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54.
나는 그녀에게 무엇이라도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언제나 헛소리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녀 앞에서는 늘 그렇다. 그녀는 일어나서 내 양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녀는 자기 입술을 내 입술에 갖다 대었다. 나는 막걸리의 냄새가 올라올까 봐 입술을 다물었다. 두 입술의 통합은 짧은 찰나 붙었다가 떨어졌다.
“밥 아직 안 먹었지? 우리 밥 먹으러 갈까?”
그녀의 말에 나는 그러자고 했다. 아직 뱃속에는 라면이 막걸리와 함께 헤엄치고 있었다. 밖은 눈부셨다. 빛을 받은 소금처럼 찬란했다. 자취촌은 새하얗게 눈으로 덮여있었고 학생들이 소년화 되어서 신나게 눈을 던지며 자취촌의 겨울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눈은 정말 모든 풍경을 똑같게 만들었다.
눈이 오는 풍경.
12월의 외국 달력 같은 모습이 눈앞에 있었다. 웸의 ‘라스트 크리스마스’처럼 말이다. 그녀는 나에게 조금 멀리 가서 먹지 않겠냐고 물었다. 나는 역시 그러자고 했다. 그녀는 엄마를 따라나서는 다섯 살 아이 같은 나를 데리고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버스정류장은 묘한 기분을 자아내게 했다. 계단을 걸어서 내려가며 바라본 정류장의 풍경 속에는 눈을 한 아름 실은 직사각형의 크고 긴 버스가 한 곳에 우르르 몰려있었다.
어쩐지 괴기한 풍경 같았다. 버스는 좀체 후진하는 모습을 볼 수 없는데 이곳에서는 버스가 천천히 후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러 대의 버스가 코너로 들어가기 위해 코너링을 하며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게임 속에서 유영하는 큰 외계 벌레 같았다.
우리는 917번의 완행버스의 맨 뒷자리에 올라탔다. 그녀는 내가 한 살 더 적다는 이유로 나를 창가에 앉혔다. 나는 그녀 옆에 남자가 앉기라도 하면 어쩌냐고 하는 생각에 우물거렸는데 그녀가 나를 안쪽 의자로 밀어 넣었다. 버스의 의자는 불편했고 시트의 컬러는 적갈색으로 언제 청소했는지 모를 정도로 꼬질꼬질했다.
그녀는 ‘옷은 빨면 돼’하는 표정으로 편하게 앉았다. 버스가 풍기는 특유의 울렁거림이 있는 냄새가 뒷자리로 올라왔다. 앉아있는 자리의 창문을 조금 여니 밖의 시원한 공기가 버스 안으로 들어왔다. 때 묻은 커튼이 밖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살짝 흔들렸고 나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그녀에게 이끌려 밥을 먹으러 버스에 올라탄 것이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꽤 멀리까지 가는 모양이었다. 그녀와 나는 아무런 말도 없이 버스가 출발하기를 기다렸다.
지금 그녀를 따라가는 것이 잘하고 있는 일일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