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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Aug 27. 2020

변이 하는 세계와 이변의 사람들 195

9장 3일째 저녁

195.


 한여름 밤의 바람소리가 왜 이토록 스산하게 들릴까.


 그 날(사라 발렌샤 얀시엔을 만난 밤)의 바람소리도 스산했다. 바람소리가 슉슉하며 몇 번 들리는 동안 바람소리라는 것을 느끼지 못했지만 꽤 여러 번 스르르륵하며 귓전을 울릴 때 그것이 소리로서의 완연한 무기체를 이루었고 마동의 귀에 들어왔을 때 더욱 완벽한 바람소리가 되었다. 소리는 나무와 나무 사이를, 가지와 가지 사이를 훑고 부드럽게 다가와 마동에게 내려앉는 보편적인 바람이 아니었다.


 바람은 포향을 지녔고 어둡고 광대한 자연이 허물어지는 소리였다. 잠자고 있던 포식자의 본능에 점화를 울리는 소리였다. 바람소리가 들리자마자 마동은 사라 발렌샤 얀시엔을 떠올렸고 더불어 그날의 기억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지금과는 다르지만 그때의 바람소리, 치누크가 몰고 온 초현실의 세계가 다가왔다. 저 멀리 마른번개는 빙영을 자아내며 크게 하늘에서 성난 모습으로 바닥에 내리 꽂혔다. 대단했다. 저렇게 큰 번개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기분이 묘해졌다. 이상했다. 마치 공중으로 몸이 부유하는 느낌이었다.


 최원해도 나처럼 이럴까. 아니다, 최원해는 변이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보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런데 최원해가 보이지 않는다.     


 지금 마동은 자신의 배속에 무엇인가 꾸물거리는 액상물질이 가득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배 안에서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 없는, 어떠한 살아있는 물질이 기어 다니고 있다.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복통이 일어날 것만 같았고 눈앞에 펼쳐진 숲의 공기가 순식간에 팽창했다. 현미경을 들여다보듯 공기의 이완과 수축이 몇 번 반복되더니 보는 앞에서 그대로 부풀어 올랐다. 바람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면서 마동의 몸을 짓눌렀다. 바람은 냉정했고 차가웠다. 차가운 겨울의 바람이었다. 바람에 살이 닿으니 따갑고 견디기 힘들었다. 피부가 새로운 표피로 덮여 공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온몸의 세포가 일어났고 살려달라고 외쳐댔다. 숲 속의 나무들이 수축하기 시작했다.


 공기가 뒤틀어지고 공간이 비틀어졌다. 벌어진 공간과 공기의 틈으로 불투명한 공기층이 틈을 벌렸고 마동은 그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거부할 수 없고 저항조차 불가능했다. 마동의 몸에서 축축하고 기분 나쁜 돌기가 만져졌다. 최원해가 흘린 땀을 빨아먹은 것처럼 더럽고 불쾌하고 축축한 돌기였다. 돌기는 이내 딱딱하고 얼음처럼 차가워졌으며 시간과 공간을 뒤 흔들기 시작했다. 기억나지 않는 오래 전의 기억이 액체와 기체의 중간 상태에 머물러 있는 물질처럼 설명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가 바람소리로 인해 순식간에 깨어나서 저수지의 표면을 갈라놓으며 마동의 수면 파동을 뒤집었다. 불안과 희망의 해체가 마동의 눈앞에 보였다. 입을 벌리자 그 속에서 수십 개의 자줏빛 포자가 흘러나왔다.      




 나는 어떻게 지내왔는가. 누군가는 나에게 이타적이지 못하다고 하는데 나는 그동안 그렇게 말을 하는 사람들이 타인에게 향한 비방이 도의를 넘어서는 것을 많이 봐왔다. 나는 생각한다. 나는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 단추가 처음부터 잘못 채워졌는지는 몰라도 나는 그것대로 받아들이고 살아왔다. 자본주의 사회 아닌가. 자유연애를 하며 원하는 것은 버튼을 눌러 가지고 가는 자동판매기의 세계인 것이다. 눈앞의 것을 보는 타인들에 비해 나는 그 너머를 보려고 했다. 그것은 아마도 고등학교 때 기억이 사라져 버린 사고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그 일이 제일 영향이 많았다. 그 사고 내지는 사건은 나를 바꾸어 놓았다.


 사실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크게 바뀌었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나만이 알 수 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희망이라는 것에 늘 배신을 당하고 상처를 받고 고통을 겪는다. 희망을 가지게 하는 것이 타인이며 결국 타인에 의해서 무너지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나를 제외한 모든 것에 대해서 아무런 경의가 없다는 말이다. 하나의 개체에서 벗어난 수를 생각해본다면 세상의 이면에는 한 면을 제외한 또 다른 어떠한 면에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때로는 ‘제시’라는 부분에서 막히는 경우가 있다. 말로 할 수 없는 애매한 경우도 있다. 저기 보이는 남녀의 모습이나 가족의 모습을 사랑이라고 정의를 하면 그저 달콤함을 유지하거나 지켜내기 위해서 막중하게 큰 저항이 사랑 속에서는 가득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간과하고 있다. 책임이라는 묘한 감정이나 보이지 않는 형태를 알았을 때는 이미 시간을 달려와 늙어 버렸다거나 이미 사랑이라고 하는 위대한 모순으로 인해 누군가를 잃어버렸을 때이다.


 사랑, 그것은 만질 수 없는 감촉의 질이 좋다는 것을 안다.


 사랑, 그것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심안으로 보이는 것이다.


 사랑, 그것은 촉촉하고 달달하지만은 않지만 혀로 느껴지는 맛이다.


 체험으로, 몸으로 알 수 있는 그것. 나는 그동안 애써 사랑을 외면하면서 지내왔다. 사랑을 하게 되면 타인에 대해서 비방을 하는 경우를 만나봤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서웠고 두려웠다. 사랑을 나눈다는 거 나에게는 보통의 일은 아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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