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12.
“그 사람은 당신을 무척 생각하고 있어요. 후배로서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말이에요. 그거 알고 있죠? 다른 이들을 대할 때와 당신을 대할 때 분명히 달랐어요. 그건 표면적으로 빛이 몸에 떨어지듯이 보이는 것이 아니었지만 알 수 있어요. 그 사람에게서 흔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죠. 그 사람이 한 번은 제게, 당신에게 여자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게 어때?라고 말했어요. 참 이상한 사람이죠. 자신의 여자에게 말이죠. 그때는 흥 그랬는데 막상 당신을 보니 그 말이 이상하지 않게 다가왔어요. 세상에는 해보기 전에는 모르는 것 투성이니까요.”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악마의 땀은 증식했다. 숙주를 통해서 안전한 곳을 택해서 그곳을 기점으로 악마의 땀은 점점 불어났다. 몹쓸 것이 어두운 곳에서 자신의 개체를 늘려가듯 증식했다. 기분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방 천장에서 얼마 전에 거둬 낸 볼품없고 질서 없이 쳐져 있던 거미줄이 된 기분이었다. 귀가 달아오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찌 된 일인지 제니퍼 원스의 ‘페이머스 블루 레인코트’가 다시 흘렀다. 숨이 조금 찼다.
“그렇지만 내 마음도 있었어요.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 당신에게서 나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어요. 정말로. 이건 거짓말이 아니에요. 이해해 달라고 하진 않을게요. 저도 어디선가 읽었는데 이해는 오해의 전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요. 당신을 본 순간부터 당신과 마주 대할 때마다 당신의 모습은 저의 모습을 많이 닮은 듯 보였어요. 왜 그럴까요? 당신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했다는 것 말이에요. 내 말에 당신이 기분 나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분명한 건 당신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져간 것은 내 의자였어요. 그 사람이 시켜서도 아니고 그 무엇도 아닌.”
팔을 뻗어 그녀의 가슴을 움켜잡았다. 누군가 나의 팔에 칩을 심어 놓고 조종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가만히 있었다. 가슴을 잡는 순간 로맹 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가 떠올랐다.
‘그는 테라스로 나와 다시 고독에 잠겼다. 물가로 밀려온 고래의 잔해, 사람의 발자국, 조분석으로 이루어진 섬들이 하늘과 흰빛을 다투고 있는 먼바다에 고깃배 같은 것들이 이따금 새롭게 눈에 띌 뿐, 모래언덕, 바다, 모래 위에 죽어 있는 수많은 새들, 배 한 척, 녹슨 그물은 언제나 똑같았다. 카페는 모래언덕 한가운데 말뚝을 박소 세워져 있었다. 도로는 그곳으로부터 백 미터 남짓 떨어져 있었으므로, 차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입술과 다르게 그녀의 가슴은 내가 인식하려는 것과 실제의 인식 그 사이에 있는 다루기 힘든 고독이었다. 이내 손을 떼고 말았다. 열 살이나 되어서 바지에 오줌을 지린 것처럼 나는 무엇을 잘못한 사람처럼 당황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