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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르멘 Mar 20. 2024

나도 손발이 예쁜 여자였어요

내 몸의 춘분

"피아노 치게 생겼다"


제 하얗고 긴 손가락을 보면 으레 듣던 말입니다.


"아니, 발가락이 왜 이렇게 손가락처럼 예쁘고 건강해요?"


언젠가 한두 번의 여름날, 발톱에 색을 칠하러 네일숍을 갔는데

발가락과 발톱을 본 네일숍 언니와 같이 온 동료가 놀라며 말했습니다.


남의 발가락 볼일이 없었으니 몰랐는데, 새끼발가락까지 곱게 뻗어서 발톱까지 다 자기주장하는 발이 생각보다 흔치 않았나 봅니다.


35년 정도 그렇게 섬섬옥수와 섬섬옥족?을 갖고 살았는데,

이제 보니 타고난 복이었나 싶네요.

특별히 관리하지 않아도 본래 생김새가 그랬고, 아마도 그타고남을 손상시킬 일을 하지 않았으니.


손과 발은 의외로 그 사람의 삶을 엿보게 하는 부위입니다.


저는 그걸 아이를 낳고 워킹맘이 되고 나서 알았습니다.

그전까지는 제손발, 남의 손발에 관심이 없었어요.

문제가 없었으니 문제의식도 없었던 거죠.


그런데 아이를 낳고 나니 멀쩡하게 매끈하던 발뒤꿈치에 지진이 발생.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죠.


그 후에 발각질 관리하는 곳을 갔는데,


"출산하고 나서 몸이 건조해지고 영양분이 빠져나가면서 이런 분들 있어요. 원래 좀 건성이시죠?"


네, 전 원래가 건성피부입니다.

다만 제 몸의 생태계가 타고난 컨디션에  잘 유지되고 있었는데,

임신과 출산이라는 사건(?) 발생하며 생태계 시스템이 붕괴된 거죠.


그때부터는 꼭 관리를 해야 악화되지 않을 정도의 발로 살고 있습니다.

( 관리도 하던 사람이나 하나 봅니다. 잘 안됩니다.)


그런데 손과 발은 세트인가 봅니다.


싱글 때는 밥도 안 해 먹고, 설거질 할 일도 없었죠.

뭐 굳이 고무장갑이 필요하지도 밥솥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고 하면 말 다했죠?


그런데 아이를 낳고부터 이틀에 한번 밥을 하고,

젖병, 이유식기, 각종 조리도구부터

삼시 세 끼에 간식까지 하다 보니 설거지가 끝이 없더라고요.


아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설거지도 여유 있게 할 짬(?)이 없으니 후다다닥- 하느라

고무장갑 낄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호가 왔죠.

오른쪽 엄지손가락부터 손가락이 갈라지기 시작하더니 점점 기분 나쁜 통증이 발생했습니다.


대일밴드를 붙였는데, 또 설거지나 아이 목욕 후 밴드가 벗겨지니 소용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언제 한번 피부과에 가서 연고를 하나 받았는데 그때뿐이더라고요.


고무장갑을 꼭 잊지 말고, 가급적 물이 닿지 않게 하는 게 최선일 뿐이죠.


사실 사는데 큰 문제는 없습니다.


다만 약간의 불편함과 부끄러움이라면


필라테스 수업 때 맨발로 당당했던 과거와는 다르게

선생님이 발을 터치하거나 들여다볼 때 좀 민망하다는 것.

(운동양말을 신으면 되는데, 매번 까먹거나 1~2분이 아까워서 거의 안 신습니다)


그리고 유독 건조한 계절이 오면, 손가락 끝의 아림이 심해지는 정도.


타고남도 변하나 봅니다.

시간에 따라, 환경에 따라 모든 게 변하네요.


짐작하실지 모르겠으나, 손끝과 발끝에 징후가 나타날 정도면

제 몸 본체가 바뀐 걸 테죠.


사실은 몸 전체 피부의 생태계가 바뀐 겁니다.


저는 원래 면역력이 떨어지면 피부의 징후가 발생합니다.

피부의 극건성화도 아마 면역력과도 관련이 있을 듯합니다.


결국 피부는 단순 미용의 문제라기보다, 건강의 문제인 거죠.

단순한 몸뿐 아닌 마음의 건강과도 직결됩니다.


고무장갑 낄 마음의 여유를 가지 않은 것.

진짜 여유가 없어서 여유롭지 못한 게 아니라

(뭐, 진짜 여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서)

수고스럽지만 여유를 챙겨야 한다는 의지와 노력이 부족했던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니 고무장갑 끼고 끝까지 설거질 할 시간이 부족하다면,

조금 미뤘다가 여유 있을 때 고무장갑 끼고 설거지해도 된다는 마음의 여유.


그 여유를 챙겨야겠습니다.


당장 해야 한다는 강박과 습관이 여유의 자리를 빼앗지 못하도록요.


그리고, 매일 밤 넷플릭스는 보면서 발뒤꿈치에 바셀린도 안 발라줬던 나의 무신경함.

발뒤꿈치 정도 아무렴 어떠냐, 는 안일한 태도를 바꿔야겠습니다.


그 마음과 태도를 바꾸다 보면,

마음의 생태계가 바뀌고 손끝발끝까지 변해버린 몸의 생태계도 조금씩 바뀌겠죠.


오늘, 춘분입니다.

낮과 밤의 길이가 똑같아질 만큼, 해가 부지런해지는 계절이 도래했습니다.


제 몸과 마음도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한때, 나도 예뻤다. 가 아니라.

나 여전히 예쁘다, 로.

손끝발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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