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의 장작은 내 거야

<엄마의 유산 프로젝트>

by 카르멘

입이 위아래로 삐죽 대기 시작해.

동공은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하지.

그리고 입에서는 채 솎아지지 않은 뾰족뾰족한 자음과 모음들이 맞부딪히고 있어.

이상하게 골이 난다.

내 몸속에 있었던지도 모른 ‘샘통’이란 곳이 차기 시작해.

그러다 찾게 되지. 가까이 있는 대나무 숲을. 그리곤 외치는 거야.


"이 과장 귀, 당나귀 귀야! 내가 아는데 별로 잘나지 않았거든! “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이 뭐야?

바로 ‘질투’야.

우리는 이 질투라는 감정을 갖고 있는 인간적인 존재지. 특히 누군가는 나보다 위, 누군가는 나보다 아래의 상대적인 평가를 받아야 하는 사회조직 안에서는 결코 없어지지 감정이지.


한 번은 엄마 회사에서 이런 적이 있었어.

후배였던 이 과장이 선배 김 과장 보다 먼저 승진을 한 거야. 연공서열대로 승진하라는 법은 없지만, 그래도 공적에 큰 차이가 없다면 승진서열에서 후배가 선배를 넘어서는 경우는 많지 않았거든. 그러니 그때 김 과장이 받은 충격은 말도 못 했겠지?

하필 김 과장과 이 과장은 같은 팀이었는데, 후배였던 이 과장이 그 팀의 팀장이 된 거야. 후배에게 자기보다 직급이 높은 ‘팀장님’이라는 호칭을 불러야 하니까. 결국 그때 김 과장의 심장에 불이 붙었지. 질투라는 감정의 불.


우리가 ‘질투’라는 감정을 언제 느낄까?

두 가지 조건이 성립해야 해.


먼저, 누군가 나보다 잘나야 하지.

나보다 예쁘거나, 나보다 부자거나, 나보다 인정받거나, 나보다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거나 등등. 회사라는 조직으로 좁혀볼까? 누군가 나보다 평가에서 인정을 잘 받는 경우지.


그리고 그 누군가가 나와 가까운 존재여야 해. 보통의 사람들이 빌게이츠나 워런 버핏이 자기보다 부자라고 해서 그들에게 질투를 느낄까? 아니면 자기 고등학교나 대학교 동창이 대박이 나서 부자가 됐을 때 질투를 느낄까? 아마 후자일 확률이 높을 거야. 그들이 물리적으로 심적으로 나와 더 가까운 존재일 때 우리는 질투의 불씨를 더 활활 태우게 되지.


그런데 이 ‘질투’가 나쁜 감정일까?

세상에는 당연히 나보다 잘난 인간들이 존재하잖아. 가까이에 있는 그룹 안에서 누군가는 더 잘 나고, 누군가는 더 못나기 마련이잖아. 그런데 왜 당연한 현상에 따른 자연스러운 감정에 우리는 옛날부터 ‘칠거지악’이라는 말까지 붙여가며 ‘악한 감정’이라는 멍에를 씌어버렸을까?


질투의 사전적 의미를 먼저 살펴봐볼까?

다른 사람이 잘되거나 좋은 처지에 있는 것 따위를 공연히 미워하고 깎아내리려 하는 거야. 여기서 ‘공연히’는 무슨 뜻일까? ‘아무 까닭이나 실속이 없게’란 뜻이야. 그럼 만약에 질투라는 감정에 까닭이나 실속을 차려주면 어떨까? 질투가 어쩔 수 없이 사람의 심지에 불을 붙이는 바람이라면 그 붙은 불을 유용하게 한번 써보는 거야. ‘공연히’ 미워하는 마음 말고 ‘공공연히’ 마주하는 마음으로 방향을 바꿔보는 거지.


어때? 좀 구미가 당기지 않니?

질투하는 마음을 부끄러워 감추거나 베베 꼬아서 왜곡했다가 험담 하는 불쏘시개로 쓰지 말고,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질투의 이면을 밝혀 그 질투를 나의 잠재력을 불태워 주는 장작으로 써보는 거야.


질투의 이면을 보는 건, 내가 질투하는 대상의 결과만이 아닌 과정을 보는 데서 시작하지.


앞서 이야기했던 김 과장과 이 과장의 이야기를 기억하지? 후배였던 이 과장이 승진하고 선배였던 김 과장이 승진에서 누락된 건 결과야. 그 결과만 두고 보면 김 과장은 비련의 주인공이고, 이 과장은 질투의 화살받이가 됨이 마땅하지. 하지만 과연 그럴까? 사실 김 과장은 연차로는 선배이지만, 팀 내 역할에선 선배가 아니었어. 팀에서 가장 연차가 높은 선배에게 기대되는 역할이란 게 있기 마련이거든. 팀장만큼 월급을 받진 않지만 다른 후배들보단 월급을 많이 받는 만큼의 몫을 해주길 바라지. 팀장이 없을 때 의사결정을 해주고, 팀 내 가장 어렵거나 힘든 업무를 맡아주는 그런 역할 말이야. 그 역할을 한 건 김 과장이 아닌 이 과장이었지. 김 과장을 제외한 대부분의 팀원들은 김 과장이 아닌 이 과장의 승진을 축하해 줬어. 왜냐하면 그 과정을 함께 했으니까. 반면 김 과장은 그 과정에서 비켜나있었기 때문에 승진이라는 결과만을 갖고 이 과장을 질투한 거지. 김 과장에게도 동등한 기회가 있었는데 말이야. 그뿐 아니야. 김 과장은 자기 계발을 위해 해외 연수를 다녀오느라 2년의 공백기를 가졌지. 김 과장은 승진에서 누락될 수 있다는 걸 어느 정도 인지했겠지만, 그때의 누락 이후 승진에 이렇게 많은 시간이 걸릴 줄은 인지하지 못했겠지. 그건 뭐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결국 김 과장은 김 과장의 우선순위에 따른 선택을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공연히 질투를 한 거야. 김 과장이 어학연수 2년을 가있는 동안 이 과장은 조직에 헌신했고, 여러 대가도 치렀겠지? 그 보상으로 승진이 돌아온 거고. 그러니 질투라는 건 사실 과정에 대한 무지에서 시작되는 거야. 그건 정말 ‘공연한’ 하급의 질투지.


자, 그러면 질투의 이면을 보는 두 번째 과정으로 들어가 볼까?


공연한 하급의 질투가 아닌, 공공연한 그러니까 떳떳한 상급의 질투라는 건 어떤 걸까?


먼저, 마주 보는 거야.

축구선수 메시라고 알지?


그 이야기를 다음 편에 이어가 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