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알코올이 나를 다시 끌어당기는 동안
단주를 결심한 날, 나는 마음이 가벼웠다.
마치 뭔가를 완전히 끊어낸 것 같았다.
“이제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
그 결심은 단호했고, 흔들림 없어 보였다.
하지만 며칠 후,
나는 또다시 알콜랜드의 문 앞에 서 있었다.
자기혐오와 유혹, 후회와 타협이 겹쳐진 그 순간,
나는 왜 다시 거기까지 가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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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유혹은 사람도, 상황도 아니다
단주의 길에서 가장 어렵다고 느껴지는 건
주변 사람들일 수도 있다.
회식 자리, 친구의 권유, 가족의 무심한 한마디.
하지만 그보다 더 강력한 유혹은 따로 있다.
바로, 지금까지 수없이 반복했던 습관의 회로다.
술을 마시지 않기로 결심한 나를
다시 술잔 앞으로 데려다 놓는 건
다름 아닌 내 뇌가 기억하고 있는 자동 반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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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는 유혹을 기억한다
반복된 음주는 뇌에 중독 회로(addictive pathway)*를 만든다.
이 회로는 단순히 마시는 행위만 저장하지 않는다.
술을 마시기 직전의 감정, 장소, 사람, 시간, 음악, 날씨…
그 모든 상황을 유혹의 방아쇠(trigger)*로 기억한다.
그렇기에 단주를 결심한 후에도
무언가 낯익은 상황이 펼쳐지면
뇌는 자동적으로 ‘그때의 반응’을 꺼내든다.
“지금 같은 날엔, 맥주 한 잔이 딱이었지.”
“이 스트레스는 술 없이 못 버텼잖아.”
“오늘까지만.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이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형성된 신경 회로(neural circuit)*가
다시 작동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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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취는 끝났지만, 알코올은 남아 있다
우리는 종종
“어제 마신 술은 다 깼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알코올은 혈중 농도에서 빠르게 떨어지더라도
체내 조직, 특히 간, 지방 조직, 뇌조직 내에서는
수일간 잔류할 수 있다는 연구들이 있다.
이 기간 동안에는
심리적 판단력이 여전히 흐려져 있으며
도파민 보상 시스템(dopaminergic reward system)*은
약한 자극에도 다시 활성화될 준비가 되어 있다.
즉, 몸에서 술이 완전히 빠져나가기 전까지는
단주의 회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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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의 강도는 체내 알코올과 비례한다
단주를 결심한 직후,
특히 과음한 다음날~3일 사이가 가장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체내에 남아 있는 알코올 대사 산물(acetaldehyde)이 여전히 중추신경계에 영향을 준다.
• 그로 인해 충동 억제력은 낮아지고,
• 보상 추구 행동은 강화된다.
이 상태에서 다시 술을 마시게 되면
뇌는 “역시, 이게 정답이야”라고 강화 학습을 해버린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알콜랜드의 회전목마 위에 올라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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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주가 맞다. 하지만 그 결심이 뇌에 닿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단주는 회복의 길이지만,
그 길은 결심만으로는 성립되지 않는다.
뇌의 회로는 시간이 필요하다.
몸에서 술이 완전히 빠져나가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그동안은
어제의 내가 만든 회로가 오늘의 나를 흔들 수 있다.
나는 그걸 알아야 했다.
결심은 시작일 뿐이고,
회복은 신경 회로의 리셋 과정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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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 회로 (Addictive Pathway)
반복된 쾌락 자극이 뇌에 형성한 자동화된 반응 경로.
특정 감정이나 상황과 연결돼 쉽게 재작동된다.
*유혹의 방아쇠 (Trigger)
특정한 장소, 감정, 사람, 상황 등 술을 떠올리게 만드는 자극.
뇌가 습관적 음주와 연결해 저장한 요소들.
*도파민 보상 시스템 (Dopaminergic Reward System)
쾌감과 행동 강화를 유도하는 신경 회로.
알코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반복 행동을 강화시킨다.
*신경가소성 (Neuroplasticity)
반복된 자극에 따라 뇌 회로가 재구성되는 능력.
중독도, 회복도 이 원리를 따른다.
*아세트알데하이드 (Acetaldehyde)
알코올 분해 과정에서 생기는 대사산물.
독성이 강하며 중추신경계에 영향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