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쁘고 나쁘고 좋고 싫은, 씨앗

<아들과의 대화>

by 카르멘


친무라고 아시나요?


친절한 무시의 줄임말이죠.

이건 아이의 수면교육 때 알게 된 용어인데, '아이 스스로 자게 하라'가 유행인 요즘 엄마들 사이에서 자주 오르내리곤 한 말이기도 합니다.


아이는 원래 울죠.

잘 때는 특히 웁니다. 자다 깨면 더 울고요.

그때마다 엄마가 토닥여준다든가, 안아준다든가 하는 '즉각 개입'을 하지 말라는 게 요지입니다.

즉, '아이가 우는구나' 인지하되 친절하게 무반응하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친무(친절한 무시)입니다.


그런데 이게 아이 입장에서도 친절할까요?

아이는 자기가 울어도 들여다봐주지도, 안아주지도 않는 엄마가 '친절하다'라고 느껴지진 않을 듯합니다.

아이 스스로의 조절능력을 길러주기 위한 수면교육의 배경엔 동의하지만

분명한 건 친절하다는 건 엄마입장의 형용사란 점입니다.


갑자기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이유는, 요새 아이의 말 때문입니다.

아니 아이와 엄마인 제 말 사이의 거리 때문입니다.


'다정하지만, 단호하게'가 요새 훈육의 지침입니다.

그런데 이 말 또한 엄마 입장의 형용사임을 종종 느낍니다.

왜냐하면 아이가 쓰는 형용사와 제가 쓰는 형용사의 범주가 다름을 깨달았거든요.


저희 아이가 자주 쓰는 말은 '예쁜'과 '나쁜'입니다.


문제는 아이의 '예쁜 말'에 대한 개념이 저와 다르다는 겁니다.


"준아, 지금은 밥 먹을 시간이야"

"약속 안 지키면 엄마가 준이 말 못 믿지. 약속은 지켜야지"


엄마의 말에 아들은 즉각 반응합니다.


"나쁜 말 하지 마!!"


2단계가 들어갑니다.


"준아, 소리 지르면 안 되지"


엄마의 말에 아들은 또 반응합니다.


"예쁜 말 해줘! 엄마 화냈잖아!"


이때부터 상황이 제 생각과 다르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아이에겐 예쁜 말의 기준이 '자신의 입장에서 듣기 좋은 말'이라는 점을요.


개념을 정정해 주기 위해 "엄마, 나쁜 말 한 거 아냐. 가르쳐주는 말 한 거야."라고 말해봤지만

잘 안 통합니다.


순간 저도 헷갈리더군요.


뭐가 예쁜 말이고, 좋은 말이지? 예쁘다의 반의어가 나쁘다인가? 하고요.


찾아봤습니다.


<예쁘다>

1. 생긴 모양이 아름다워 눈으로 보기에 좋다.

2. 행동이나 동작이 보기에 사랑스럽거나 귀엽다.

3. 아이가 말을 잘 듣거나 행동이 발라서 흐뭇하다.


반의어는? 밉다


<나쁘다>

1. 좋지 아니하다.

2. 옳지 아니하다.

3. ~에 해롭다.

4. 어떤 일을 하기에 시기나 상황이 적절치 아니하다.

5. 어떤 일을 하기에 쉽지 아니하다.


반의어는? 좋다, 곱다, 괜찮다


어라?

나쁘다의 반대말에 곱다가 들어갑니다.

곱다와 예쁘다는 유의어고요.

그럼 아들 말처럼, 예쁘다의 반대말도 나쁘다가 되기도 합니다.


제가 아이에게 하는 훈육의 말은 제 입장에선 '좋은 말'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나쁜 행동을 고쳐주는 말이 좋은 말이 되는 거지요.

하지만 좋은 말이 제게 듣기에 종국에는 예쁜 말이기도 합니다.


반면 아이는 어떨까요?


아이에게 예쁘다의 동의어가 좋다입니다.

좋다의 반의어는 싫다/밉다이고,

싫다/밉다는 말은 나쁘다와 동의어죠.

결국 예쁘다의 반의어가 나쁘다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써놓고 나니, 말장난 같네요.

기준이 없습니다.


좋다, 나쁘다, 예쁘다, 밉다, 싫다 모두 감정의 형용사들이기 때문이네요. 감정 형용사들의 범주는 모두 겹칩니다. 무 자르듯 구별해 낼 수 있는 게 애초에 아니었네요. 개념적으로 엄마인 제가 맞고, 아들이 틀린 게 아니었습니다.




이제 알겠습니다.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감정이나 상황에 따라 변하는 말이 아닙니다.

제가 아이에게 엄마로서 하고 싶은 말은 옳은 말입니다. 그게 예쁘냐 밉냐는 후차적 문제.

어떤 상황에서든 지켜야 하는 바른, 옳은 말.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말이 선제조건.


저는 친절한, 다정한, 단호 한과 같은 태도, 감정의 표현들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메시지보다 앞서서. 그래서 혼란이 온 겁니다.

그때그때 유행하는 훈육방법은 메시지보다 표현방식에 방점이 찍혀있으니까요.

그래서 오히려 '표현의 시시비비'만 가리게 됩니다.


<옳다>

사리에 맞고 바르다.


아이에게는 '옳다'는 개념이 성립되고 있는 중입니다.


아이에게는 옳다는 개념이 아직 자리잡지 않았으니,

좋은 게 예쁜 거고

싫은 게 나쁜 겁니다.

이제 이해가 됩니다.

아이의 언어세계가.


그리고 되돌아봅니다.

저의 언어세계를.


메시지는 당연하니 문제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던 언어의 문제.

아니, 언어의 기본은 본질이었습니다.

표현도 중요하지만, 중요한건, 먼저는,

메시지의 시시비비라는.

메시지의 당위성. 표현에 꼬리 잡혀 흐려지던 옳음의 무게.


제가 무심코 아이에게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예쁘게 말해야지"


제가 앞서 말했던 말에 오해의 씨앗이 숨어있었습니다.

아이의 무의식 속에 예쁘다=좋다=옳다가 되어버린 걸 수 있겠습니다.


제 말이 아이의 무의식의 씨앗이 되어준 겁니다.

메시지보다 표현의 시시비비를 먼저 가리게 하는.


제가 무심코 뿌리는 수많은 씨앗들이 아이에게서 발화되는 게 바로 이 '말'이란 점을 다시 한번 무섭게 깨닫습니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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