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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길 벽제관지 - 고양향교 - 관청령 - 용미3리

자 동영상을 먼저 보실까요?


잘 들으셨나요?

의주길을 걷고 걷고 걷다보면 신의주까지 갈 날이 곧 올 겁니다.


아침 길을 나섰는데 성북천의 장미가 활짝 피었습니다.

빨간 장미가 힘차게 걸으라고 격려해주는 듯 합니다.


오늘 걸을 길은 의주길 두 번째인 고양관청길입니다.

우리는 처음으로 의주길을 걷습니다.

신의주까지 갈 수있으려나~?


의주길 : 

의주길은 조선시대 대로 중 한양에서 경기도를 거쳐 의주로 이어지는 의주대로를 바탕으로 한 도보여행길로 고양 삼송역 8번 출구~파주 임진각에 이르는 52.7km 구간으로 조성됐다.



삼송역입니다.

그냥 시작하면 아쉽지요.

인증사진 찰칵~


벽제관터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텅빈 자리에 우리는 사진을 찍습니다.

저 자리는 비어있지만, 무언가가 있었겠지요. 우리가 굳이 와서 보고 지나가야 하는 그런 자리입니다.

조선시대 외교에서 중요한 장소였다고 합니다.


아하, 벽제관이 옛날에 저런 모양으로 있었군요.

어째 좀 황량해보이기도 합니다.

저런 모양의 집에 어떻게 사람이 쉴 수 있었을까요?

벽이 없이 그냥 휭하니 기둥들만 있습니다.

아, 혹시 벽들은 무너져 사라지고 지붕과 기둥만 남은 걸까요?

그렇다면 이해가 갑니다.


고양 벽제관지 :

고양 벽제관지(高陽 碧蹄館址)는 사적 제144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관로 34-16이다.

이 자리는 옛 역관(驛館)이 있던 자리이다. 조선시대에 서울에서 중국으로 통하는 관서로(關西路) 또는 의주로(義州路), 연행로(燕行路)에는 이와 같은 역관이 10여처에 있었다. 이곳에서는 주로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가는 사절이 숙박 휴식하였고, 특히 벽제관은 때로 국왕이 제릉(齊陵)에 제사를 지낼 때 숙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한편 중국에서 오는 사절들도 역관에 머물러 휴식하는 공용 숙박시설이라 하겠다. 더욱이 이들 역관은 역을 동반하고 있어서 교통, 통신의 편의를 최대한으로 이용할 수 있기도 했다.

더욱이 벽제관은 한양에 인접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 오는 사절들은 서울로 들어오기 하루 전에 반드시 이 역관에서 숙박하고 다음날 예의를 갖추어 서울로 들어가는 것이 정예로 되어 있었다.

본래 고양군의 옛 읍치(邑治)는 벽제관에서 북방으로 5리 정도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위치는 읍치를 옮긴 1625년(인조 3)에 이곳에 새로 세운 객관(客館)이었다. 그러나 그 후의 중건은 확실히 알 수 없으며 일제강점기 때 일부가 헐렸고 6․25 전쟁 때 전소되었다. 그러나 1960년경까지도 객관문은 남아 있었으나 퇴락하여 무너져버려 현재에는 관사(館舍)의 윤곽과 터전만이 남아있다. (출처 : https://gjicp.ggcf.kr/archives/artwork/%EA%B3%A0%EC%96%91-%EB%B2%BD%EC%A0%9C%EA%B4%80%EC%A7%80-2)


아, 그리고 이 곳 벽제관에는 또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 더 있습니다. 임진왜찬때 있었던 벽제관 전투입니다.

왜군과 명나라 군대가 대 접전을 했던 전투입니다.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725086&cid=49345&categoryId=49345




아하, 오늘 우리가 갈 길을 벽이 가르쳐줍니다.

벽화는 원시시대부터 있었습니다.

고양에는 소중한 보물이 7가지가 있나봅니다. 그 7가지를 벽화에 꼭꼭 숨겨놓지 않고, 환하게 드러냈습니다.

숨겨놓고 찾기보다는 많이 알려서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저 벽화에서 보이네요.

 

고양향교입니다.

이 곳에서 선비되는 방법을 가르치는 군요.

'오늘은 내가 선비되는 날, 애들아! 고양향교로 마실가자!'

다른 향교에서 보기 어려운 정감있는 플랭카드입니다.


안으로 들어가보니 관계자분이 계십니다.

할머니 한 분이 한복을 곱게 차려입으시고, 마루에는 앉은뱅이 책상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알고보니 근처 유치원에서 향교로 선비되는 날이라고 해서 아이들이 오는 모양입니다.

후훗~ 아이들이 공자왈 맹자왈이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옛 선비들의 고상함을 배우는 것은 의미가 있겠지요.


향교 옆 길입니다.

이 길을 지나가야 합니다.


아참, 향교 바로 옆에는 중남미문화원이 있습니다. 

저희는 월요일이라 개관하지 않아 들리지 못했습니다.



조금 올라가니 정자가 있습니다.

정자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신발벗고 앉아 커피 한 잔에 시원한 참외를 먹습니다.

바람도 상쾌합니다. 이 맛에 걷는 거지요.


산길을 걸었습니다.


중부대학교를 지나 한참을 걸었습니다.


연산군 금표비입니다.

연산군은 참으로 황당한 왕이었습니다. 

여기까지 동행했던 대현형님은 공사다망하신 관계로 먼저 퇴청하시고, 둘이서 계속 걷습니다.


연산군 금표비 :

연산군이 유흥을 즐기는 곳에 일반인들이 드나드는 것을 금지하기 위해서 세워 놓은 비이다.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웠는데, 윗부분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비문에는 이 금표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왕명을 어긴 것으로 보아 처벌을 할 것이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비가 서 있는 고양군은 연산군 10년(1504) 왕의 유흥지가 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다시 고양군이 되었다. 비는 이 유흥지를 만들때 함께 세운 것으로 짐작된다.


금표비를 조금 더 걸으니 혜덕사가 나옵니다.


혜덕사입니다. 

조선 3대임금이 태종의 7남인 온령군과 그의 자손들을 모신 묘지입니다.

아니, 태종에게 양녕, 효녕 그리고 충녕말고 아들이 더 있었다니~ 놀라웠습니다.

다시 그의 가계도를 찾아보니 10의 부인들과 12명의 아들, 17명의 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세종대왕의 즉위 과정만 들어 나머지 자식들은 있는 지도 몰랐습니다.

또 생각해보면 왕은 늘 여러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어째서 태종만 그럴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을까요?

세종이라는 아들때문에 아버지가 작아진 경우라고 할까요?


정예문화원입니다.

드라마의 액션아카데미라고 합니다. 

이 것이 격파하는 도구라고 합니다.

격파를 하는데 누가 세고 빨리하는 지를 이전에는 비교하기 어려웠는데 저 격파용 벽돌로 하면 비교할 수있다고 합니다. 몇 장을 깼는 지를 알면 되니까요.

이제는 무예도 표준화가 진행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배운 것 많습니다.



어느 새 배곱시계가 울리려고 합니다.

정오는 아니지만, 고개를 넘어가야 하니 배를 채우고 가야 합니다.

그런데 마을 모양새가 식당이 있어보이지 않습니다.

마침 버스 종점이 있어 기사 분에게 물어보니 식당이 정말 없다고 하더군요.

그러다 헤맨 것이 이 카페입니다. 

들어갔더니 주인장이 나오시더군요.

그래서 커피와 빵을 주문했습니다. 그랬더니 빵이 없다네요.

다시 말하면 오늘 만든 빵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어제 만든 빵은 있는 데 팔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입이 까다롭지 않으니 그냥 달라고 했더니, 정말 그냥 주십니다.

날자 지났어도 좋으니 달라고 했더니, 공짜로 주더란 거지요.

미안함, 횡재한 기분~

하루 지났어도 여전히 빵은 부드럽고 향은 좋았습니다.

알고보니 숙명여대의 꼬르동블루 요리원을 다니신 분이었습니다.

커피 향도 좋았습니다.


카페 내부입니다.

널찍하고 안락한 의자에 주변 풍광까지 즐길 수 있는 2층도 있습니다.

장소는 고양시 덕양구 고골길 228번지 (장근철 사장님, 010-2044-9290), 많은 분들이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뜻하지 않게 맛좋은 빵고 향좋은 커피를 마시고, 한시간은 둘이서 잡담하다가 나왔습니다.

더 있고 싶었지만, 어쨌든 걸어야 하니까요.

아무리 길이 좋다지만 해지기 전에는 집으로 돌아가야죠~


버스정거장입니다.

고골정거장입니다. 

둘이 걸으면서 한참 왜 고골일까 하고 걸으면서 궁금했습니다. 

고읍, 고골길, 고양

아하~

우리는 저 푯말을 보면서 고골이 무슨 뜻인지 알았습니다.

고읍(古邑)을 우리 말로 섞어부르다보니 고골이 된 것입니다.

이런 걸 뭐라고 하나요?

옛 고 자는 그대로 쓰면서 마을읍자는 순 우리말로 마을을 뜻하는 '골'이라고 썼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고골입니다.

지난 번 어딘가를 걷다가도 비슷한 사례를 본 기억이 납니다.


고읍마을 회관입니다.

이 회관 옆으로 가야 관청령입니다.


관청령을 넘다가 마을 어르신을 만났습니다.

고개넘어 약수에서 물을 떠오시는 중이었습니다.

저 배낭가득 약수가 들어있습니다.

서로 쉬는 겸 이런저런 이야기를 20분정도는 하였습니다.

시원한 산속에서 과거 이야기, 현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관청령을 내려오니 배고프다기보다는 목이 말랐습니다.

6월인데 벌써 30도가 넘는 날이었으니까요.

시원하게 맥주 한 잔하니 오늘 땡볕에 걸은게 꿈만 같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길을 걸을 꿈을 꾸며 또 목구멍을 차갑게 했습니다.


잘 쉬었다 갑니다.


어디를 가든 정거장에서 쉰다는 것은 탈 것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다시 삼송역으로 갑니다. 시작한 곳으로 다시 가는 거지요.

늘 그렇지만 정류장은 웬지 어디론가 떠나야 할 것같은 방랑자 느낌을 줍니다.

그럼 다음에도 의주길에서 방랑길을 떠나볼까요?



오늘 걸은 길을 사진으로 모아서 동영상으로 만들었습니다. 

대현 형님 작품이지요.

감상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2019년 6월 3일 의주길중 고양관청길을 걷다. 

                        같이 걸은 이 : 김민주, 김대현, 홍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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