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이건 인터넷의 사연이다.
중학교 때 할아버지 과학 선생님이 우리 반을 맡았다. 머리가 반쯤 까진 할아버지 선생님은 우리 동네를 도시로 생각할 만큼 깡시골에서 오셨다고 했다. 가장 사춘기의 여자아이들은 할아버지를 무시했다. 자고, 떠들고, 킬킬거리고 여자애들은 할아버지 선생님의 늙고 따분한 목소리를 들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은 수업 대신에 자신이 만들어온 설문지를 돌렸다. 자신의 수업이 왜 싫은지, 어떻게 하면 자신의 수업을 들을 것인지 그 애들의 생각을 물었다. 여자애들은 철이 없고 버릇이 없어서 날 것 그대로의 생각을 그대로 썼다. 어떤 애는 할아버지가 재밌는 얘기 하나 없이 수업만 해서 싫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받아들이기엔 너무한 말들 투성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부터 선생님은 머리를 빡빡 밀고 모자를 쓰고 오셨다. 어느 날은 빨간색, 어느 날은 노란색, 선생님이 생각하기에 가장 젊어 보이는 색으로 늘 정장 차림이었던 선생님 머리 위에 두건, 어느 날은 야구모자. 그걸 보고 여자애들은 더 킬킬거리고 웃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유머 모음집 같은 이름의 책을 사서 수업 시작하기 전에 한 페이지씩 읽으셨다. 그러자 그 버릇없던 애들이 선생님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전부는 아니었지만 숙제를 꼬박꼬박 해오는 애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선생님 이후로 여태 그런 어른을 본 적이 없다. 사춘기 여자애들의 생각 없는 말들을 진심으로 수용하고 노력했다. 분홍색 재킷을 사 입고 빨간 두건을 두르는 것은 그에게 절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후로도 그는 학생들이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만들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닮고 싶은 어른이다.
라는 인터넷 사연이 있다. 앞에서 빨강머리 앤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를 했는데 그 이야기가 좋은 이유는 개인적으로 앤보다는 마릴라 아줌마 때문이다. 마릴라 아줌마는 앤 셜리를 처음부터 반대하고 무뚝뚝한 성격의 소유자다. 하지만 앤을 받아들이고 나서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앤을 키운다. 마릴라는 자신의 잘못으로 브로치를 잃어버렸는데 앤을 의심하고 소풍을 가지 못하게 한다. 앤은 소풍이 가고 싶어서 자신이 가져갔다고 거짓말을 한다. 앤은 그렇게라도 해서 다이애나와 함께 소풍을 가고 싶었다. 그러나 마릴라는 앤이 브로치를 가져간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잃어버린 걸 알고 방으로 올라가 앤에게 자신이 잃어버렸는데 널 의심해서 미안하다며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용서를 빈다. 어른이 되어서 본 마릴라 아줌마의 모습은 어른인 나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어른이 되고 주위를 둘러보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진정으로 사과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거짓 웃음으로 변명과 이해시키려고만 했다. 무뚝뚝하지만 마릴라 아줌마 같은 어른은 정말 보기 드물다는 걸 알았다. 그런 마릴라 아줌마에게 교육을 받고 자랐기에 나중에 앤 셜리는 아름다운 아가씨가 된다.
어른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잘 볼 수 있는 영화가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바닷마을 다이어리'다. 매년 유월이 되면 이상하게 보게 되는 영화다. 영화가 시작하고 18분부터 가슴이 따뜻해지기 시작해서 따뜻함이 지치지 않고 끝날 때까지 죽 이어지는 신기한 영화다. 18분에 스즈가 언니들에게 언니들의 집에 가고 싶다며 출발하는 기차를 따라 뛰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칸노 요코의 피아노 곡이 죽 흐른다. 원작이 있긴 하지만 이 영화는 온 마을이, 온 마을의 사람들이 스즈를 한 식구로 받아들인다.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만화처럼 기쁘게 이어진다.
스즈를 위해 후타는 터널을 구경시켜주고, 니노미야 아줌마는 스즈를 보물로 생각하고, 후쿠다 아저씨는 언제든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싶으면 몰래 오라고 한다. 서포트를 해주는 하마다 점장부터 마을 사람 모두가 스즈를 그대로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일말의 의심이나 고민 같은 것도 없다. 그래서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졌지만 영화는 해내고 있다. 세 언니들은 자신들과 전혀 닮지 않은 스즈와 지내면서 점점 자신들과 닮은 모습을 하나둘씩 발견한다. 매사에 꾹꾹 참고 견디는 선 큰 언니 사치와 닮았다. 게다가 귀 모양까지 닮았다. 술을 마시고 주정 부리는 건 둘째 언니와 닮았다.
초반 하마다 점장이 집으로 와서 같이 튀김과 모밀국수를 먹을 때 하마다 점장이 에베레스트 등산 후에 발가락 6개가 동상으로 없어진 걸 보여준다고 했을 때 온통 아버지의 기억으로 채워진 스즈와 큰언니 사치의 행동은 비슷하다. 두 사람은 기겁을 하고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다. 그러거나 말거나 요시다는 밥이나 먹고 치카는 혼자서 계속 자신의 말만 한다. 스타일이 다 다른 것이다.
이 영화가 소설이었다면 치카와 스즈가 함께 카레를 먹는 장면을 길게 몇 장에 걸쳐 썼을지도 모른다. 낚시를 즐기는 치카는 스즈가 아버지와 함께 낚시를 자주 했다는 말을 듣고 비로소 처음 본 동생과 기억이 없는 아버지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치카가 만든 어묵 카레를 먹으며, 아버지와의 추억이 1도 없는 치카 언니와 아버지와의 추억으로만 가득한 스즈는 그것을 공유한다.
고래 뱃속 같은 작은 마을의 사람들은 스즈를 가족처럼 대한다. 누군가 세상을 떠나면 모두가 하나같이 슬퍼한다. 떠난 사람은 남겨진 사람들이 기억해 주고 남겨진 이들은 서로를 위로한다. 피를 나누지 않아도 그들은 가족이 된다. 그런 가족에게 스즈는 사랑받는다. 보는 이들도 스즈를 통해서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새로운 가족을 울타리 안으로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건 어른들의 몫이다. 스즈를 가족으로 받아주는 어른들 덕분에 스즈는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듯 자연스럽게 마을에 스며든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가족이라는 건 전부 생판 모르는 타인을 만나서 가족을 이루기 때문에 늘 어렵고 부딪히고 힘들다. 새로운 가족은 이미 이루어진 가족에게 스며드는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였다. https://youtu.be/V-MoXpzKXv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