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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Aug 10. 2020

버닝 2

영화를 소설로



해미와 종수는 언어습관이 억울하고 비굴한 일이 많은지 곧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말을 한다. 바늘로 툭 건드리면 마치 눈물이 탁 터져버릴 것 같다. 그 울음이 분에 차서 나오는 울음인지 환희에 차올라 나오는 눈물인지는 모른다. 그에 비해 벤은 유쾌하고 망설임이 없다. 이창동의 세계에서 보면 이전 영화에서도 서민의 얼굴은 늘, 어쩐지, 지극히 그러했다.


이창동 감독의 버닝을 보고 있으면 당연하지만 윌리엄 포크너의 ‘헛간 타오르다’와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가 동시적으로 드러난다. 스스로 눈을 감는 것과 어떤 무엇인가에 의해 눈이 감기는 것에 대한 고찰 같은 것들이 영화 속 여기저기에 몸을 웅크리고 도사리고 있다. 그걸 손으로 쑥 끄집어내는 재미가 있다.


윌리엄 포크너의 세계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를 그동안 죽 겪어봤다면 이창동식 버닝에 몸과 마음이 활활 타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해미의 대사에도 나오지만 죽는 건 무섭지만 노을처럼 활활 타서 사라지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일지도 모른다. 이 세상은 결락을 지닌 존재와 좀 더 깊은 결락을 지닌 존재가 있는 곳이니까. 하루키는 전체는 있지만 일부는 사라져 버린 현대사회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그간 소설에서 한 것 같다. 내가 쓰고 있는 단편소설의 주인공이었던 문예부 기철이 녀석 역시 그 시절에 윌리엄 포크너에 늘 빠져 있었다.


윌리엄 포크너의 '헛간 타오르다'를 보면 아주 고집불통의 완고한 아버지가 나온다. 주인공 ‘나’는 분노조절이 되지 않아 지주의 헛간에 불을 지르는 아들로 완고한 아버지를 닮았지만 또 평화로운 삶을 바란다. 보통 아버지의 완고함은 가부장적이 아니더라도, 그 반대적인 친밀한 아버지의 모습일지라도 살다 보면 완고한 모습을 가지게 된다. 이 완고함이 가정을 이루고 그 벽이 깨지지 않게 지탱하는 모태가 되기도 한다. 학창 시절에 꼴 보기 싫었던 아버지의 모습도 막상 나 자신이 아버지가 되고 나면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듯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


팬터마임, 고양이, 우물, 춤을 추는 무희가 해미를 나타내는 기호들이다. 이런 수식어를 이창동 감독은 하루키에게서 잘 떠왔다. 망가지지 않게 그릇에 잘 담아와서 그것을 화면에 골고루 펼쳐서 해미를 만들어냈다. 해미는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에 나오는 그녀로서, 여러 사람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것이 영화 속에서 말하는 동시 존재이기도 하다. 나 자신을 지칭할 때 저는 이런 사람, 또는 이건 싫어요, 이건 좋아요, 이 맛은 꽤, 이건 별로,라고 할 때 그것이 정말 나 자신인지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상대방에 따라 내가 싫어도 상대방이 좋아하면 따라가는 경우가 있고, 나를 가장한 내 속의 또 다른 추한 마음의 내가 있다는 것도 안다. 내 속에도 여러 명이 동시 존재하고 있다.


해미는 마치 상실의 시대의 미도리의 모습처럼 보인다. 메타포가 뭐지? 하면서도 종수에게 자신도 모르게 꽤 많은 메타포를 안겨준다. 종수는 그 메타포의 끈을 잡고 해미를 찾으려고 한다. 그런 모습은 양을 쫓는 모험에서도, 댄스 댄스 댄스에서도 심지어는 15살 소년 다무라 카프카에서도 잘 나타난다.


벤의 모습은 이 사회의 중심이 되는 하나의 구심축 같은 존재다. 어느 시대에나, 어느 나라에나, 어느 시점에도 존재하는 축. 물질로 이루어져 사람들을 돌아가게 만들고 사람들이 그 축을 따라 움직이며 서로 공격하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는 거대한 사회의 중심이 되는 축. 굳건한 진실 같은 것이다. 절대 무너지지 않고 단단한 물질로 이루어져 시대가 아무리 흘러도 구성원만 바뀔 뿐 근간을 이루는 물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 축은 동시에 우물 같은, 무서운 것이기도 하다. 세계의 곳곳에 있는 우물에 한 번 빠지면 어둠에 갇혀 위를 보며 언제 빠져나갈지 모르는 공포에 갇혀 시간을 보낸다. 그 속에서 흔들리는 가능성 하나만 믿고 누군가를 기다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진실과 마주한 현실이 무섭기만 하다.


마지막으로 해미는 남자에게 휘둘리지 않는다. 벤에게도 종수에게도 해미는 자신의 주관대로 움직이고 행동한다. 이창동 감독은 해미를 비추는 빛, 조명을 결핍되게, 모자라게 해미를 표현함으로 해미는 일반적인 사람과는 다름을 말하지만 자연의 빛을 받은 해미는 그야말로 자연의 아름다움이 된다. 해미는 혼자 스스로 노을이 되어 타올랐는지, 아니면 어떤 무엇에 의해서 타버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해미는 이 세상은 결락을 지닌 존재와 좀 더 깊은 결락을 지닌 존재가 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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