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내일에게 거짓말을 못해"

<아들과의 대화>

by 카르멘


콧구멍을 파면, 콧구멍이 동굴만 해 진대.

손가락을 빨면, 손가락이 꼬리처럼 길어진대.

귀를 잡아당기면, 코끼리 귀가 된대.


아이와 '콧구멍을 후비면'이란 공연을 봤습니다.

베스트셀러 원작을 공연으로 만든 작품이더군요.

아이가 자꾸 콧구멍을 후비던 차라(?) 한번 보여줄까 싶어 공연을 예매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과 달리 무대에는 '시계'가 놓여 있더군요.

주인공은 콧구멍 파지 마, 손가락 빨지 마, 귀 잡아당기지 마 등등 엄마의 잔소리를 피해 꿈나라로 빠져듭니다.

그리고 주인공의 코, 손가락, 귀가 등장합니다.


한쪽 콧구멍이 동굴처럼 커진 코.

땅에 질질 끌릴 정도로 길어진 손가락.

코끼리 귀처럼 늘어져 펄럭이는 귀.

주인공은 놀라서 이유를 묻지만, 모두 같은 대답만 내놓습니다.


"오늘은 내일에게 거짓말을 못해"

그리고 모두 시계 속으로 사라집니다.

아들 콧구멍 후비지 말라고 보여주려던 공연이 제게 철학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 오늘은 내일에게 절대 못하지.

거짓말...


내가 판 콧구멍은 1mm라도 내일 콧구멍을 확장합니다.

내가 빤 손가락은 0.1mm라도 내 손가락을 늘려놓죠.

내가 당긴 귓불은 0.01mm라도 내 귓불을 쳐지게 합니다.


왜 몰랐을까요?

아니, 아는데도 까먹는 건 제대로 알지 못해서일까요?


내가 아이와 함께 하는 오늘은 절대 내일의 아이와 나에게 거짓말 못합니다.


아이가 불쑥불쑥 내는 짜증,

아이가 빽 지르는 소리,

느닷없이 짜내는 울음.


그 속에 모두 어제의 제가 있습니다.


"아주 똑같네 똑같아"

제 최측근이 아들의 모습을 보고 제게 하는 말이죠.

저는 울화통을 삼켜보고 바라봅니다.


사실 부끄러워 외면하고픈 어제의 제가 아이에게 담겨있습니다.


"왜 그러니까, 왜 왜!" 소리 지르던 어제의 나.

"아이씨.. 이거 왜 안돼?" 짜증 내던 어제의 나.

"야!!!" 빽 지르던 어제의 나.


이제는 뭐, 저만 아는 비밀도 아닙니다.

아이도 압니다.


"엄마도 나쁜 말 했잖아! "

"엄마는 화만 내!"


매일 매 순간 나쁜 말 한 것도, 화낸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말하는 아들내미가 야속합니다.

하지만 또 모두 거짓말도 아닙니다.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은 순간들.


그래도 두 번째 기회는 놓치지 말자, 속으로 다짐합니다.


첫 번째야 날아갔어도, 그건 과거니까.

두 번째에만 반복하지 않으면 된다, 이게 오늘이야.

그리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어.


오늘은 내일에게 거짓말 못하니까요.

오늘 아침 일어나며 의식의 바구니 세 개를 떠올렸습니다.

(이건 지담작가님께 영감을 받은 건데, 지담 작가님은 '관심'과 '영향'이라는 두 가지 바구니 훈련을 하셨다네요. 관심 바구니에서 영향바구니로 옮길 건 옮기고, 관심 바구니는 비워서 진짜 영향을 주는 바구니만 남겨두는 의식적 훈련)


저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바구니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떠올린 생각들을 들여다봤습니다.


01. 아들이 꿈틀대네, 지금 몇 시지?

몇 시간 잔 거지?

02. 아니, 어제 늦게 잤는데 왜 벌써 일어나?

03. 아휴, 너무 피곤해. 난 더 자고 싶은데..

04. 잠을 많이 자야 키가 크지! 요새 왜 이렇게 안 잔대?

05. 코맹맹이 소리가 들리는 거 같은데, 설마 또 감기?

06. 오늘 아침은 빵을 해야 되나, 밥을 해야 되나? 어린이집 아침 간식이 뭐지?

07. 오늘 출장 가야 되는데, 그전에 제발 별일 없기를

08. 아 맞다, "다정한 아침이야" 말 안 했다.. 왜 이렇게 입에서 안 떨어지냐..


그리고, 일어납니다.


들여다보니, 아들에 관한 생각은 대부분 '과거'와 '미래' 바구니에 담기더라고요.

몇 시에 잤더라, 몇 시간 잔 거지? 등은 과거의 바구니. 제가 바꿀 수 없는 바구니죠.


잠을 많이 자야 키가 크지, 코맹맹이 소리 나네 감기 오려나 등은 미래의 바구니.

마찬가지로 당장엔 제가 걱정한다고 바뀔 수 있는 바구니는 아니죠.


그러고 나면 나에 대한 감정과 신체의 느낌만이 현재의 바구니에 남습니다.


현재의 바구니에 아들은 없습니다.



오늘은 내일에게 거짓말 못 한다는데,

오늘의 나는 과거만 돌이켜보고

미래의 걱정만 들이켜고 있네요.

그러면 뻔할 뻔하죠.

내일도 현재의 바구니는 비어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결국, 뻔한 말이지만 현재의 나부터 바꾸는 노력을 하면 됩니다. 그래야만 하고요.

왜냐하면, 과거에 대한 짜증과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만 아들을 대하니까요.

저는 그게 싫거든요. 모든 엄마들이 싫겠지만...


오늘의 나,

오늘의 엄마,

오늘의 아들.


지나간 과거의 바구니도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바구니도 비워봅니다.

조금씩 연습하려고요!


내일은 현재의 바구니가 빵빵해지도록!

조금씩..?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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