나게 만드는 것일까. 내년 오늘이 되면 작년 오늘을 웃으며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아이가 없어서 부모 마음은 잘 알 수 없지만 아이에 대한 사건사고의 법 처벌은 늘 사람들과 수직적이다. 정인이 양모 감형에 대한 7가지 이유를 봐도 그렇지만 법은 우리를 지켜준다기보다 억울한 사람을 자꾸 양산해낸다. 힘이 없고 세상의 약자는 법에 의해 보호를 받아야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런 곳이 지옥인 것이다.  


끝은 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영화는 정말 끝이 어떻게 끝났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꿈도 그렇다. 꿈은 끝이라는 게 너무 모호하고 힘들다. 처음이 있으면 끝이 있을 테니까 우리의 인생도 끝이 있을 것이다. 있겠지.


저 안에서 치킨에 맥주를 홀짝홀짝하면 참 맛있겠다.


가을의 색은 아름답지


비슷한 계열의 색도 다 다르지


오전에 걷기 좋은 날이다


너도 이제 겨울을 견뎌야 하겠구나


여기는 어디일까. 우리는 매일 어디로 가는 걸까. 매일매일 이동하는데 도대체 끝은 어디일까.



그래서 오늘은 보이즈 투 맨의 앤드 오브 더 로드 https://youtu.be/zDKO6XYXi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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