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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dA Jun 29. 2020

어느 토론 학회의 질문

오늘날 사회에서 가장 경시되는 가치는 무엇인가?


    현대 사회에서 가장 경시되는 가치는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주의가 고착화되고 매체를 통해 ‘사랑’이라는 개념이 너무 쉽게 소비됨에 따라 그 본질이 갖는 의미가 흐려졌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랑’이 너무 흔하고 협소하게 소비되어 가장 가벼워졌다고 생각합니다. 사전적으로 정의되는 사랑은 ‘사랑한다’라는 말로는 전달될 수 없음을 느낍니다. 수많은 결의 애정과 우정과 사랑은 그 경계가 모호하지만, 케이크를 잘라먹듯 여기부터 여기까진 ‘사랑’이고 나머지는 아니라는 사회의 잣대가 사랑의 경시에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외로운 현대인의 소비주의를 자극하기 좋은 소재였고, 흔하고 얄팍해진 사랑은 허울만 남아 문학 혹은 매체와 현실 속 사랑의 간극을 더 벌리기도 합니다. ‘사랑이 밥 먹여주나?’라는 말을 들으면 조금 울적해집니다. 사랑이 밥 먹여주진 않지만, 사랑이 밥을 먹게 할 수는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어떠한 행동이 성공하고 혹은 실패하여 극복하고, 그 과정에는 애정과 열정 그리고 사랑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가장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행동이 오차 없이 이행되기 위해 추상적이고 정신적인 것들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가 추동하기 위해 프로테스탄티즘이 그 엔진이 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능률이 오르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조금이나마 행복해지는 그 모든 과정이 사랑의 조각이고 그 조각들이 모여 하루를 살게 한다는 점이 평가절하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사랑이 사랑으로 남을 수 있도록 사랑한다는 말과 감정을 남발하지 않는 사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가장 진정성이 묻어나는 행동의 기저에는 애정과 관심, 사랑이 있고 그러한 감정들을 동력 삼아 제 4차 산업혁명 세계로 나아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더이상 누군가의 번호를 외워야 할 필요성이 없어졌듯, 기술과 기계가 야금야금 인간의 본질들을 가져가고 있을 지도 모르지만 그 사실에 익숙해지는 것은 위험합니다. 대면 소통보다 비대면 소통이 주가 되고, 하나 이상의 매개를 걸쳐 소통하는 흐름이 만들어지며 주변 사람을 아끼고 존중하는 것, 들여다보는 것, 배려하는 것이 우리의 손을 떠나는 과정을 보게 됩니다. 그럴 때면 저는 종종 결국 제 4차 산업 혁명은 무엇을 이루기 위하고 무엇을 지키기 위한 것인지에 대해 묻게 됩니다. 


    E.H. 카는 “우리가 걸어온 방향에 대한 믿음은 가고 있는 방향과 연결된다. 신념을 상실한다면 더 이상 진보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저 역시 우리의 기술이 향하는 방향을 믿지만, 사랑하고 애정하고 지켜야할 것들을 상실한 진보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가장 경시되고 있는 사랑이라는 가치가, 르네상스 시기에는 가장 귀했던 가치이기에 사랑이 ‘부활’하기엔 21세기가 가장 완벽한 시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학회 자소서 3번 문항이었다. 세 가지 질문 중 하나를 골라 본인의 생각을 서술하라고 하였고, 나는 애당초 저 질문밖에 안 보였다. 우리가 상실한 가치, 경시하는 가치, 내가 가장 소중하다고 하면 사람들이 피식피식 웃는 가치. 말을 들은 사람도 너 참 나이브하다며 혀를 끌끌차는 가치. 그런데 내 눈엔 모든 것이 애정의 상호작용으로 보인다. 돈이 좋을 수도 있고, 차가 좋을 수도 있고, 명예가 혹은 권력이 좋을 수 있다. 결국 스스로의 행동을 추동하는 것은 자신의 선호이고 선호에 기반한 애정 그리고 조금 더 습습해진다면 집착이다. 그렇게 따지면, 모든 게 사랑이 맞지 않아?


    그래서 나의 행동과 선택은 모두 애정과 사랑에 기반하는데, 사랑이 그래서 제일 소중한데, 사람들은 비웃고 정신 좀 차리라며 일침해주기 바쁘다. 그리고 더 씁쓸한 건, 사랑한다는 말이 지폐 마냥 픽픽 쓰이고 있는 세상이다. 커피 한 잔을 갖다 주었더니 '아 역시~ 소다님 밖에 없네요. 사랑해요!!' 라는 말을 들으며, 난 어떤 반응을 해야할 지 몰라서 적당히 웃고 말았다. 사랑해가 고마워를 퉁치고, 사랑해가 미안해를 퉁치고 사랑해가 좋아함을 퉁치고 여하튼 소모된 '사랑해'의 무게는 가볍기 짝이 없다. 


    드라마에서만 해도 주말연속극을 들여다 보고 있자면 '사랑해'가 오만 구질구질한 맥락에서 등장하며 주인공을 붙들거나 놓아주는데 사용된다. 몰입을 잘 하다가도 주인공 입에서 튀어나오는 '사랑해'를 들으면 짜게 식는다. 이토록 얄팍하고 가벼워진 '사랑해'로 나의 사랑을 담아낼 수가 없는데 그렇다면 나의 사랑은 어느 단어에 넣어야할까? 새삼 고민한다. 


    내가 기억하기로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주인공들은 '사랑해' 대신 '마시멜로'를 사용했던 것 같다. "나는 너를 마시멜로 한다." 둘만이 알아듣는 애정을 꾹꾹 눌러담아 말로 빚어낸 그 과정을 읽으며, 나도 저래야 하려나를 잠시 생각했다.

    

    써놓고 나니 학회 자소서에 저렇게 구구절절 사랑에 대해 논하면 날 뽑아줄까 싶지만, 사실 날 가장 잘 나타내주는 글이라 별로 고치고 싶은 생각은 안 든다. 학회에서 만약 재밌는 피드백을 듣는다면 다음 글에 써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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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당탕탕하다보니 저 자소서로 2차 면접도 보고 왔다. 그냥 저 자소서를 놓고 질문을 받자니 굉장히 민망했는데 또 그 뿐이었다. 사랑이 가장 자유롭고 다양하게 사용이 되는 소재인데 왜 경시되냐고 물으셔서, 정말 한 치의 망설임도 답했던 것 같다. '흔해서요.' 너무나도 사랑이 흔해져서요.  

사랑에 희소성이 결여되어 있으면 그냥 사랑이 넘치는 사회가 되는걸까? 


    아닐 것 같다. 아닐 것이다. 우리말은 복합감정수치가 높고, 언어가 감당하는 스펙트럼이 넓어서 소통의 잭팟을 위해서는 굉장히 정교한 워딩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랑해'를 남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미안한 것은 미안한 것으로,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으로 남아야한다. 모든 것을 뭉뚱그려서 '사랑해'로 포장해서는 안돼. 마스크 위로 눈만 빼꼼히 내민 면접관 8명이 날 보고 신기하고 재미있는 생명체를 보듯 웃어주었다. 그래서 그냥 그 점이 묘하게 좋았다. 뭐, 적어도 지루한 면접은 아니었으니 이 정도면 선방했다는 것이 나의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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