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마동은 달리면서 팔을 흔들면 삼두근위의 어깨근육이 갈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모습으로 강변의 조깅코스를 달리면 실제로 여자들보다 남자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는다. 여자들은 티브이 속 남자배우나 연예인들의 잘 빠지고 근육질의 몸에 관심이 있지만 야외의 조깅코스의 가슴근육이 발달한 남자에게는 관심 어린 눈길을 보내지 않는다. 대부분 이제 운동으로는 근육을 만들 수 없는, 몸만들기를 포기해 버린 나이가 찬 남자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게 된다. 달리고 있노라면 남자들의 시선을 꾸준하게 받는다. 맞은편에서 오는 중년의 남자는 박수를 치고 할아버지에 가까운 나이가 든 남자는 소리를 질렀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심도 있게 준비운동을 끝낸 다음 마음껏 매일 달릴 수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에 가까이 가게 했다. 낮 동안 몸을 덮고 있던 촌스러움에서 비로소 벗어나는 기분을 마동은 느끼는 것이다. 타인은 이러한 마동의 기분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내 기분을 이해해 달라고 남에게 말하거나 내색하지는 않는 스타일의 마동이었다. 그동안 그래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단지 타인이 마동 자신의 유일하게 즐기는 달리기를 방해만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작은 바람이라면 바람이다.
달리기외의 운동이 마동과 맞지 않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마동은 조깅을 하면서 냅색에 무엇인가 넣어서 달리며 휴대전화를 늘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일 때문에라도 언제나 마동은 손을 뻗을 수 있는 곳에 스마트폰은 있어야 했다. 냅색에는 열쇠꾸러미가 있는데 집 열쇠와 사무실, 그리고 서랍열쇠가 같이 붙어있었다. 일의 특수성 때문에 사무실의 열쇠를 잊어버린다면 고작 그 일 때문에 회사의 오너가 나서야 하기 때문에 마동에게는 중요한 물품이었다.
회사 사무실의 모든 것이 오토시스템이지만 서랍과 사무실의 열쇠는 아직 아날로그를 지향하고 있었다. 열쇠는 손으로 들고 다니기에 아주 거추장스러운 물품이다. 그럼에도 열쇠는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하고 열쇠는 그만큼 마동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었다. 개개인에게 지갑이 중요한 것과 흡사했다. 하지만 지갑과 마동의 열쇠는 달랐다. 지갑 속의 내용물은 개인적으로는 중요할지 모르나 일일이 따리고 보면 없어져도 다시 만들거나 발급받으면 그만인 물품이지만 열쇠는 특수성 때문에 잊어버리게 되면 회사의 작동이 멈추게 된다.
스마트폰 역시 마동에게는 소중한 물품이 되었다. 휴대전화는 요즘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다. 마치 사랑한 지 일주일 된 애인처럼 대한다. 잠에서 깨어나 잠들기까지 사람들은 휴대전화 없이는 생활이 불편해졌다. 의미는 다르지만 마동에게 스마트폰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깅을 하다가 회사의 직업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휴대전화에 스케치를 하거나 메모를 해왔다. 메모는 마동이 하는 일에 관해서 여러 부분에 도움을 주었다. 메모가 없었다면 머리에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무형의 것들을 그대로 놓쳤을 것이다. 붕 떠오른 아이디어를 잡아서 스마트폰 안의 스케치 애플리케이션에 잘 스케치를 해뒀다. 일에 관해서, 작업적인 부분에 대해서 대부분을 차지할 만큼 많은 양의 메모를 기입해 놨다. 생각이 번쩍 나면 언제나 기입을 했고 조깅을 하면서도 문득 떠오르는 부분이 있으면 휴대전화의 메모장에 기입을 하고 메모를 바탕으로 회사에서 아이디어 회의나 컴퓨터 시뮬레이션 작업에 요긴하게 사용을 했다. 그래서 마동이 손을 뻗는 반경 내에 휴대전화기는 늘 있어야 했다.
마동이 지니는 몇 개의 물품은 팔뚝의 밴드와 허리에 찬 냅색에 들어있었고 마동과 함께 조깅을 하면 따라서 이동을 했다. 누군가 듣는다면 대단히 거창한 일이라도 한다며 핀잔을 줄지도 모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마동이 하는 일은 거창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꽤 중요한 일이었다.
조깅을 할 때면 팔뚝에 찬 밴드의 휴대전화기에 블루투스로 연결이 된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다. 매일매일 달리지만 듣는 노래는 일정하지 않았다. 어떤 날은 지나간 팝스타들의 노래들, 그러니까 시시알, 데이빗 보위, 조니 미첼, 제네시스를 듣는다. 또 다음 날에는 클래식을, 어떤 날은 영화음악을, 또 다른 날에는 비비킹과 에릭 클랩튼이 같이 부르는 노래를 듣는다. 음악을 듣는데 가리지는 않지만 최신가요만은 피했다. 왜 그럴까. 최신가요는 들을수록 듣는 시간을 축소시킨다고 느끼게 해주는 유일한 음악이었다. 최신가요를 좋아하는 사람이 마동에게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성의를 다해 설명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상업적으로 꽉 짜인 최신가요는 이 노래와 저 노래가 비슷한 공산품이라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전어회 맛을 모르는 이들에게 전어회의 맛을 설명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가 매일 음식을 챙겨 먹지만 음식의 종류가 조금씩 다른 것처럼 마동은 매일 다른 음악을 비타민처럼 섭취하고 있었다. 지금은 폴리시달의 음악을 들으며 달리고 있다. 라이브다. 폴리시달이라는 이름의 명성에 맞게 콘서트홀에 울려 퍼지는 사람들의 여흥 또한 이어폰을 타고 흘렀다. 폴리시달은 자신의 공연에 여자가수를 초대했다. 여자가수는 신인이다. 큰 무대에는 처음 올랐다. 폴리시달이 먼저 그만의 독특한 음색과 특유의 기백으로 노래를 시작했다. 사람들의 '와~'하는 소리가 들린다. 인파에 비해서 청중은 자제를 한다. 그것은 아마도 신인여자가수와 폴리시달의 조화를 위해서이다. 세련된 팬 문화가 세련된 가수를 만들어낸다. 분위기가 ‘거대하다’보다는 ‘정겹다’에 가까운 공연의 느낌이다.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기 때문에 정겹게 들리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눈을 감을 필요는 없지만 노래에 심취해서 달리다 보면 듣고 있는 노래가 전달해 주는 떨림은 몇 배가 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폴리시달이 부르는 노래의 파트가 끝나면 여자가수가 노래를 이어받아서 불렀다. 어쩐지 여자가수는 다듬어지지 않는 원석의 기운이 가득한 목소리다. 훈련을 받지 않은, 그저 음위에 몸을 실어 노래를 부르지만 잘 부르는 기분이 들었다. 단순하게 마동이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여자가수가 부를 땐(아마도 후렴 부분) 사람들이 다 같이 따라 불러준다. 곧이어 청중의 박수소리가 가깝게 들린다. 폴리시달은 특유의 매너로 같이 노래를 부르는 여자가수를 띄워주는 음을 불어넣어 준다. 노래에 생기를 한 단계 더 이끌어 울려줌으로 청중의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중간에 색소폰의 연주가 나오는데 그 연주만으로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서 색소폰이 내는 음에 어깨를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색소폰의 연주가 끝나고 폴리시달은 마이크를 청중에게 돌린 모양이다. 모든 이들이 후렴 부분을 열창을 했다. 휘슬소리와 환호가 한데 어우러져 들렸다. 여자가수가 마지막을 장식하고 끝까지 뒤에서 폴리시달은 청중과 여자가수를 받쳐주는 것이다. 노래가 끝나고 여자가수는 벅차오르는 목소리로 고맙다며 인사를 했다. 아마도 감격에 겨워 청중에게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폴리시달과 한 무대에 섰다는 것만으로도 신인 여가수에게는 큰 기쁨이었을 것이다. 이어폰으로 짱짱하게 노래를 듣고 땀을 듬뿍 흘리며 한 시간여 동안 달린다는 것은 흥분되는 일이며 매일 이러한 이벤트를 맛보는 것에 만족했다. 모든 것을 상상하게 된다.
마동은 찾아서 듣는 음악 속, 그 세계에서 짜릿함을 상상했다. 그건 마치 중학생이 옆집 대학생 누나의 목욕 장면을 훔쳐보는 상상을 하는 것과 비슷했다. 음악을 들으며 땅바닥이나 앞을 조며 꾸준하게 달리는 동안에는 꽤 여러 가지 상념이 지나갔고 마동은 그중에 몇 가지는 선택을 해서 상상하기도 했다. 보통 하루에 멍청하게 있거나 갖가지 공상이나 상상을 할 수 있는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영화처럼 햇살이 들어차는 창가에서 기지개를 켜며 눈을 비비고 일어나 거실바닥에 내려앉은 햇살을 밟고 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좀비처럼 일어나서 바로 화장실로 가 배설을 하고(아닌 사람도 있지만)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먹고 나와서(요즘은 굶는 사람이 더 많다) 자주 가는 카페에서 카페주인과 인사를 하고 커피를 받아서 빠르게 한잔 마신 후 대중교통이 몸을 실어 회사로 고생 끝에 출근하여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려야 한다. 중간에 시간을 내어 치과를 가야 하고, 은행에도 들러야 한다. 줄을 서서 기다려 맛있는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급하게 먹고 난 다음 다시 업무로 복귀하어 대쳐진 시금치가 되어 퇴근하는, 단순하고 반복된 사이클은 언제나 복잡하고 바쁘게 흘러가 버리고 만다. 그러한 패턴이 지니는 복잡성을 사람들은 균형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 속에서 상상 따위를 하는 것은 균형이 깨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을 차지했고 그런 쓸데없는 공상은 자신을 어두운 공간에 유패 시키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동안 여유가 없는 현대인들을 마동은 많이 봐왔다. 그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라면 상상력의 부재였다. 상상하는 것을 살아있는 지렁이를 먹는 것만큼 이상하게 생각했다. 어른이 된 사람들에게서 상상력이라곤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바쁜 일상, 그 속에서 상상이니 공상이니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여유는 없다. 어쩌다 시간이 남아서 여유가 생긴다 해도 사람들은 대체로 여유를 여유롭지 못하게 사용할 뿐이었다. 여유가 생겨도 손에 들어온 모래가 빠져나가듯 종식시키고 만다. 현대인은 삶이라는 무게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지배당하며 그 속에서 주어진 ‘지배당하는 여유’를 바랄 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마동은 사람들과는 좀 달랐다. 마동이 하는 일도 특수성을 띠었고 보통 멍하게 있거나 꽤 여러 가지의 세계에 대해서 상상을 하는 것을 보면 어딘가 이상해 보이기도 했다. 마동에게 사람들에 비해 다른 점은 확실하게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마동은 타인 속에 교집합 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삶이라는 것은 자꾸만 인간을 쓰러트린다. 순간 잘못된 선택으로 크레바스 끝으로 내몰리기도 한다. 크레바스 끝에서 발을 잘못 디뎌 밑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다시 살아 올라오는 사람도 있다. 굴복하지 않으려면 삶의 무게에 당당해져야 한다고 어디에서건 떠들어댄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상상력이 소거되는 순간 무엇인가에 끌려가는 생활을 할 뿐이다. 24시간 중에 한 시간 이상을 달릴 수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 마동에게 주어진 여유를 행복으로 누리게 하는 것이다. 달리는 동안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달리다 보면 아주머니들의 무리를 제외하고 또 하나 거슬리는 것은 조깅코스가 강변이다 보니 주위에 나무, 강 둔치에 자라는 풀이 이룬 풀숲이 강을 따라 죽 나 있는데 그 속에 살고 있는 하루살이나 날파리가 많다. 달리면서 호흡을 하다 보면 입을 통해서 목구멍에 그대로 날벌레가 들어와서 불어 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조깅의 방해자들이다. 날파리 한 마리 따위 입으로 들어가는 게 뭐 큰 대수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느낌은 기이했다.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종류의 음식이 치아를 통해서 여러 갈래갈래 씹혀 분해되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만 그렇지 않고 곧바로 입안에 들어간 벌레가, 생긴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은 몹시 이상한 일이다. 하루살이는 그대로 목으로 들어와서 기도의 벽에 찰싹 달라붙어버리는데 잔기침을 유발했다. 달리는 것을 멈출 수밖에 없다. 기침을 할 때에는 목구멍에 붙어 있는 날파리 날개 가루가 온몸으로 번지는 착각이 드는 기분이었다. 이 역시 경험하지 못하면 알 수 없는 것이다.
마동 역시 조깅을 할 때 입을 약간 벌리고 숨을 쉰다. 들숨과 날숨을 조절하면서 달리다 보면 작은 날벌레가 목구멍에 그대로 붙어 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마다 무릎에 양손을 대고 잠시 쉬면서 기침을 한다. 달리는 것은 여지없이 중지해야 한다. 그렇게 잠시 멈춰서 자세를 다듬는 동안 흘린 땀은 모기들을 불러들인다. 잠깐 동안 운동화의 끈을 묶고 있는 와중에 모기들은 사정을 봐주지 않고 몰려들어 주로 접히는 부분의 피를 빤다. 무릎의 안쪽이라든가, 목덜미 또는 팔꿈치 반대쪽 같은 곳.
맛있게 피를 빨고 달아나는 바람에 어떤 날은 따끔하기까지 했다. 집에 있는 모기와는 다르다. 요즘은 모기를 조심해야 한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버린 것이다. 모기는 예전에 없던 무서운 바이러스를 옮기는 이동매체가 되었다. 분명 서슬이 퍼렇고 추운 바람이 부는 겨울보다는 여름이 조깅하기 에는 더없이 괜찮은 환경임에는 분명했다. 하지만 괜찮은 계절임에도 호러블 한 것이나 미저러블 한 것들은 끊임없이 마동을 괴롭혔다. 혹독한 추위가 세상을 뒤덮은 겨울이 되면 야외의 벌레들은 자취를 감춰버렸다.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절지류처럼 말이다. 그것을 조화라 부른다면 그것이 균형인 것이다.
하지만 모기가 없다 하여도 추위가 사람의 등을 구부리게 만드는 겨울은 마동에게는 내키지 않는 계절이었다. 두꺼운 트레이닝복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꾸준하게 뛰었다가 잠시 쉬는 동안 다시 몸이 식어버리는 것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집에 와서 뜨거운 물로 샤워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뜨거운 물이라는 것이 목욕탕처럼 바로 콸콸 나오지 않고 시간을 들여야 서서히 뜨거워지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입김이 많이 나와서 착용하는 안경에 성애가 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연은 인간에게 순수한 이치를 가르친다. 좋아하는 것 하나를 얻으면 싫어하는 것 하나를 가져와야 한다. 역시 이것을 균형이라 부른다면 균형이다.
그 러 나,
오늘은 장마라고 해도 사람이 너무 없다. 인간소멸에 가까웠다. 장마기간에 사람이 이렇게 없었는지 알 수는 없다. 작년, 재작년 여름의 장마기간에도 이랬었나 하는 생각을 더듬어 보지만 생각의 끈은 누군가 올해 초에서 깔끔하게 딱 잘라 놓아서 그 생각의 끝에 마동의 기억은 도달하지 못했다. 그저 장마기간이라서 사람들이 없는 것이라는 것이 이상하지만 그렇게 단정 지었다. 기이하지만 그렇게 생각을 굳혔다. 쉽게 포기하는 것도 생활하는데 꽤 필요한 부분이었다. 드문 일이지만 항상 예외는 있는 법이다.
마동은 평소에 쓸데없는 생각들을 많이 한다. 어찌 되었던 강변으로 불어오는 단정 할 수 없는 치누크 바람을 맞으며 힘차게 달렸다. 그래봐야 빠르게 걷는 것보다 조금 더 빠른 속도로 달릴 뿐이었다. 달리는데 앞에서 천천히 걸어가는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사람은 여자라는 것을 알아차리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치마를 입고 머리가 길었다. 뒷모습만 봐도 대번에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입고 있는 옷이 긴팔에다가 치마까지 아주 길었다. 멀리서 봐도 알 수 있었다. 바닥에 질질 끌릴 정도로 치마는 길었다. 여름인데 긴팔을 입고 술이 취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비틀거릴 정도로 힘이 없어 보인다고 해야 할까.
걸음걸이는 느릿느릿했으며 춤을 추며 걷는다고 하기에도 어딘가 모자람이 많은 걸음 걸이었다. 저렇게 걸어가는 모습의 사람은 그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길거리 마임을 하는 예술인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도 이상했다. 뒷모습은 마치 연극단원의 배우의 움직임 같았다. 지극히 뒷모습만 보여서 단지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마동은 여자를 지나치면서 쓱 한 번 쳐다보고는 앞으로 내달려 나갔다. 마동은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는 타입이 아니기 때문에 이 무더운 여름날에 긴팔에 긴치마의 옷을 입고 조깅코스를 춤을 추듯 흐느적 걸어가고 있다 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평소에 비해 오늘은 유난히 습하고 눈에 들어오는 시각적인 풍경이 조금은 단조롭고 다른 날에 비해 달랐다. 바람 역시 기시감을 자꾸 불러일으켰고 묘한 기분을 자아냈다. 습한 공기를 폐에 집어넣으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치누크가 자아내는 공기가 몸 안으로 들어가서 마음속에서는 곰삭은 마음이 일어나는 기분마저 들었다. 작은 소용돌이처럼 마음이 일렁거렸다. 가슴이 뛰는 것과는 달랐다. 마동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늘 북적이던 조깅코스에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 전혀 들어오지 않아서 그렇게 생각이 드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매일 보는 환경이 기이하게 달라지거나, 개체수가 상상 이상으로 많거나 이하가 되면 복잡 미묘한 감정을 불러들인다.
그 순간 단조로움과 권태라는 고삐가 사람들의 어깨에 올라타면서 괴기한 모습으로 바뀌며 사람들을 땅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모습이 시야에 확 드러났다. 그리고 곧 암흑이 세계를 뒤덮어 버리는 장면까지 시야에 보였다. 무서운 광경이었다.
이것은 도대체 어떤 환영일까.
순식간에 눈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마동은 이런 디스토피아적인 상상을 애써 하지 않았다. 전경이라고 불리는 시야가 만들어낸 그림이라고 하기에는 섬뜩했다. 사람들의 어깨에 올라탄 그것들은 목이 없는 몸이 전부였다. 소름이 돋았다. 때를 가리지 않고 프리즘을 통과하는 빛처럼 몸의 털이 바짝 솟구치게 하는 장면이었다. 그것이 순식간에 보였다가 사라졌다. 세상이 암흑으로 뒤덮이는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눈앞에 그 모습이 그대로 그려졌다.
만약 지금 내가 본 환영이 실제의 현실이고, 달리고 있는 지금이 현실이 아니라 다른 편의 세계라면? 마동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한 번씩 마동은 세계가 암흑으로 바뀌는 모습이 머리에 떠올랐다가 사라지곤 하는 경험을 했다. 마동의 의지가 아니었다. 가만히 있으면 다가오는 계절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부자연스러운 현상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머릿속에서 돌연 나타났다가 희미하게 보였다가 사라졌을 뿐이다. 그동안에는. 이렇게 시각적으로 선명하게 나타나지는 않았다. 몹시 지하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눈앞에 환영처럼 가끔씩 보이는 다른 세계는 근래에 들어 자주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지금의 세계가 전부 암흑으로 바뀌는 모습이었다. 세계가 어둠으로 종식되기 전에 마동은 사람들을 만난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한다. 사람들은 마동을 보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데 어딘가 이상한 이야기만 자꾸 한다. 글자로 치마를 만들었다느니, 캔 깡통의 맛은 달다고 하는 말들을 쏟아낸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동과 이야기를 하면서 마동의 눈을 보는 것 같은데 자세하게 보면 눈 뒤의 어느 지점을 응시하며 말을 한다. 마동은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가 조금씩 겁이 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마동의 눈을 바라보지 않고 눈에서 약간 떨어진 밑이나 옆의 어디를 계속 보며 이상한 말을 쏟아낸다. 마동은 다른 사람에게 간다. 하지만 다른 사람 역시 마동의 눈을 보지 않고 어딘가를 응시하며 이상한 말을 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전부 이상해진다. 그리고 저 멀리서 하늘이 점점 검은색으로 뒤덮인다. 바뀐 세계의 암흑은 물엿처럼 찐득하고 무서운 검은색이다. 하루에 한 번, 내지는 이틀에 한 번씩 무의식 중에 그런 모습이 머리에 떠오르고 눈앞에 나타났다.
이계가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아니다. 마동이 그동안 생각했던 다른 세계는 적어도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환상의 곳, 오즈의 먼치킨 마을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암흑이 온 천지를 뒤덮는 세계는 아니었다. 비록 우울하지만 엘리스가 재버워키를 물리친 마을의 풍경정도라면 괜찮았다. 그렇지만 마동의 눈앞에 펼쳐졌다 사라진 광경은 무참했고 무차별적인 폭력이 만들어 놓은 세계였다. 폭력에는 당연하게도 정당성은 배제되어 있었고 이유나 폭력의 강도도 알 수 없었다. 마동이 바라는 이계의 모습은 전혀 없었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모자장수처럼 미쳐야만 해’ 쳬셔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미쳐가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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