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이렇게 스산하고 우중충하고 쌀쌀한 늦가을이면 학창 시절 토요일에 친구의 집에서 끓여 먹었던 라면이 생각난다. 친구의 집은 오래된 3층짜리 집으로 1층은 세를 주고 2층에 부모님과 누나가 살고 친구의 방은 3층이었다. 3층이라고 해서 거창한 건 아니고 2층에서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덩그마니 방 하나가 나오는데 친구의 방이다.
2층에는 방 두 개에 욕실 하나 주방 하나인 80년대 주택이다. 친구의 방은 작진 않았지만 천장이 낮았고 책상이 두 개가 있었다. 그 외 문화생활을 할 만한 여타 물건은 거의 없었다. 친구의 어머니는 생선 장사를 하시고 아버지는 역무원이어서 토요일 낮에는 아무도 없어서 학교에서 일찍 끝나면 왕왕 갔다.
주로 라면을 먹으며 영화를 봤다. 한 번은 라면을 먹으면서 플라이 1편을 봤는데 으 하는 표정이 되었다. 며칠 전에 친척이 돼지껍데기를 두 봉다리를 줘서 그걸 어째 어째, 해 먹는데 털을 제대로 뽑지 않아서 먹다가 으 하는 표정이 되었는데 딱 그렇다.
친구의 누나도 토요일에는 신나게 밖에서 노느라 그런지 집에 없었다. 우리는 보통 야한 영화를 보고 싶은데 이상하지만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넘치는 테스토스테론으로 한창 왕성할 시기에 봐줘야 할, 애로 영화(라 부르고 실은 포르노)보다는 공포영화를 우리는 주로 봤다. 공포영화를 보면서 스산한 가을의 토요일 오후에 끓여 먹는 라면은 정말 맛있었다.
라면 국물이 거의 졸아서 짭짤하게 먹는 건 맛있지만 국물이 많아서 면이 너무 흐물렁해져 밍밍하게 먹는 건 별로였다. 라면을 세 개 이상이 되면 항상 국물이 졸아서 먹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늘 맛있었다. 나는 우리 집 김치는 안 먹어도 친구네 집 김치는 맛있게 잘 먹었다. 친구에게는 삼촌이 있었는데 친구 아버지의 막내 동생이고 우리보다 한 살 많았는데 말 그대로 삼촌 같았다. 고등학생이었지만 삼촌이 있으면 밤새 라면에 술을 마셨다. 그리고 3층에 전부 시체처럼 널브러져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칫솔을 먼저 잡는 사람이 양치를 하고 나왔다.
어느 스산하고 흐리고 쌀쌀한 토요일에 친구네 집에 갔을 때 누나가 있었다. 우리는 인사를 하고 라면을 끓여 먹으려 했는데 누나가 라면을 끓여 주었다. 우리는 그동안 방에서 영화를 봤다. 제목은 생각 않나지만 데니스 퀘이트와 맥 라이언이 나오는 영화다. 어떤 탐정선을 개발했는데 앤터맨처럼 아주 작아져서 사람의 혈관을 타고 다니는 그런 영화다. 이 영화에서 만난 두 사람은 눈이 맞아서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현재는 커서 개쩌는 성인 쫄쫄이 메리야스 영웅 시리즈 ‘더 보이스’에 주인공으로 나오고 있다.
아무튼 영화를 보고 있으면 친구 누나가 밥상을 들고 왔다. 상위에 냄비 채 올려진 게 아니라 라면을 끓여서 우리 세 사람의 그릇에 담겨 있었다. 라면은 다섯 개를 끓였다. 우리가 끓였다면 국물이 없고 졸아서 쫄면처럼 먹었을 것이다. 그런데 누나가 끓인 라면에는 국물이 있었다. 고단수였다. 그리고 파가 아주 많이 들어가 있었다. 밥상 위에는 라면 말고 김치와 밥도 한가득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라면을 먹었다. 라면을 한 젓가락 먹었는데 맛이 유니크했다. 처음 맛보는 안성탕면 맛이었다. 우리가 내내 먹던 안성탕면의 맛은 아니었다. 가득 들어간 파 때문이었다. 단맛이 많이 났는데 계란 때문에 단맛 위에 고소한 맛도 같이 났다. 짠맛이 거의 없었는데 묘하지만 먹다 보니 맛있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요즘으로 치면 파기름을 내서 라면을 끓여 준 것이다. 고명으로도 많은 양의 파를 넣고 계란도 넣었다. 그때는 뭐든 맛있어서 그냥 후루룩 퍼 먹었는데 몇 번 그렇게 친구 누나가 끓여 주었다. 누나가 끓여 주는 라면의 유니크한 맛에 우리는 빠져 들었다.
그러다가 졸업을 하고 군대를 가고 시간이 지나니 가끔 그 라면이 생각이 난다. 오늘처럼 스산하고 쌀쌀한 늦가을의 날이면 그 유니크했던 파기름 라면의 맛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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