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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Jul 07. 2020

담벼락의 落書

사진 에세이

아직 남아있는 골목을 돌다 보면 아이들의 예술적 활동을 주체하지 못한 결과물을 종종 발견할 때가 있다. 이런 풍경은 오직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하지만 청소년들이 많이 다니는-청소년들 중에서도 소수가 자주 다니는) 골목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살짝 엿볼 수 있다.



니 같은 거 만나서 존나 행복병 걸렸다.라는 문구를 보면 행복병에 동그라미를 크게 두 번 그렸다. 엄마보다 더 좋다는 말이다. 맞춤법 따위 그건 ‘내, 이쏭, 니’의 사이에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싸우지 말고, 뒤에 느낌표가 두 개 있는 걸 보니 싸웠나 보다.



자신의 온 마음을 하트라는 커다란 울타리 안에 쏟아냈다. 희는 보라, 하며 이름을 줄여서 누군지 모르게 하려고 했지만 그 마음이 너무 커서 그만 하트 안에 미희라고 울면서 이름을 말해버렸다. 아아 미희는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걸까. 밑을 읽어보면 대략 알 수 있는 문구가 나온다. 니 진짜 거기 왜 같(갔)는데..라는 말로 보아 가지 말아야 할 곳을 미희는 간 것이다. 미희는 도대체 어디로 갔기에 이렇게 쏭과 쫑은 애타게 미희를 찾을까. 돈 때문에? 남자 때문에? 도대체 미희는 어딘가로 간 것일까. '씨발년 안옴직이뿐다'에서 마음을 주체할 수 없다. 우측 상단을 보면 자신의 표정을 일부 그리기도 했다. 그리고 바로 밑에 정. 미. 희.라고 밝혀 어쩌면 낙서를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까지 힘을 북돋아주고 있다. 이녀나. 아아 정감 있는 말이다. 이녀나. 자칫 상스럽게 들릴 수 있지만 쏭(글을 쓴 주체가 쏭이라 하자)은 옆에 하트 두 개를 그려 넣어 전혀 상스럽지 않게 하는 어감을 만들어냈다. 쏭, 당신은 천재.



 다른 곳의 골목에는 이런 낙서가 있다. 어떻든 최광훈은 걸레라는 것이다. 예전 학창 시절에 몰래 가서 술을 마셨던 곰장어집 다락방의 벽면에도 걸레라는 낙서가 제일 많았다. 최광훈과 개걸레는 사랑하는 사이다. 그리고 최광훈을 울산 개걸레라고 적어 놨으니, 울산 개걸레와 그냥 개걸레는 사랑하는 사이다. 아무래도 최광훈은 잘생기고 멋진 걸레인 것 같다.



자신의 욕구를 자신 있게 표현했다. ‘섹’ 자에 끊어서 뿌리지 않고 연결이 된 걸 보면 낙서를 하면서도 어지간히 무서웠던 모양이다. 걸리면 일단 개망신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다리로 떡 버티고 서서 속에 있는 울분 같은 욕정을 밖으로 끄집어냈다는 것에 박수.



문자에서 벗어난 낙서다. 이 낙서는 꽤 컸다. 벽의 주인이 봤다면 아아, 욕이 나올 법 하지만 구경꾼의 입장에서는 꽤 하는군, 하는 생각이 든다. 남자는 담배를 물고 있다. 담배를 입을 죽 내밀어서 피우고 있다. 골목에 숨어서 피워야만 하는 애환 같은 것이 있다. 머릿속은 온통 se.. 생각뿐이다. 욕망에 눈을 뜬 것이다. 딜레마 같은 것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사람들이 완전히 없는 골목이다. 무슨 낙서일까. 한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다. 기호일까. 자신만의 기호로 신호를 보내는 것일까. 호기심이 인다. 우주인에게 지구인이 보내는 신호 정도. 나는 태어난 김에 살아간다, 반짝반짝하게. 정도일까.



초현실주의 낙서가 또 있다. 아마도 사람들이 모두 잠들어버린 밤에 나와서 자신의 작품 활동을 하는 것일까. 이 글을 해석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방 안에서 고이 새근새근 잠이든 밤에 뚱뚱하고 빨간 조끼를 입고 붉은 눈을 한 채 깡충깡충 나와서 낙서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세계로 데리고 갈 제2, 제3의 엘리스를 찾고 있는 것이다.



아아. 다른 골목에서 마주한 낙서다. 오오 수채화다. 밥 아저씨처럼 팔레트를 들고 채색을 하지 않았을까. 대단하다. 친절하게 밑에 자연이라고 제목까지 적어 놨다. 제목에서 마저 자연의 싱그러움이 묻어난다. 활자에서 생명력이 느껴지고 그림의 보색에서 살아있음을 느낀다. 예술이란 딜레탕트야,라고 작품은 말하는 것 같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 자체가 예술이다. 이 모든 게 예술이다. 꼭 큰 사람이 되어라.



마지막에 찾은 낙서는 ‘호두’다. 어째서 호두일까. 호두가 퍼뜩 머릿속에 떠올랐을까. 머릿속에 호두가 잔뜩 들어있어서 오로지 ‘호두’라는 단어밖에 생각나는 것이 없었을까. 그(또는 그녀)는 많은 단어 중에 호두라는 단어를 왜 떠올렸을까. 아마 자신의 별명이 아니었을까.  그(그녀)는 전날 밤 꿈을 꿨다. 잠을 자는데 호두 병정들이 떼로 몰려와서 밧줄로 자신을 꽁꽁 묶은 다음 호두에게 심문을 받는다. 밟혀서 버려진 호두를 어디에 버렸냐고 고문을 당한다. 그는 꿈속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생각처럼 잘 되지 않는다. 하고 싶은 말을 막 할 수 없다. 우물우물하는 사이 호두 소대장의 외침과 동시에 호두 병정들이 묶었던 밧줄을 더욱 죄어서 죽음을 느끼는 와중에 깨어버린 것이다.


정말이지 재미있는 낙서의 탐방이다. 순전히 발이 편한 운동화를 신고 영차영차 사람들이 드문 골목길 사이사이를 돌아다녀야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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