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st 10 minutes> 관찰일지
오늘의 관찰대상: 키보드
색상: 검정
연식 : 2019년 12월생, 6살.
01. 먼지가 많다. 왜냐면 자리 이동할 때 외엔 한 번도 안 닦으니까.
근데 뭐 키보드 보호패드 깔았잖아?
02. 근데 보호패드 자체가 더러운데 키보드 자판을 보호하는 게 의미가 있나?
03. 유독 많이 눌러서 보호 패드가 거의 찢겨나간 자음 모음이 있다.
04. 뭐지? 보호패드를 들어도 소용없다. 본 패드 자체의 인쇄가 벗겨져 나갔네.
05. 내가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두드려봐야 그 자리의 자음 모음을 알 수 있다.
06. 몸은 기억한다. 기록은 사라진다.
07. 알고 보니, 자음은 ㄴ, ㅇ,ㄹ. 유음 삼총사.
08. 왜지? 아.. 내 이름의 초성이 2개나 들어있네. (ㅇ,ㄹ.)
09. ㄴ은 뭐지? 노노? 네?
아마도 '네'일 듯...
10. 모음은 뭘 많이 눌렀나? ㅏ.ㅓ.ㅜ.ㅡ.
11. 안녕하세요?
어. 웅. 응. 또는 ㅜㅡㅜ...
12. 근데 키보드 패드를 뚫고 키보드에 인쇄된 글자가 지워질 정도면, 내 지문이 엄청 묻었겠네?
13. 키보드는 나를 다 안다. 내가 하루 종일 쓰고 말하는 모든 말을.
14. 근데 왜 이렇게 홀대하지? 내 지문이 켜켜이 쌓인 키보드인데 어찌 한 번도 안 닦누?
15. 왜냐면.. 키보드를 통해 쳐내는 활자엔 먼지가 안 나오니까?
16. 키보드엔 먼지가 있어도 키보드로 친 활자엔 먼지가 안 나올 테니까?
17. 근데 정말일까? 진짜 안 나올까?
18. 먼지 내며 쳐댄 키보드에서 나온 수많은 말들에 먼지가 안 묻었을까?
19. 나는 지문으로 먼지를 치고 있었던 걸까?
20. 먼지처럼 친 활자는 먼지..처럼 사라질 숙명이 아닐까?
21. 사라지지 않은 먼지는 내 키보드 위에 고스란히 묻어나는데.
22. 오히려 키보드에서 나온 활자들은 먼지처럼 사라질 뿐.
23. 심지어 그 활자 위 먼지들조차 편협적이다.
24. 자주쓰는 말엔 먼지가 덜 묻되 형태가 사라지고, 자주 안쓰는 말엔 형태는 있되 먼지가 더 묻는다.
25. 됐고..좀 닦아라 인간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