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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Aug 08. 2020

버닝 1-2

영화를 소설로

 나는 지금 벤과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나는 실은 여기에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모습이 여기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나면 나는 여기에도, 지금 잠들어 있는 해미의 몸속에도 그리고 아버지가 있는 구치소에도 있다.    


 남자들 앞에서 가슴을 드러내 놓고 춤을 추고 그래, 창녀나 옷을 그렇게 벗는 거야.    


 내가 왜 그런 말을 해미에게 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날 이후 해미는 보이지 않는다. 해미는 완벽하게 사라진 것이다. 흔적도 없고 가방도 두고 아프리카에도 가지 않고 그대로 어딘가에 동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휴대전화로, 해미에게 온 전화만으로 그것이 해미라는 것을 알 수는 없었다. 마치 해미라는 생령이 나에게 전화를 하여 어떤 메타포를 던지고 간 것 같았다. 윌리엄 포크너가 그랬다. 인간의 오류는 몰라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다 안다고 착각하는 데서 오는 것이라고.    


 설령 나의 착각이라 할지라도 나는 해미를 찾아야 했다. 나는 어릴 때 해미에게 못생겼다고 말했다고 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이 없는 것일 뿐이 아니라 내가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다. 해미가 잘못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역시 나의 없는 기억도 나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해미는 그런 말을 나에게 들었고 나는 그런 말을 해미에게 해 버렸다. 어린 해미에게 나는 상처를 준 것이다. 해미는 그 상처를 입고 어딘가에 풀지도 못한 채 어른이 되어 버렸다. 나는 해미에게 그 상처를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해미를 찾아야 했다. 나는 해미를 좋아하게 되었으니까. 해미의 미소와 담배 피우던 모습과 나에게 말을 할 때 눈빛과 나를 잡아주던 그 손길을 나는 사랑하게 되었다.   

  

 이후 꿈을 꾸면 비닐하우스를 태우고 있는 어린 나를 바라보는 꿈을 꾼다. 그 비닐하우스에 불을 낸 사람은 나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불을 낸 것처럼 희열을 느끼며 바라보고 있다. 그 어린 종수를 나는 쳐다보는 꿈이다.     


 어린 종수는 어른이 되어 버린 어른 유전자의 종수를 태우며 희열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꿈을 꾸고 나면 개운하지 않게 일어났다. 마치 잠이 들면서 현실의 비닐하우스를 끌고 꿈속으로 들어가 꿈속과 현실이 뒤섞여 몹시 불편한 현실의 자투리처럼 느껴졌다.    


 나는 비현실의 비닐하우스를 태우면서 현실의 비닐하우스를 찾아다녔다. 벤이 태웠을 비닐하우스가 있는지. 그는 가까이 있는 비닐하우스를 태우며 희열을 느낀다고 했다. 바람에 힘없이 날리는 쓸모없어진 현실의 비닐하우스 속에 들어가 있으니 결락감이 몸으로 파고들었다. 결락은 차갑고 무서워서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지만 몸이 덜덜 떨렸다.


 낡고 못쓰게 된 비닐하우스를 바라보고 있으니 비닐을 통해서 내 모습이 읽혔다. 그리고 해미의 모습도.    


 변변찮은 동네의 변변찮은 집에서 변변찮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변변찮은 유전자의 모습이 비닐하우스 속에 있었다. 아무리 발버둥을 치고 노력을 해도 결국에는 못쓰고 볼품없는 비닐하우스가 될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원래대로, 원래 이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비닐하우스는 태워지기를 바라고 있다. 포근하면서도 불안한 비닐하우스는 언젠가 태워질 것이다. 아주 빠르고 깨끗하게, 십 분 만에 타 없어질 것이다.    


 너무 가까워서 놓칠 수 있다. 너무 가까우면 안 보일 수 있다. 벤은 그렇게 말했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 우물을 놓치고 해미를 놓쳤다. 너무 가까우면 안 보인다. 해미가 너무 가까이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 ‘너무’라는 부사는 너무 어둡고, 너무 크고, 너무 깊은 것과 어울렸던 부정적인 투영을 나타낸다. 해미는 나에게 너무 가까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해미를 놓치고 만 것이다.    


 해미는 마지막으로 나에게 전화를 했다. 그것이 진정 해미가 전화를 한 것인지, 해미인지 아니면 해미를 가장한 누구인지, 생령인지 알지 못한다. 해미의 방은 나와 해미가 나눴던 그 방이 이미 아니었다. 서울타워의 유리에 비친 햇빛이 아슬아슬하게 들어왔던, 위태로운 해미의 숨결이 남아있는 방이 아니었다.    


 그녀를 찾아야 했다. 보일이처럼 영원히 보이지 않게 되기 전에 해미를 찾아야 했다.    


 문득 해미가 아주 가까이 있는 비닐하우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벤의 집 화장실에서 해미의 손목시계를 보고 깨달았다. 해미 이전의 해미들이 서랍 속에는 가득하다는 것을.     


 정말 너무 가까이 해미가 있어서 놓친 것이다. 이 세계는 수수께끼 같은 곳이다. 혼잡한 세상 속에서 나 하나쯤 타 없어진다고 해도 사람들은 관심도 없다. 쓸모없는 유전자를 물려받은 냄비에 지나지 않는 육체는 타 없어지는 게 맞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해미는 안 된다. 해미에게 창녀라고 해서 상처를 줬던 것도 사과를 해야 한다. 벤이 끼어들면서 상처 받은 내 마음도 털어놓고 싶다. 해미를 찾아야 한다. 이제 소설을 쓸 수 있다고, 너와 함께 다시 한번 잠들고 싶다고 말을 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찾아야 한다.   


 애초에 집으로 전화를 건, 수화기 너머 긴 얼굴의 사람이 해미일지도 모른다. 해미는 거기에 있으면서 내가 있는 곳에 전화를 한 것이다. 나에게 무엇인가 말을 하기 위해서, 나에게 손을 내밀기 위해서, 나에게 입은 상처를 제대로 나에게 표현하기 위해서 전화를 한 건지도 모른다.    


 태우고 나면 그 후에는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태우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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