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1일째
47.
“자네는 감기와는 동떨어진 종류의 사람 아닌가, 별일이네. 아 그건 그렇고 자네 조깅을 하면서 나도 좀 데려가 줬으면 하는데.”
최원해가 웃으며 말했다. 마동은 이 사람이 드디어 부탁을 하는구나, 올 것이 왔구나. 하는 한탄이 들었다. 마동은 어떻게 하면 기분 나쁘지 않게 거절해야 할까 잠시 생각했다. 시그널 라이트의 짧은 신호가 바뀌는 시간 동안 지끈거리는 머릿속에서 거절하는 방법을 12가지 정도 나열해 보았다.
“전 달리는 속도가 빠릅니다.” 마동은 컴퓨터 모니터를 보며 음의 높낮이가 없는 톤으로 말했다. 최원해라는 인간은 끈질긴 사람이다. 아마도 같이 달리기를 하자고 몇 날 며칠을 생각하고 나서 말하는 것이다. 마동이 어떠한 대답을 해도 최원해는 교묘하게 피해 가면서 마동과 어떻게든 조깅을 하자고 할 것이다. 마동은 오늘따라 더 뼈마디가 툭 붉어진 손가락으로 관자를 꾹 눌렀다. 뚱뚱한 최원해와 달리기를 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가뜩이나 무거운 머리가 더 무거웠다.
“좀 되었지만 어느 날부터 마누라가 밤에 나를 자꾸 피하려고 해.” 최원해는 마동의 귀 가까이 다가오더니 아주 조용하게 말을 했다. 아직 점심식사 전인데 입에서 일회용 커피믹스와 고추장 양념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최원해는 잠시 아내의 상태를 떠 올리려는 듯 생각에 잠겼다.
“처음엔 하기 싫으면 관둬, 라는 식으로 나도 밀고 나갔지. 결혼하고 오래 살다 보면 서로 보기 싫어지는 순간이 쌓이는 거야. 매일 얼굴을 보며 살아가는 거, 그게 단 한 번뿐인 일생에서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지. 서로가 좋게 보이지 만은 않다는 거지. 누구나 그렇다네. 그래서 업소 아가씨와 간간이 잠을 잤지. (더욱 조용히) 내 돈으로 간 건 아니고 말이지. 스폰이 있다네. 자네가 원하면 내가 데리고 가도록 하지. 나에겐 업소 아가씨와 즐길만한 여윳돈 같은 것은 없지만 말이네. 하지만 어떻게든 가게 되는 곳이야. 뭐 몇 번 가다 보니 그 아가씨와도 나름대로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었네. 어느 날 그 아가씨와 섹스가 끝난 후 와이프에 대한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하기 시작했지. 가슴도 이제 만질 생각이 안 든다, 살은 다 터서 보기 흉하고 등등 이런저런 이야기들 말이지. 이야기를 하다 보니 대부분 와이프의 험담이더군. 이야기를 가만 들어주던 그 아가씨가 그러더군. 아마 부인도 당신만큼 당신의 변하고 추한 모습에 상처 아닌 상처를 받았을 수 있다는 거야. 늘어진 고환이나 성기 밑에 난 털이라든가(최원해는 그것에 대해서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 아가씨는 그러더군. 여자라는 건 말이야,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여자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는 남편의 변한 모습 따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다는 거야. 남편이 밖에서 바람을 피우든 뭘 하든 가정을 지키는 것이 최고의 목적이 되는 것이 가정이 이룬 여자의 무서움이라고 말이지. 아, 그때 아차 싶었지. 그리고 집에 가서 아내에게 술자리를 마련해서 이것저것 대화를 이끌어냈더니 나에겐 배려라는 게 없다더군. 잠자리에서 말이지. 전혀 없다고 하더군. 게다가 내 배가 너무 나와서 무엇인가 힘이 든다고 하더란 말이지.” 최원해는 살짝 뜸을 들였다.
“실은 말이네. 와이프는 나를 별개의 인간으로 대하고 있네. 왜 그런지는 너무 개인적인 일이라 자네에게 말할 수는 없지만 어떻게든 해보려고 하네. 나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야. 자네가 좀 도와주게.” 최원해의 목소리 톤이 살짝 올라가는 듯했지만 다시 자그마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되었다. 최원해의 지극히 개인적이 부분이라 목소리 컨트롤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최원해가 자신의 이야기를 심각하게 말하는 것과는 달리 마동의 귀에는 그 소리가 들어오지 않았다. 마동은 처음 느끼는 이질적인 감기 기운 때문에 최원해가 하는 이야기가 매미 수십 마리가 창밖의 버드나무에 붙어서 울어대는 소리처럼 들려서 머리가 더욱 지끈거렸다. 최원해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지끈거리는 머리는 더욱 조여왔다. 오늘부터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한 업무에 집중을 해야 하고 할 일이 많아서 정신과 상담을 받는 것도 미뤄야 할 판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