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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Jan 24. 2022

자판 속 사람들

초현실 사진

자판 속에 갇힌 사람들


시계의 초침 소리, 사람들이 침을 삼키는 소리, 더러운 바닥에 신발 바닥이 닿는 소리, 사람들의 웃음소리, 젓가락이 부딪히는 소리, 신음 소리.


이런 익숙한 소리보다 자판 두드리는 소리에 우리는 울고 웃는다. 한 25년 전 야후를 필두로 인터넷이 세상이 도래한 이후 사람들은 자판 속으로 들어가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금 시진핑이 중국의 주석이 되기까지 이 인터넷이라는 것이 시발점이 되었지 싶다.


당시 갇혀있던 중국의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 자신들의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때 리커창을 데리고 인터넷의 원천봉쇄를 시진핑이 하면서 서서히 두각을 드러냈다. 중국은 워낙 거대한 나라라 7 체재로 이어가다가 시진핑이 최고의 권력을 잡으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이어져   같다. 인터넷이 막혔다가 애플을 통해 스마트 폰이 보급이 되면서 폰의 자판으로 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을 중국도  이상 막지 못했다.


야후가 나왔을 때 생각해보면 이 검색엔진이라는 게 어마어마한 인력과 기술력이 동원된다. 검색엔진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몇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야후 코리아 이외에 네이버, 다음, 엠파스, 라이코스, 파란 등 수많은 검색엔진 기업이 등장했다. 정말 대단한 일이다. 따지고 보면 자동차 회사를 가진 나라도 전 세계에 몇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자동차 회사도 여러 곳이나 되고 지금은 그 기술력이 100년이 넘은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차들과 다를 바 없다.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듣기 좋아서 어떤 사람들은 노트북을 구입할 때 자판의 키감과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또 노트북에도 키보드가 있지만 따로 기계식 키보드를 구입하여 자판 두드리는 소리에 도취되기도 한다. 특히 글을 작성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민감한 부분이다.


타닥타타타타닥 하는 소리는 꽤나 듣기에 좋아서 계속 두드리고픈 욕망까지 든다. 그래서 자판을 두드리는 일을 하는 사람이 지치거나 파이팅이 부족할 때는 키보드를 새것으로 구입하면 또 한 동안은 그 소리를 듣기 위해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기도 한다. 이를 안 좋은 것으로 치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적극, 까지는 아니지만 권장을 한다. 조깅을 매일 하다 보면 이상하다 잘 안 달려진다,라고 생각이 드는 날이 주욱 이어질 때가 있다. 그때 새 운동화를 하나 구입해서 신으면 이상하지만 그 전까지의 생각들이 싹 날아가고 영차영차 잘 달려진다. 헤밍웨이도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에는 타자기를 새것으로 구입했다. 그러면 한 동안 굉장히 글이 잘 써진다고 했다. 헤밍웨이는 또 일어서서 타자기를 치기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중요한 얘기는 아니지만 미국의 배우이자 모델 드리 헤밍웨이가 헤밍웨이의 증손녀인데 검색하면 굉장한 초현실 누드 사진을 볼 수 있다.


어플 중에서 타자기처럼 눌러지는 어플이 있다. 소리도 타자기와 똑같이 난다. 그 어플을 톰 행크스가 개발했다고 하는데 예전에는 재미있어서 그 어플로 자판을 틱틱 티티티틱 하며 쳐보기도 했다. 폰처럼 화면의 자판이든, 기계식 자판이든 우리는 매일 자판을 두드린다. 스벅에서 글을 쓸 때의 묘미라면 글을 쓰는 사람들이 커피를 홀짝이며 앉아서 여기저기서 타 다다타타타타다닥 하며 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그 소리들이 모여서 마치 자판 소곡집을 이룬다. 여기에서 변주를 주면 저기에서 받아서 타 다다다닥 한다. 자판 소곡집으로 15분의 환상의 연주가 완성된다. 짝짝짝.


하지만 자판 속에 갇혀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5년 전에도 똑같이 비슷한 내용의 말을 자판을 통해서 했고, 지금도 하고 있고, 5년 후에도 지금과 같을 것이다. 그 안에서 나오지 못하고 자신이 갇혔다는 사실도 잊은 채 자판을 두드리다 나중에는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른다. 마치 립반 윙클처럼 군인을 따라갔다가 숲에서 잠시 잠들고 나오니 머리가 하얗게 변한 할아버지가 된 것처럼.


자판 속에 갇히면 선과 악이 불분명해진다. 왜냐하면 ‘악'이라 하더라도 악에 빌붙는 인간들도 많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선'이 훨씬 숫자적으로 많지만 그들은 그렇게 반대의견을 내지 않는다. 오로지 ‘악’에 붙은 사람들이 많은 소리를 한다. 그러다 보면 내가 하는 악마적인 말이 선의에 가깝다고 느끼게 되고 ‘그럴 것이다’가 ‘그렇다’가 된다. 선과 악은 포르노와 같다. 포르노를 싫어하는 사람 치고 보지 않는 사람은 없다.


위의 사진은 한창 ‘교관 사진 전시회'를 할 때 작업한 사진 중 하나다. 그룹전으로 하자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룹전은 여러 명이서 같이 전시를 하는 것이다. 대부분 풍경사진이나 인물사진을 전시하는데 나만 늘 초현실 사진을 작업한 것이라, 이게 뭐랄까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좀 더 디테일하게 말하자면 사진협회 사람들이 있고, 사진학회 사람들이 있다. 협회는 말 그대로 직업 선전에 뛰어들어 업으로 사진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고, 학회는 사진을 학업으로 공부하여 전공하고 심지어는 유학까지 갔다 온 사람들, 그렇지만 꼭 사진을 업으로 하지는 않지만(업으로 하는 사람도 있고) 사진에 대한 퀄이 높고 자존심이 강해서 말이 많다. 자신의 말이 일단 맞으니까 자신의 의견이 묵살되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이다. 그래서 여기에 끼면 늘 귀찮고, 저기에 끼면 풍경사진 – 해 뜨는 사진, 호수 사진, 왜가리 사진 같은 늘 보던 사진들이라 나는 여기에도 저기에도 끼지 못했다. 아니 끼지 않았다.


같이 전시회를 하면 좋은 점은 당연하지만 비용이 적게 든다. 대관료도 다 같이 내니까 좋다. 하지만 나는 작업해 놓은 초현실 사진들이 많고 초현실 사진 하나하나에 대한 스토리가 가득해서 그냥 혼자서 늘 전시회를 했다. 보통 자주 가는 카페의 사장님과 딜을 봐서 오랜 기간 동안 전시를 하지 않고 한 3일에서 4일 정도만 했다. 왜냐하면 이런 초현실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전시회 사진들을 왕왕 올릴 텐데 뭐야? 이게? 하는 사진들도 수두룩하다.


그래서 나의 전시회의 특징이라면 첫날 왔던 사람들이 매일 와서 오랫동안 죽치다 간다는 점이다. 카페니까 테이블에 의자도 있으니까 느긋하게 음료를 홀짝이며 초현실 사진과 초현실 이야기에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그때 이런이런 초현실 소설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도 했는데 그 소설들이 책으로도 나오고 곧 밀리의 서재로도 나온다. 그걸 생각하면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초현실 이야기는 늘 나의 마음을 잡아끈다. 초현실은 비현실인 것 같지만 실제적인 현실이기도 하다.


장 뤽 고다르의 영화를 좋아하는데 고다르의 영화는 대체로 초현실적이다. 지정된 게 없고 마구잡이인 것 같은데 그 속에 질서가 있다. 그야 봤자 네 편 정도를 봤을 뿐이다. 잘 설명은 못하겠지만 ‘알파빌’은 여러 번 봤다. 60년대의 흑백영화로 눈물을 흘리거나 사랑을 하면 처형을 당하는 미래도시로 간 사립탐정 레미의 이야기다. 알파빌에서도 고다르의 뮤즈 안나 카리나가 나온다. 알파빌은 하루키의 ‘어둠의 저편’ 속 중심이 되는 모텔 알파빌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하루키의 어둠의 저편은 폭력에 관한 이야기다. 아주 초현실 적이며 몹시도 초현실 적이다. 그 안에서 폭력에 관한 현실을 직시한다.


고다르의 ‘미치광이 피에로’ 역시 초현실적이다. 마치 초현실 그림과 사진, 오브제, 독일의 플럭서스의 예술을 보는 것 같은 영상이 2시간 내내 이어진다. 예술과 예술 사이에 모순 같은 메타포가 가득하다. 현실도피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여 광적인 도주를 하다 결국 망상과 절망으로 인해 파국으로 끝나버리는 아주 좋은 영화였다. 물론 안나 카라니가 나온다. 안타깝지만 피에로의 장 폴 벨몽도는 작년에 작고했다. 프랑스에서는 국민 배우일지라도 우리에겐 그저 지나가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삶이라는 게 그렇다. 인생이 초현실 그 자체다. ‘미치광이 피에로’는 고다르의 영화 중에서는 대체로 대중적이었다. 영화 속에는 벨라스케스, 르누아르, 리히텐슈타인 같은 화가들도 피에르의 입을 통해 자주 등장하며 소설가들 역시 자주 나온다. 미치광이 피에로에서 미국 영화감독 사무엘 풀러가 아무렇지 않게 등장하여 말한다.


영화는 전쟁 같은 것이다.

또한 사랑이며,

증오이고,

행동이며,

폭력이고,

죽음이다.

한 마디로 감정이다.


자판이 그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이 든다. 자판 속에 갇히게 되면 모든 게 가능하다고 믿게 되니까. 심지어 사랑까지도. 한 마디로 감정이다.




초현실 하면 역시 라디오 헤드의 키드 에이 https://youtu.be/MXNbfU0Ww_E

연주가 노래가 된다는 걸 키드 에이를 듣고 알게 되었다고. 이런 미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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