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수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교관 Dec 28. 2022

팥죽

음식 이야기


어릴 때부터 단팥죽보다 팥죽이 좋았던 나는 일주일 내내 팥죽만 먹으라고 해도 넵! 하며 대답을 할 정도였다. 나에게는 그런 음식이 몇 있다. 사람들은 질린다는데 절대 질리지 않고 몇 날 며칠을 매일 먹어도 좋을 음식들.


나는 카레도 그런 음식이라 일주일 내내 질리지 않고 먹은 적도 있었다. 그때는 대학교 때 자취할 땐데 친구들은 일주일 내내 카레만 먹는 나를 보며 몸에서 카레 냄새난다고 실부라 했지만 자취에 찌든 홀아비냄새나는지들보다 나았다. 고 생각했다. 뭐 도긴개긴이지만.


팥죽에 동치미 무는 정말 찰떡궁합이다. 따뜻한 팥죽을 먹고 시원한 동치미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고 무를 아작아작 씹어 먹는다. 나에게 있어 가장 완벽한 팥죽먹기다. 팥죽을 먹을 때에는 붉은 김치 말고 열무김치나 동치미가 잘 어울린다. 뭔가 과학적이거나 이유는 없다. 그저 그런 느낌일 뿐이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팥죽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그 말은 어릴 때에도 팥죽은 집에서 거의 먹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어릴 때에도 단팥죽이나 호박죽보다는 그냥 팥죽을 좋아했다. 역시 외할머니 때문이었다. 나의 외할머니.


이 세상에 외할머니는 딱 한 명뿐이다. 할머니는 많지만 외할머니는 오직 한 사람뿐이다.


나의 외할머니에게는 많은 손주들이 있었지만 유독 나와 친밀한 관계가 된 것은 내가 4, 5살 즈음 집안 사정으로 부모님과 떨어져 외가에서 외할머니와 2년 정도를 같이 살게 되었다. 매일 밤 엄마가 보고 싶다고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울었다. 그럴 때 외할머니는 나를 달래야 했다. 기억은 안 나지만 사진을 보면 나는 그렇게 서럽게 울고 있었다.


동네 아이들과 어울리려고 하면 나는 멀리서 온 엄마 없는 놈이라고 따돌림을 당해서 아이들에게 덤벼들다 맞아서 울었다. 그럴 때 외할머니가 원더우먼처럼 나타나서 나를 구해 주었다.


할머니는 울고 있는 나의 등을 슬슬 문질러 주며 팥죽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어 주었다. 처음에는 아무 맛도 나지 않고 싫어 죽을 것 같은, 팥 맛만 나는 팥죽이었는데 어느 순간 외할머니와 나란히 앉아 팥죽을 맛있게 먹었다. 시간이 흘러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 외할머니가 집에 오시면 3,40분 정도 걸어서 전통시장까지 가서 팥죽 골목에 앉아서 팥죽을 먹곤 했다.


그 팥죽골목이 아직까지 있어서 조깅을 하고 오면서 둘러 오더라도 그곳으로 오곤한다. 그곳에 가면 외할머니의 등이 보이기도 하고, 나란히 앉아서 팥죽을 먹으며 웃던 외할머니가 떠오르기도 한다.


팥죽을 한 숟가락 떠먹고 나면 외할머니는 동치미 국물을 꼭 먹였다. 혹여 팥죽이 목 막히게 하지나 않을까 싶어 동치미 국물을 떠 나를 먹였다. 나의 완벽한 팥죽 먹기는 이렇게 형성이 되었다.



오늘의 선곡은 팥죽과는 무관한 뎀 양키즈의 하이 이너프 https://youtu.be/l_uh8XjgLTE

RHINO
매거진의 이전글 한파 속 조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