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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르멘 Apr 04. 2024

아이를 낳을지 고민인 후배에게

꽃은 지는 것을 염려하지 않는다


'지는 것을 염려하며 피어나는 꽃이 있을까?'


사람은 모순을 안고 사는 존재라서, 봄꽃이 질 것을 염려하며 봄꽃구경을 간다.


꽃이 지는 것을 걱정하는 건, 꽃이 아니다.

그걸 바라보는 사람뿐이다.


일찍 만개하는 목련의 경우가 그렇다.


나무에 매달려 영롱한 빛깔을 뿜어내는 목련을 볼 때, '예쁘다'는 생각 뒤에 곧이어 따라붙는 생각.


'아, 근데 목련은 금방 져. 길에 떨어지면 더러워지는데.'


빨리 피는 꽃은 빨리 지는 게 당연하고, 한번 핀 꽃은 한번 지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아쉽고, 안타깝고, 염려되고.

그게 사람 마음이다.


문득 그런 생각의 말미에, 최근 후배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후배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됐고, 아직 아이가 없다.

자녀계획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하다가, 후배가 이런 말을 했다.


"근데, 선배님. 저는 무서워요.

요새 학폭이니 뭐니 말이 많잖아요.

예전에 내 아이가 피해자가 되면 얼마나 무서울까 싶었거든요.

근데요, 다시 생각해 보니 내 아이가 가해자면 더 무서울 것 같아요.

전 이런 게 무서워서 아이 낳기가 두려워요."


무슨 말인지 십분 공감했다.


왜 아니겠는가. 세상이 흉흉하고, 아이를 낳고 나면 세상은 더 위험한 것투성이다.


그때는 나도 "그렇죠. 피해자든 가해자든 너무 무서운 일이에요."라고 대답했다.

아마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면 나도 감당할 자신은 없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본질은 따로 있는 듯하다.


꽃이 바람에 어지는 걸 보기 두려워,

만개한 봄꽃길을 눈감고 걸어갈 것인가.


아이도 그런 것 같다.


물론 아이를 바르게 키우고, 좋은 환경에서 키우는 건 너무도 중요하다.

하지만 해와 바람을 내 아이에 맞게 조절할 수는 없는 노릇.


아이가 상처를 주거나 받을까 봐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건 사실 나의 오만이자 욕심이다.


아이가 주는 기쁨, 아이가 갖고 있는 희망은 현재 진행형이다.

미래에 있을지 모를 불안정성 때문에 현재나 미래의 희망과 기쁨을 포기하는 게 맞을까.


그 아이가 어떤 미래를 그려갈지를 모르는데,  미래에 있을지도 모를 나의 불안 때문에 꽃 피울 기회 자체를 안 주는 게 맞을까.


물론 아이를 낳고 키우는 건 개인의 선택이다.

그 책임은 아직까지 개인에게 막중하므로 이렇다, 저렇다 누구도 강요할 순 없다.


하지만 유독 일찍 핀 벚꽃길을 걸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꽃이 지는 걸 두려워 꽃을 피우지 않을 순 없다.


꽃잎이 떨어지는 게 무서워 꽃길을 피해 다니는 사람이 있던가.


나 홀로 핀 꽃은 여유롭지만 무료하다.

햇살, 비, 바람을 혼자 맞고 혼자 버텨내면 된다.

나눠줄 것도 나눠 받을 것도 없으니.


함께 핀 꽃은 버겁지만 행복하다.

햇살, 비, 바람을 함께 맞고 함께 버텨내면 된다.

한줄기에서 핀 이상 그것은 숙명이다.


혼자 핀 꽃과 함께 핀 꽃 중 어떤 꽃도 좋다, 나쁘다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떤 꽃도 피기 전에 질 것을 염려하진 않는다.


그저 꽃을 바라보는 이의 마음일뿐이다.


꽃의 운명은 꽃만이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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