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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May 18. 2020

시계의 조촐한 죽음을 읽으며

일상 에세이


거울나라의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다음 이야기로 상상으로 똘똘 뭉친 이야기다. 루이스 캐럴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피터 팬을 만들어낸 제임스 배리의 이야기인 ‘네버랜드를 찾아서’를 보면 이런 상상력이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잘 나온다. 네버랜드를 찾아서는 안 그럴 것 같았는데 감동이었다.


어쩐지 하루키도 그렇고 창작물인 작품보다는 그 작품을 만들어낸 작가에 관심이 더 간다. 위대한 개츠비보다 피츠 제럴드도, 헤밍웨이도, 백석이나 조지아 오키프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 훨씬 재미가 있다.


거울나라의 앨리스는 시간, 시계에 관한 이야기다. 하루키의 에세이 ‘시계의 조촐한 죽음’을 읽어보면 단순한 시계 이야기에 빠져들게 써놓았다. 좋아하지만 얄미운 무라카미 하루키 씨.


자신의 삶 속에 들어온 시계.

요즘의 똑똑한 디지털시계가 아닌 태엽을 감아주어야(만) 하는 시계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시계의 죽음.

덜 똑똑한 것보다 더 똑똑한 것이 낫겠지만 똑똑함이 생활의 전부를 차지하지는 않는다.

하루키는 그것을 시계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전달해준다.


태엽을 감아주면 하루 동안은 꼬박 영차영차 하며 시간을 알려주니까 다음 날 그 시간이 되면 태엽을 감아준다. 그건 아침에 일어나서 배변을 보고 밥을 먹고 옷을 입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린 시절 나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외할머니와 무척이나 친했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가난했던 집안의 사정 때문에 4, 5세 정도를 어머니와 떨어져 외가댁에서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외가댁이 있는 촌에서 동네 아이들에게 맞고 들어와서 울고 있으면 외할머니는 캡틴 마블이 되어서 동네 아이들과 아이들의 부모까지 혼을 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어서 집으로 와서 학교를 다니는 동안 멀리 떨어져 있는 외할머니를 자주 볼 수 없었지만 외할머니는 내가 보고 싶으면 먼길을 달려 집으로 오곤 했다. 외할머니가 오면 외할머니 손목에 차던 손목시계에 관심을 가지곤 했다. 요즘 아이들처럼 똑똑하지 못해서 저학년 때에는 초침 시계를 보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외할머니의 손목시계가 다른 전자시계보다 좋아 보였다.


외할머니는 매일 비슷한 시간이 되면 시계태엽을 감아 주었다.

시계의 밥을 주는 거란다.

사람이 밥을 먹는 건 이상하지 않은데 시계가 밥을 매일 먹는 건 참 신기한 일이었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알았는지 외할머니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나에게 차 주었다. 가볍지 않고 묵직한 무게의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반짝이는 금색이 빛을 받아서 빛났다. 나는 시간도 제대로 보지 못하면서 그걸 차고 학교로 갔다. 시계가 손목 밖으로 드러나기를 바라면서.


매일 밥을 줘야 하기에 편리하진 않지만 그 불편함이 시계와 좀 더 친밀하게 하는 관계를 형성시켜 주었다. 매일 밥을 챙겨 먹어야 하는 불편함이 또 하루를 버티게 하는 동력이 된다. 태엽을 감는 것은 귀찮지만 뿌듯한 행위라고 한 하루키의 말이 떠오른다. 드르륵드르륵 태엽을 감다 보면 느슨하게 풀려있던 것이 팽팽해지면서 딱 고정되는 그 의식 속에서 나와 시계를 인지한다.


그리고 시계는 또 하루를 성실히 움직인다.


요즘처럼 몇 년에 한 번 전지를 갈아주면 되는 시계는 분명 편리하지만 시간이 뚝 끊기면 그것대로 시계가 죽어버린 느낌이 든다. 요즘도 손목시계를 오른쪽에 차고 다니는 건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한 외할머니가 그렇게 차고 다녀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고 희미하게 생각해본다.





8년 전에 선물 받은 한국산 시계는 고장이 나지 않고 지금까지 지치지 않고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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