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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Jun 03. 2020

새벽송

에세이라고 해두자


요즘은 교회에서 새벽송을 도는지 모르겠다. 종교가 없는 나는 중학교 때 3년이나 교회에 다닌 적이 있었다. 딱히 신앙심이 있어서 그렇게 3년이나 다닌 건 아니었다. 고모가 교인이라 끌려갔다가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기에, 또 교회 지하에는 독서실이 마련되어 있어서 공부를 핑계 삼아 엎드려 잠자기에도 좋고 학생부 선생님이 있었는데 질문을 하면 학교 선생님보다 대답을 잘해주는 이런저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 학생부 선생님과 나는 음악적 취향이 당시에 비슷해서 더 친해졌다.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이 가톨릭 적이지는 않았다.


중학생이란 뭔가 인간의 모습에서 약간 벗어난, 아직 인간도 아닌 그렇다고 사람도 아닌 그런 상태를 말하는 것 같다. 어린이도 아니며 제대로 된 청소년의 모습도 아니다. 어정쩡하고 아주 냄새나고 기분이 썩 좋지 않은 상태 같은 것이 중학생이다.


나는 평소에는 그러지 않다가도 교회에만 가면 몹쓸 개구쟁이가 되었다. 좋은 쪽으로 포장을 해서 개구쟁이지 조금은 피하고 싶은 중학생이었다. 고등학생 누나들이 앉는 의자의 자리에 호치키스로 지뢰를 만들어 뿌려 놓거나 숨어있다가 콩알탄으로 놀라게 했고, 내가 기도하는 날이면 작은 교회의 전선을 끊어서 불이 들어오지 않게 해서 모두가 그것 때문에 서성거려서 내가 기도를 하는 것이 그냥 넘어가기도 했다.


누나들은 놀랐을 때 액션이 크기 때문에 그것이 자꾸 나를 개구쟁이로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미움을 받지 않았다. 그런 개구쟁이로 잘도 교회를 어슬렁 다녔다. 형들에게 혼나려고 하면 두 살 많았던 우희 누나가 히어로처럼 나타나서 다 막아 주었다. 우희 누나가 형들을 한 번 노려보면 아무 소리도 못했다. 우희 누나는 교회에서 건반을 맡고 있었고 연주를 잘해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누나가 나를 막아주면 나는 형들을 보며 속으로 메롱이다, 이 형들이라고 불리는 놈들아.


우희 누나 덕분인지 크리스마스이브 때 나는 성가대도 했고, 성냥팔이 소녀의 연극도 했고, 4 중창에도 불려 갔다. 하룻밤에 몇 번이나 무대에 섰다. 말썽쟁이에 사고뭉치였던 내가 미움받지 않고 3년 내내 교회를 다닐 수 있었던 건 어쩌면 우희 누나 덕분일지도 모른다.


넌 중학생인데 이런 음악을 듣니? 우희 누나는 내가 듣고 있던 카세트테이프를 보며 그런 소리를 하곤 했다. 생각해보면 중학생 주제에 메탈리카나 너바나 이외에 바쏘리, 판테라, 오비추어리 같은 강력한 메탈을 들었다. 너 이런 노래 많이 들으니 기도 많이 해야겠다. 앨범 커버에는 온통 해골이니 피가 터지는 그림이 잔뜩 있었고 그런 음악을 들으며 하느님이 계신 교회에 나갔던 것이다. 하지만 휘트니 휴스턴의 두 번째 앨범도 있어서 그걸 교회에서 우희 누나와 함께 듣기도 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교회에서 하는 모든 행사가 끝나면 새벽송을 돌았다. 자정이 되기 전에 지하에서 소고기 국에 밥을 말아먹고 구역별로 나누어서 새벽송을 도는데 봉고차에 짐 꾸러미처럼 실려서 돈다. 봉고차는 짐을 싣는 용도라 운전석을 빼고 뒤에는 의자도 없고 창문도 없다. 그저 휑한 공간만 있고 그 안에 쪼그리고 앉아서 목적지까지 계속 이동을 한다.


처음에는 재미가 있어서 차가 커브를 돌 때마다 메트로놈처럼 움직였지만 새벽송을 한 곳, 두 곳 돌면서 계속 이동을 하다 보니 나는 그만 멀미를 심하게 했다. 새벽송을 돌기 전에 먹은 소고기 국에 밥을 말아먹은 것이 그대로 올라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여자애들이 있기에 참을 대로 참았지만 이미 목까지 올라와 버렸다.


나는 참지 못하고 봉고차 안에 우엑 하고 전부 다 토하고 말았다. 소고기 국에 밥 말아먹은 것의 냄새가 봉고차 안에 날렵한 파도처럼 퍼졌다. 여자애들의 비명소리가 난무했다. 나는 고통스러웠고 창피했다. 날개가 잘린 잠자리처럼 평형감각이 손실되었다. 그때 나에게 어쩌면 제일 많이 괴롭힘을 당한 우희 누나가 차를 세우고 나를 차가운 밖으로 내리게 해서 등을 두드리고 더러워진 차 안을 닦아 주었다.


구토를 하면서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고 뱃속의 내장들이 전부 꼬이는 것처럼 힘겨웠다. 그때 묘하게도 괜찮아, 괜찮아, 하는 그 소리가 고통을 덜어 주었다. 우희 누나는 그날 새벽에 나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 돌아갔다. 나는 어쩐지 그 이후에 슬슬 교회에 덜 나가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미성년자인 남녀가 스스럼없이 어울릴 수 있었던 공간이 교회였기에 우희 누나는 나의 옆에 자주 앉아 있곤 했다. 이후에 나는 왜 우희 누나에게 연락 한 번 해보지 못했을까. 얼굴도 예뻐서 형들에게 인기가 좋았는데. 나는 누나가 없기에 누나라는 존재가 주는 의미가 누나가 있었던 아이들과는 달랐다.


우희 누나는 요즘은 어딘가에서 학부형으로 잘 살아가고 있겠지.




중학생 주제에 시끄러운 음악을 잘 도 들었다.



그때 들었던 휘트니 휴스턴의 앨범이 아직도 있다. 여전히 잘 나와서 지극히 잘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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