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에세이
오전에 일하러 나오는 길목에 거쳐야 할 신호등이 몇 개 있다. 반드시 꼭 서너 개의 신호등 앞에서는 멈춰야 한다. 마치 그렇게 정해진 것처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신호등은 내 앞에서 붉은빛을 발한다. 어쩌다 하나의 신호등만 남겨두고 모두 지나치면, '오늘은 굉장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이제 저 앞의 신호등 하나만 지나치면 오늘은 모든 신호등을 전부 지나치는 기적이 일어나는 날이다.' 하지만 마지막 신호등은 계시처럼 내 앞에서, 딱 내 앞에서 붉은빛으로 물들고 만다.
매일 지나치는 신호등을 매일 지나치다 보면 취향에 맞는 신호등이 있고 그렇지 않은 신호등이 있다. 그걸 어떤 식으로 구분하지?라고 묻는다면 자신은 없다. 그건 그저 심층적 편견이 가득한 신호등이 있고 표층적으로 느껴지는 신호등이 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취향에 맞는 신호등이 아직 푸른 불이면 어쩐지 조금 천천히 운전을 하여 붉은 불로 바뀌면 그 앞에 서서 기묘한 안도감을 느끼곤 한다.
취향이 맞는 신호등도 마치 나를 알아보고는 그렇게 바삐 갈 필요 없잖아? 조금 쉬었다 가지 그래?라고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취향에 맞는 신호등은 여백이 많은 음악처럼 느껴진다. 내게 여백의 음악은 몇 종류가 있지만 봄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것처럼 이맘때면 자연스럽게 레슬리 청의 노래를 집중적으로 듣는다.
레슬리 청의 노래는 여백이 많고 공간이 많아서 듣고 있으면 그 여백을 통해 내가 진정으로 음악을 듣고 있구나, 하는 기쁨을 준다. 레슬리 청의 음반은 대부분 카세트테이프로 가지고 있어서 겨울 끝에 봄이 다가오는 것처럼, 취향에 맞는 신호등 앞에 멈춰서 레슬리 청의 노래를 듣는 것은 일종의 일상의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그런 균형을 알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느껴진다. 아직 듣고 싶은 음악을 집중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음악만 듣는 것은 변해가는 이 시대에 뒤떨어는 행위지만 조금 뒤떨어졌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아마 신호등이 없다면 쌩쌩 신나게 달려 빠르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겠지만 신호등은 그 중간에서 균형을 잡아준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은 어느 시대나 어느 곳이나 늘 있다. 균형이란 몸과 마음에 몽땅 필요하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 그렇게 느껴진다. 근래에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나의 내부에 작은 무엇인가가 깨져버렸다. 인생이라는 게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그렇게 발버둥을 쳤는데 두부를 칼로 싹둑 자르듯 죽음은 친구의 생명을 끊어 버렸다. 잘 지켜오던 균형이 며칠간 깨져 버렸다.
삶을 살면서 무슨 큰일을 하고픈 게 아니다. 대단한 글을 쓰고 싶은 것도 아니고 엄청난 사진을 찍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저 그런 글을 쓰고, 그저 그런 사진을 찍으며 하루를 보내면, 아니 견디면 그것으로 족하다. 단지 필요한 건 균형이다. 그저 그렇게 지낼 수 있게 하는 균형. 그것이 깨지면 그저 그렇게만은 지낼 수 없다.
요즘처럼 공포가 인간생활 전반에 침투해 있으면 균형 잡기가 더 어렵다. 시건방지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일상의 균형을 신호등과 레슬리 청의 노래로 잡아갈 수 있다면 그것대로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끔 전복으로 비빔밥을 해 먹는다. ‘가끔’이 일상의 틈을 벌리고 들어오면 그것 역시 그것대로 균형이다. 조화라고 불러도 좋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