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날의 멸망 4

소설

by 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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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째]


언제나 희미했다. 우리는 철길 위에 누워서 희미하게 비치는 태양빛을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태양빛은 언어를 잃어버릴 만큼 따스했고 불안정한 마음을 쓰다듬었다. 이름도 알지 못하는 들꽃이 기찻길 주위에는 만연했고 코를 간질이는 바람이 불어와 누워있는 우리를 시원하게 만들었다. 옷이 두껍지 않았고 버드나무의 아름드리가 보이는 것이 아마도 봄인 듯했다. 저 멀리 울타리가 보였고 기찻길 옆으로는 무성한 숲도 보였다. 숲은 하나의 거대한 도시 같았다. 나는 내 옆에 누워있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작고 따뜻했다. 그녀가 내 손을 꼭 쥐었다. 부드러운 손바닥의 감촉에 나는 얼굴을 돌렸다. 하지만 옆에 누워있는 그녀의 얼굴은 희미하기만 했다.

내가 눈이 나빠진 걸까.


그녀의 얼굴을 점점 충분히 볼 수 없어졌다. 희미한 얼굴 속에 나를 보며 그녀가 웃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나는 눈을 한 번 비볐다. 그래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가 웃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믿고 싶을 뿐이다. 그녀가 무어라 말을 했지만 나는 그 입모양을 볼 수 없었고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도 않았다. 나는 누운 채로 그녀 옆으로 좀 더 다가가려면 언제나 꿈에서 깼다.


마동은 종종 같은 꿈을 꿨다. 비슷한 곳에서 비슷한 내용의 꿈이 지치지 않고 반복되었다. 그 속에서 헤매다가 깨어났다. 꿈의 시작과 끝은 없고 늘 중간만 있을 뿐이다. 전경은 확실했지만 옆에 누워있는 작은 여자 아이의 모습은 언제나 희미했다. 꿈속에서 마동은 어렸다. 요즘 입고 있는 옷을 입고 있지는 않았다. 그건 마치, 마치.

눈을 떴을 때 마동은 어제와 다른 오늘을 느꼈다. 오늘 이전의 날과 지금이 다른 점은 눈을 뜨니 18킬로그램짜리 작은 아이가 몸을 누르고 5킬로그램짜리 덤벨(dum-bell) 두 개가 몸속에 들어와 가중을 더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몸이 무거웠다. 일어나는 것이 힘겹다고 느끼기는 처음이었다. 어젯밤 조깅을 하다 모기에 물렸는데 목 언저리가 따끔거리고 가려웠다. 따끔함이 지속되는지 신경이 쓰였다. 무의식적으로 물린 부분에 손을 대고 긁었다. 물린 주위가 부어있었다. 콧물은 나지 않았지만 코가 막히는 느낌도 들었다.


'설마 감기인가.'


한여름에 감기 기운이라니, 마동은 매일매일 조깅을 하는 탓에 감기를 앓아 본 적이 없다. 그동안은.


군대에 있을 때 제대하기 전에 부대에서 감기가 한 번 걸린 적이 있었다. 그때 심하게 감기를 앓으면서 감기 때문에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이후에 감기는 동네의 개도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할 정도로 감기바이러스는 마동과 동떨어진 단어였다. 세균이란 무더운 여름에 창궐하고 바이러스는 차가운 계절에 나타나는 것에 비한다면 여름날의 감기기운은 마동에게 그야말로 이질감이 드는 무형질의 몹쓸 것이라 어처구니가 없었다. 바이러스도 변이를 거듭하여 무더운 날에도 에어컨의 바람을 통해 사람들의 틈 속으로 파고들었다.


침대에서 서서히 일어나서 욕실을 향해 구울 같은 걸음걸이로 걸어갔다. 역시 힘겨웠다. 욕실까지 걸어가는 것이 이렇게 힘겹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세수를 하고 수염을 깎으려고 거울을 보니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오전에 충혈된 눈을 보는 것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욕실의 거울을 통해서 바라본 얼굴은 평소에 자신의 얼굴과는 다른 얼굴처럼 보였다. 여름감기기운 때문인지 조소 가득한 핏빛 서린 눈동자와 멸시가 서려있는 표정이라서 또 한 번 놀랐다. 어쩐지 다른 사람이 거울 속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 들었다.


거울 속은 꼭 마동이 서 있는 바깥의 세계와는 다른 공간처럼 보였다. 그림자가 마구 돌아다닐 것 같고 무생물이 생물화되어 있고 오목성 때문에 모든 것이 조금 일그러져있는, 그런 세계 같았다. 거울에 비치는 욕실의 모습은 안과 밖이 같았지만 거울에 비친 상이 시계를 넘어서 마동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 같았다. 현실의 몸에 구멍을 내고 싶어 하듯 거울 속의 상은 마동을 확실하게 힘을 실어서 노려보고 있었다. 비슷하게 보이나 완전히 차단된 다른 공간의 세계처럼 거울 속의 공간은 부피나 밀도가 달라 보였다. 조금 겁이 났다.


이 모든 현상이 감기 때문이다. 확실하게 거울을 통해 보이는 얼굴은 자신의 얼굴이 아닌 듯 일그러져 보였다. 푸석하고 거친 피부의 결을 지닌 마동 자신과 닮은 얼굴은 분명히 달라 보였다. 마동은 거울을 손으로 문질렀다. 손에 묻은 물기 때문에 거울의 표면이 일렁거렸다. 거울 속의 짚더미처럼 생명력이 없고 나무껍질처럼 거친 피부의 또 다른 마동이 거울 속에서 손을 들어 마동과 똑같이 움직였다. 감기가 생각보다 심했다. 지금부터라도 얼굴의 피부에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면도용 세이빙크림을 산타클로스의 수염처럼 골고루 턱에 바른 다음 질레트 12 날의 면도날을 이용해서 수염을 깎고 크림을 씻어냈다.


면도날이 평소처럼 잘 들지 않았다. 오늘따라 그런 것인지 면도날의 닳는 시점이 오늘부터인지 잘 들지 않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수염을 깔끔하게 깎이지 않았다. 12 날의 면도날은 한 번에 수염이 깔끔하게 깎이는 면도날 중에서는 가장 좋은 것이다. 면도날을 이용해 여러 번 수염을 깎으면 피부에 손상을 주게 된다. 하지만 마동은 한 번 더 면도날을 사용해서 칼국수의 장인이 반죽을 하듯 진지하게 수염을 밀었다. 씻어내고 난 다음 자세하게 들여다보니 어제와 별반차이가 없이 깔끔하게 수염이 깎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달랐다. 달라진 점이 정확하게 무엇이라고 딱 집어서 말하기는 그 변화를 눈으로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었다. 언어로 설명하기에 턱없이 부족하지만 달라지긴 했다. 마동은 거울을 보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얼굴을 씻어냈다. 턱을 약간 들고 다시 돌려가며 확인을 했다. 육안으로 달라진 점을 찾아내려고 애썼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마동은 자신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을 하고 욕실에서 나왔다.


오늘은 정신과상담도 신청해야 하고 회사의 업무도 집중을 해야 한다. 바쁜 하루가 펼쳐질 것이다. 옷을 입고 나오는데 집안이 꽤 서늘하게 느껴졌다. 역시 감기다. 아침은 매일 챙겨 먹고 싶어서 언제나 조금 일찍 일어나서 회사 근처의 던킨도넛으로 간다. 거기서 오전에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세트메뉴를 먹는다. 그곳이 아니면 집 근처의 베이커리에서 갓 만들어낸 샌드위치와 커피를 먹거나 맥도널드에서 역시 세트메뉴를 먹고 출근을 한다. 베이커리의 샌드위치를 자주 사 먹지만 오늘은 좀 늦었다. 그러면 어김없이 샌드위치는 다 떨어지고 만다.


오전을 맞이하는 회사원들에 비해서 비교적 마동은 부지런한 편이라 집에서 30분만 일찍 나오면 아침시간을 잘 활용할 수 있다는 이치를 터득했다. 한 시간 일찍 나온다면 신선한 채소가 들어간 샌드위치를 먹으며 잠깐이라도 책을 읽을 수 있는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아침시간에 유리창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풍경은 대부분 허둥지둥하며 출근하는 모습뿐이지만 마동은 느긋했다. 부지런하면 오전에 사치라고 불리는 시간을 얻을 수 있다. 시간의 사치는 누구나 누릴 수 있지만 아무나 그것을 손에 쥘 수는 없다. 출근하기 한 시간 전이라 아침을 먹을 때는 천천히 진지하게 먹는다. 정크 푸드지만 최대한 시간을 들여 씹어 먹는다. 그런 류의 음식은 몇 번 씹지 않아도 입안에서 금방 부서져 쉽게 꿀꺽 목으로 넘어가 버리고 만다. 몇 번 씹지 않고 넘기게 되면 한쪽으로 씹을 수밖에 없기에 정크 푸드를 좋아하는 이들의 특징은 턱이 비대칭으로 틀어져있다. 보험이 적용되지 않기에 의사들에게 얼씨구 좋은 일만 시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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