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에세이
두부와 달리기 같은 일상적인 단어를 소거하고 하루키 하면 떠오르는 수식어가 빙 크로스비, 피츠제럴드, 레이먼드 카버, 리스트, 대공 트리오, 등이 있다. 그리고 그 속에 ‘호밀밭의 파수꾼’도 있다. 학창 시절에 하루키를 접하고 나서부터 한국 작가들을 제외하고 그 외의 소설가들의 소설을 읽는 경우는 주로 하루키가 언급한 소설가들의 소설들이었다.
먼저,
무라카미 류의 ‘코인로커 베이비’를 읽고 나서 받았던 충격과 환희만큼 하루키의 소설은 타격은 없는데 몇 번이고 읽게 된다. 빳빳한 새책을 읽고 싶어서 읽던 글을 다시 읽는 것에 대해서 겸연쩍은 기분이 늘 미미하게 있었지만 어느 날 다시 읽는 것에 대해서 받아들이게 된 후부터는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다.
하루키의 소설들은 대체로 3번은 읽은 것 같은데 그중에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일, 이년에 한 번씩 계속 읽어 버려서 10번은 읽은 것 같다. 그 와중에 책은 세 번이나 바뀌었다. 예전 것, 더 예전 것, 근래의(2000년 초반) 것으로 갈아타면서 읽었다.
‘일각수의 꿈’ 또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로 출간된 한국 버전을 손에 들고 있으면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상상 속에 들어와 있는 착각이 든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을 읽고 또 읽게 된다. 술에 취한 것 같은, 그래서 몽롱해져서 상상의 세계를 이 정신없는 현실세계에서 보여준다.
이 책에는 괴팍한 박사가 나온다. 모든 사건을 일으키고 중심이 있는 인물이다. 뇌 생리학, 생물학, 종교학, 골상학, 언어학, 음성학 등 잡다한 인류의 모든 학문을 습득한 천재 박사다. 하지만 일상생활은 꽝이다. 아인슈타인을 닮았다. 하루키는 어쩌면 아인슈타인을 본떠서 박사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아인슈타인은 그저 연구 욕이 다른 욕구보다 뛰어나서 연구만 할 수 있다면 뭐든지, 가 가득한 사람이었다. 미국이 일본의 원폭 투하를 위해 지구에서 가장 똑똑한 물리학 박사 5명을 불렀다. 돈은 걱정하지 말고 얼마든지 연구를 해라,라고 해서 연구 욕이 불타는, 아인슈타인과 비슷한 물리학 박사 4명과 함께 아인슈타인은 신나게 연구를 했다.
그런데 이 연구가 사람을 대량으로 학살할 거라는 것을 알게 된 아인슈타인은 그 연구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하지만 나머지는 결과가 어떻게 되든 연구만 할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여기서 너무나 유명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볼 수 있다. 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악하게 생긴 인간이 아니라 나에게 잘해줬던 옆집 아저씨, 빵집 아저씨 같은 사람이었다. 아인슈타인이 바보 같고 한쪽으로만 천재성을 보인다고는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모든 것 중심에는 인간이 있었다. 하루키는 그것을 간파했다.
박사는 포유류의 두개골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그것에 대한 골상학을 연구한다. 어마어마한 동물의 머리뼈 수집을 하고 박사는 20년 넘게 뼈에 대해서 연구를 한다. 리처드 도킨스의 ‘지상 최대의 쇼’를 떠올리게 하며, 더 이전의 다윈의 ‘진화’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진화는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걸리기 때문에 인간 한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 진화의 과정을 지켜볼 수 없다. 하지만 책 속의 박사는 다윈과 아인슈타인의 후예 같은 모습으로 연구를 진행시키고 있다. 하지만 그 연구가 결국 주인공을 이쪽저쪽 두 세계로 갈라놓게 만드는 계기를 만든다.
그리고 주인공은 완전무결하고 불사의 세계지만 그 세계에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데 두 세계 중 그 세계에 뛰어들고 만다. 주인공은 감정이 결여된 세계, 장 뤽 고다르의 ‘알파빌’ 같은 세계 그곳에서 하나의 희망을 엿본다. 섹스는 있으나 사랑이 없는 세계에서 주인공은 어떤 무엇을 본 것이다.
그런 연유로 해서 개인적으로 하루키의 소설에 등장하는 다른 소설가나 다른 소설을 읽게 된다. 최초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하루키가 적어 놓은 ‘호밀밭의 파수꾼’에 대한 이야기는 하루키답다. 영국과 미국의 책에 나오는 같은 단어는 다른 뜻을 가지기도 한다. 요컨대 비틀스의 ‘노르지안느 우드’가 영국에서는 노르웨이산 가구라고 받아들이고, 미국에서는 노르웨이 숲이라고 받아들인다.
하루키가 ‘호밀밭의 파수꾼’을 에세이에 적으면서 셀린저의 다른 글들도 일게 보게 되었다. 12월이 되면 늘 ‘호밀밭의 파수꾼’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12월을 마녀의 젖꼭지처럼 춥다고 했다. 마녀의 젖꼭지는 정말 삭막하고 추운 느낌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제목은 한국에서만 이렇게 불리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한 남자의 인생’
일본에서는 ‘인생의 위험한 순간들’
노르웨이에서는 ‘모두들 자신을 위해 그리고 악마는 최후 순간을 취한다’
스웨덴은 ‘기억의 순간에 나타나는 구원자(확실하지 않은 것 같다)
덴마크에서는 ‘추방당한 젊은이’
독일은 한국과 비슷한 ‘호밀밭의 남자’
네덜란드는 ‘사춘기’
호밀밭의 파수꾼은 영화 ‘컨스피러시’에서도 잘 나온다. 주인공인 제리의 집에는 ‘호밀밭의 파수꾼’ 책이 몇십 권이나 책장에 꽂혀 있다. 제리는 서점에 갈 때마다 그 책을 사지 않고는 못 배긴다. 존 레넌을 죽인 마크의 손에도 ‘호밀밭의 파수꾼’이 쥐어져 있었다.
2차 대전에 참전했을 때 막사가 폭격을 맞아서 폭파되는 순간에도 샐린저는 책상 밑에 기어들어가 타자기로 글을 쓰고 있었다고 한다. 샐린저의 전기영화 ‘호밀밭의 반항아’에는 군대에서의 그런 일화가 조금 다르게 그려졌지만 홀든 녀석에게 정신이 점점 빼앗기는 모습의 샐린저가 잘 나온다. 샐린저는 아이 같은 마음을 놓지 않고 있었고 그 아이 때문에 ‘호밀밭의 파수꾼’을 적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지금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어쩌면 이 모든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는 기분이 든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