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7.
“자네 일어났는가? 학생처럼 보이네만 이런 곳에서 두 시간 이상 잠을 자다가는 얼어 죽는다네. 자네는 산책했을 모양이구먼. 여기에 잠시 앉았다가 졸음이 찾아온 모양이야. 그러다 죽고 말아.”
나는 그녀를 붙잡으려고 양팔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고 툇마루 같은 평상 위에서 졸면서 비스듬히 벽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내 몸에는 담요가 한 장 덮여있었다. 나는 이곳에 앉아서 잠을 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추운 날에,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자취촌에서 어디까지 걸어온 걸까.
눈은 더 이상 내리지 않았고 하얀 설경은 눈이 부셨다. 눈으로 만들어진 장막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내 곧 눈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천덕꾸러기로 바뀔 것이다. 태양은 하늘에 떠 있었고 내가 앉아있는 작은 슈퍼의 처마 끝에서는 고드름이 물을 짜내고 있었다.
나는 일어나서 슈퍼의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담요를 건넸다. 몸이 차가워져서 내 속에 머물러있던 그녀의 온기가 사라졌다. 담요를 건네받은 슈퍼의 주인이 나에게 괜찮으냐고 물었다. 다행히 슈퍼 주인은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지 않았다. 내 얼굴이 아주 상기되어 있다면서 열이 있는 것이 아니냐며, 자기 이마에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나에게 열을 체크해 보라고 했다.
하체에 약간 동통이 있었다. 그건 꿈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했다. 선명한 기억과 매몰찬 여러 개의 감각이 자아낸 현상이 조금 전까지 살아있었던 에테르와 같았다. 그래서 도저히 그녀와의 일이 비현실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녀를 생각하니 또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이것저것 생각할 것도 없이 슬픔이 그대로 목울대로 올라왔다.
그녀를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다시는 볼 수 없는 곳으로 나는 되돌아왔다. 이 지옥 같은 곳으로. 나는 이곳이 싫었다. 그림자가 없는 그곳에서 그녀와 함께 영원히 살고 싶었다. 그녀에게 내 결핍을 막아 달라고 하고서는 그대로, 그대로. 그대로.
주인이 나에게 다시 괜찮으냐고 물었다. 나의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도대체 그게 뭐라고 나는 더욱 치미는 감정을 참았다. 마음이 아팠다. 내 몸은 눈이 내리는 추운 아침에 무방비로 내놓고 잠든 것치고는 체온이 떨어지지 않았고 하체는 아릿함이 전해 주는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내 손으로 전해지던 그 온기가 눈앞에서 보이던 서글픈 미소는 내가 만들어낸 환상이라고 하기에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선명했다.
다시 한번 마음을 누르는 결락감이 찾아왔다. 나의 결락을 눈치챘는지 슈퍼 주인은 몸을 돌려 작은 슈퍼의 하루를 시작하는 것으로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슈퍼 앞에 흩뿌려진 눈은 싸리비로 쓸어서 슈퍼에 오는 사람들이 미끄러지지 않게 했고, 기와지붕 끝에 매달린 눈을 빗자루로 털어 냈다.
“놔두면 골치가 아프거든.”
빗자루로 안 되는 곳은 수건을 말아서 탁탁 치기도 했고 후후 불어가며 눈을 치웠다. 오래된 스테인리스 미닫이문을 열어 놔서 슈퍼의 내부가 보였다. 슈퍼 안은 무척 오래됐고 작고 포근하게 보였다. 이곳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낸다면 마음이 따뜻하겠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난로를 지금 막 때웠는지 난로의 몸 이곳저곳에서는 물속에 오래 있다가 나온 해녀처럼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났고 난로에 연결된 연통의 주둥이도 역시 연기를 한없이 내뿜어내고 있었다. 열정에 혼을 팔아버린 미술가가 조작조작 피어오르는 연기를 본다면 대번에 앉아서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