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6.
승섭이는 평소에 내가 혼자 앉아 있으면 다가와 쪽지를 몰래 건네주고 갔다. 쪽지를 펼쳐보면 나에게 이런 음악이 있는데 분수대로 나오라느니, 오늘 점심을 같지 먹지 않겠냐느니, 미국에서 온 건축 잡지가 있는데 같이 보자, 같은 메모가 있었다.
읽고 나면 갈기갈기 찢어서 잘 버려주기 바란다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반은 다른 곳의 쓰레기통에 버려,라고도 쓰여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귀찮아서 강의실 쓰레기통에 다 버렸다가 밥을 먹으면서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를 열 가지나, 밥을 먹는 내내 들어야 했다. 승섭이가 하루는 미국에서 건너온 또 다른 잡지라며 금발의 포르노 배우들이 다리를 벌리고 자신의 생식기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진만 있는 잡지책을 들고 왔다. 게 중에는 거기에 링이 달려 있기도 했다. 승섭이의 눈 주위가 또 붉게 물들었다. 내 자취방은 승섭이가 머물렀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한 달이나 지나서 학교에 나타난 승섭이는 양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선배의 방에서 선배와 그녀와 나는 나란히 앉아서 밥을 먹었다. 먹다 보면 선배는 걸걸한 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나와 그녀는 웃으며 이야기를 듣는 쪽에 속했다. 내가 고개를 숙이고 소리가 나지 않게 웃었던 반면에 그녀는 진취적으로 웃었다.
“요즘은 무슨 책을 읽고 있어요? 러시아 고전?” 그녀는 내가 책을 읽는다는 것을 선배에게 들었다고 했다. 그녀가 웃을 때는 이를 드러내고 크게 웃었다. 눈의 끝이 밑으로 쳐졌고 눈가의 주름이 미술작품처럼 번졌다. 그녀의 웃음은 환했고 웃을 때 보이는 치아는 기분이 좋았다. 저런 입술과 키스를 한다면 영혼이 다 빨려나가도 좋다는 생각을 순간적으로 했다. 결정적으로 그녀는 내 앞에서 잘 웃었다.
누군가의 이야기에 이렇게 잘 웃어 준다면 말하는 사람은 입에 모터를 달고서 라도 이야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선배라는 사람은 듣는 이가 잘 웃지 않아도 이야기를 쏟아냈다. 잘 웃지 않는 이가 바로 나였다. 선배의 이야기는 늘 사람들을 자신의 곁으로 모이게 하는 어떤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해변에 도착을 했을 때는 말이지 태풍이 이미 파도를 2미터 높이만큼 만든 후였지. 라디오나 뉴스를 확인하지 않고 가버린 결과였어. 태풍이라는 난관을 맞이하게 된 거야. 하지만 태풍을 무시하고 해변에 텐트를 쳤어. 안도 다다오 수준으로 텐트를 쳤지. 태풍이 몰려오는 해변과 잘 어울리게 말이야. 자연주의적으로 더 이상 안전할 수 없을 정도로 해변 바닥에 박아 버렸지. 해풍이 어마어마하게 불어댔지. 태풍이 바다를 만나 해풍을 만들었는데 그 움직이는 바람이 눈으로 보일 정도였지. 바람이 저기에서 저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단 말이야. 굉장했지. 지긋지긋할 정도로 굉장했어. 해변은 말이야 어떤 깎아지른 절벽 같은 곳을 타고 내려가서 찾아낸 보물 같은 해변이었어. 해변은 오래전 영화 구니스에서나 볼법한 아름다운 해변이었어. 자갈로 되어 있는, 태풍이 막 몰려오기 직전 날이 흐르고 물속에 들어가기도 너무 차가웠어. 여름인데 이렇게 물이 차가울 수 있다는 게 꽤나 신기했지. 여름에 차가운 건 어쩐지 냉장고 속이나 가능한 일이잖아. 그런데 그 오지 같았던 해변에도 텐트를 들고 온 우리 같은 사람들이 이미 와 있었어. 그중에는 가족이 두 팀이나 되었지. 해변에는 물질해서 해산물과 음료와 술을 큰 대야에 담아서 파는 간이매점 같은 곳도 있었어. 정말 분위기가 있는 장소라고 우리는 생각했지. 태풍만 아니었다면 붉은 석양을 보며 덱체어에 앉아 소주를 마음껏 퍼마셨을 거야.
어떻든 텐트를 치고 안에서 축배를 들었어. 네 명이 해변으로 갔는데 한 명은 이미 소주에 취해 텐트 하나에서 뻗어버렸지. 상체는 텐트 안으로, 하체는 텐트 밖으로 내놓은 채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어 버렸고 간이매점은 엄청나게 불어대는 해풍에 철수를 하고 남은 소주도 다 떨어져 가고 있었어.”
선배가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선배의 자취방에 무전취식을 하러 온 아이들은 선배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야기에 집중을 했다. 마치 모이를 받아먹는 아기 새들 같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