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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Nov 28. 2021

욕인데 표준어야

욕하고픈 이야기



개좆 같다, 는 말은 표준어다. 우리는 흔히 표준어를 써야 한다고 배운다. 그래서 욕을 할 때에도 이렇게 표준어를 구사하면 표준어가 아닌, 우리가 하위 언어로 인정하는 욕보다 괜찮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개좆 같다. 의 해석도 찰지다. 어떤 대상이나 상황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발음도 표준어니까 표기를 잘해놨다.


개:졷깓따


그래서 상대방이 몹시 마음에 안 들면 개좆 같다,라고 하면 된다. 그리고 몹쓸 짓거리를 하는 상대방이 나보다 나이가 많으면 개좆 같네요.라고 하면 된다. 야, 너는 나보다 나이도 어린 게 얻다 대고 욕질이야,라고 한다면 친절하게 개좆 같다는 말입니다, 표준어거든요, 그러니 당신이 이런 식으로 상식 이하의 짓을 했을 때에는 해도 됩니다.


사전을 보면 괄호 안에 (속되게)라고 되어있다. 속되다, 라는 말은 ‘고상하지 못하고 천하다’라는 말로 욕을 할 때에는 표준어지만 고상 한 건 때려 부숴 버리고 천하게 하는 것이다. 뭐랄까 피자를 먹으며 건강을 생각하지 말자는 말이다. 피자를 먹으면서 왜 몸에 좋은 피자를 찾아? 피자는 짜고, 두툼하고, 끈적끈적한 그 맛, 그 맛으로 먹는데 피자를 먹을 때에는 건강을 버리고 그냥 맛있게 먹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방이 나타났을 때 욕을 할 때에는 표준어인 이 ‘개좆 같다’를 하라고 할 수 있느냐 하면 그게 쉬운 문제가 아니다. 어린이들이 다니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이, 정말 개좆 같네”라고 너도나도 하고 다니면 낭패인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삶이라는 게 이미 만만찮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어린이라고 왜 욕을 하고 싶지 않을까. 억울한 일을 당하면, 친구를 빼앗기면, 누명을 쓰면 욕이 나오지만 어린이라서 그동안 잘도 참고 있다. 어른들은 여기저기서 욕을 똥처럼 싸질러 대면서 아이들에게는 욕을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럼 아이들은 표준어라도 욕을 하지 않는다. 욕이 아무리 하고 싶어도 꾹 참는다. 잘 참는다. 아이들은 제일 먼저 배우는 게 참는 것이다. 어른들은 늘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라고 할 뿐이다. 아이들은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 부모님, 내 형제를 위해서 참는다. 그런데 어른들은 자신을 위해서 참지 않는다. 어른들에게 표준어를 써야 한다고 배운 아이가 이렇게 ‘개좆 같다’를 들고 와서 보여주며 이거 표준언데 왜 쓰면 안 돼요?라고 말한다면 그저 욕이니까 하면 안 된다고 해야 할까. 어렵다. 어려운 문제다. 인생은 이렇게 어렵다.


어린이가 욕을 하면 어른들은 저 아이는 큰일이 난 아이처럼 여긴다. 하지만 어린이 때 욕을 찰지게 한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 이상하게 변해버린 사람이 있냐고 하면 딱히 없다. 그래도 어른들은 아이들 앞에서 욕을 하지 않는다. 아니, 하지 않으려 한다. 어른들이 본보기가 되면 되니까. 그러나 아이들이 친구들에게 들은 욕을 집에서 내뱉기도 한다. 그러면 그 쌍스러운 말을 처음 듣게 된 어른들은 큰일이 난 것이다. 그때부터 머리의 회로가 바빠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보통 입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생존을 바라는 게 아니라 삶을 바란다. 하지만 어느 순간 보면 하루하루를 생존하고 있다. 인간의 삶이라는 게 늘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계획 따위 백날 잡아봐야 계획처럼 되지 않는다. 펜싱 해설위원이 한 말이 있는데 “생각이 길면 용기는 사라지는 법, 걱정할수록 부정적인 생각만 쌓이고 할 수 있는 일도 제대로 못하게 된다. 완벽한 계획 따위 없고 무슨 일이든 하면서 완성되는 법이다. 돈 벌고 싶고 부자가 되고 싶으면 행동하는 것이 제1 과제다. 학습된 무능에서 벗어나라. 스스로 한계를 만들지 마라.”였다. 무슨 일이든 하면서 완성되는 법이다. 우리는 그걸 잘 알고 있다.


매일 울고 싶고 욕하고 싶으면 하면 된다. 개좆 같은 세상인데 개좆 같다고 말하면 된다. 그렇게 욕을 한다고 누가 욕을 할까. 인간관계가 힘들고 복잡한 이유는 단순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스스로 한계를 만들어서 타인의 눈치를 보며 자정작용을 거쳐 검열을 해서 말하고 행동한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어떤 대상을 향해 개좆 같다고 말하면 된다.



개새끼도 표준어다. 주로 남자에게 이른다고 되어 있다. 나는 개들과 인연이 좀 있다. 유기견을 데리고 와서 키울 때 동물 병원에서 일 년도 살지 못한다고 했다. 이전 주인이 그랬는지 가위나 칼로 혀를 좀 잘라놨고 뒷다리가 꼬여서 매일 주물러 주지 않으면 잘 걷지 못했다. 무엇보다 심장이 너무 안 좋아서 데리고 왔을 당시에 동물병원에서 일 년을 못 살 거라고 했다. 집에는 또 이미 오래된 유기견 한 마리가 있었다.


사진을 찍어 전단지를 만들어 동사무소와 근처 동물병원에 뿌리고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는데 3개월인가 4개월인가, 기다려도 주인이 나타나지 않아서 그냥 죽기 전까지 일 년이라도 키우자 해서 그냥 키우게 되었다. 그 뒤로 11년 정도를 살다가 얼마 전에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이 녀석은 내가 집에 오면 그렇게 품에 파고들었다. 내가 앉으면 다리 위에 앉아버렸다. 조카가 어렸을 적에는 내 양반다리로 두 녀석이 서로 앉으려 했다.


다리 위에 기어 올라와 앉으면 그 뒤로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피곤해 죽겠는데 집에 오면 개 두 마리가 자석처럼 달라붙었다.


이렇게 무릎 위에서 잠든 작고 부드러운 생명체를 어루만지고 있으니까, 우리 집으로 온 주인 잃은 강아지가 나를 완전히 신뢰한다는 듯 깊이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 있으려니까 가슴이 뜨거워졌다. 나는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고 가슴에 손을 대고 심장의 박동을 느꼈다. 작은 강아지의 심장은 희미하면서도 빨리 뛰었다. 나 또한 강아지를 안고 심장이 뛰고 있었다. 우리는 자신의 몸에 맞춰 쉬지 않고 진지하게 뛰는 심장의 시간을 나누고 있었다.


강아지는 꼭 어떤 것을 발견하려는 듯 깊이깊이 잠들어 있었다. 저 바닷가에서 울리는 것 같은 고요한 숨소리를 내며 배가 그에 맞추어 아래위로 조용히 움직였다. 나는 이따금 내게로 온 신비한 생명체가 거기에 있다는 걸 확인하게 위해 손을 뻗어 그 따스한 몸을 만졌다. 하루키의 소설 ‘태엽 감는 새’에도 나오지만, 손을 뻗으면 무엇인가가 만져지고, 그 무엇인가의 따스함이 느껴지는 것, 그것은 멋있는 일이었다. 오늘 문득, 나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상당히 오랫동안 그런 감촉을 상실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표준어인 개새끼도 이런 감촉을, 개에 대해서 이런 감촉을 알고 있는 사람이 썼으면 좋겠다. 작고, 힘없고, 세상의 약자인 아이들에게 신뢰를 받고 있다고 느낀 어른들이 그래서 개좆 같은 세상에서 개좆 같다고 말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지 못한 어른들이 훨씬 많은 이 세상에서 아이들에게 받은 그런 감촉을 알고 있는 어른들이 시원하게 욕을 할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참 좋겠는데 말이야.


고요한 시선 대치 중, 폭풍전야 





그래서 오늘의 선곡은 존 세카다의 잎 유 고 https://youtu.be/RRzGr6m2Gh0?si=scP6Clu1ckDGwHNG

JON SEC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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