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가식을 응원해!

<엄마의 유산 프로젝트>

by 카르멘

무대 위에 화려한 가면과 옷으로 치장한 인물이 등장해. 누군가는 노래를 너무 잘 부르고, 누군가는 웃음이 나올 정도로 노래를 못 불러. 가수는 아니야. 그런데 왜 그 무대 위에 섰을까? 그냥, 그냥 노래를 불러보고 싶은 거야.

자신의 얼굴을 가린 채.


그 무대 위에 사람에게 중요한 건 노래를 잘하고, 못 하고는 아니었어. 가면을 쓰니 원래의 내가 갖고 있던 부끄러움을 잊게 되고 용기를 얻었지.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그 사람의 얼굴, 직업 등을 모르니 편견을 지울 수 있었지. 무대 위 사람도 그걸 알아서 자유로웠어.

가면 덕분에 자유로웠던 거야. 노래를 하는 사람, 듣는 사람 모두.


엄마는 ‘복면가왕’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어. 무대 위의 주인공은 가면을 쓰고 있을 때 ‘가식적’이었던 걸까?

우리는 진짜 자기 얼굴이 아닌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을 보고 ‘가식적’이라고 말하잖아.

사전을 찾아보니 가식의 유의어가 가면은 맞아. 그런데 반드시 그런 건 아닌 거 같아.


가면을 써서 본래 자기와 달라도 ‘되고자 하는 모습’이 되는 경우도 있잖아. 가수처럼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해도 가면을 쓰고 가수가 되어보는 것처럼. 혹은 가면을 써서 서로가 자유로워질 때도 있잖아. 얽히고설킨 이해관계없이 가면을 통한 목소리만으로 소통하듯이. 엄마가 방금 말한 복면가왕이란 프로그램이 인기 있었던 이유지.


그리고 사실은 가식의 반대어 ‘솔직함’도 언제나 옳은 건 아니란다. 엄마는 ‘솔직함’에 대한 자의식 과잉으로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드러내며 폭군처럼 구는 사람들도 많이 봐왔어. 그들은 주로 이렇게 말하지.


“나는 그렇게 가식적으로 말은 못 해요.

봐봐, 내가 얼마나 솔직해!”



타인이 원하지 않는 솔직함을 무기로 무례를 일삼는 무뢰한들. 불행히도 네가 속한 어느 조직에나 있을 거야. 엄마는 네가 솔직한 무뢰한보다는, 가식적인 젠틀맨이 되길 바라거든.

그래서 엄마는 오늘 홀대받고 천대받는 ‘가식(假飾)’에 대해 말해보고 싶어.


가식은 악덕이 덕에게 바치는 경의다
(주 1)


가식에 대해 편견을 버려봐.

가식은 근사한 거리를 잇는 ‘가교(架橋)’가 되기도 하거든.


가식 假飾(거짓 가, 꾸밀 식)은 말이나 행동 따위를 거짓으로 꾸미는 거잖아. 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이 진실이 아니라는 거지. 그래서 본심을 감추고 하는 가식적인 말과 행동은 옳지 않다고 해. 가식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가식적인 사람을 멀리하라고 배우지. 그런데 과연 그럴까?


엄마는 네가 어릴 때

“하고 싶다고 모두 다 할 수는 없다”라고 말해줬어.

“너의 감정이 밉다고, 말도 밉게 해선 안 된다”라고 했지.

“약속을 했다면, 하기 싫은 마음이어도 해야 한다”라고 말했어.


사실은 하고 싶은 게 본심이고, 미운 감정이 본심이고, 하기 싫은 마음이 진심이잖아.

그래도 할 수 없을 때도 있고, 예쁘게 대해야 할 때도 있고, 해야 할 때도 있잖아.

어쩌면 인생엔 그럴 때가 더 많잖아. 그러면 우리는 하고 싶지 않은 척, 기분이 좋은 척, 기꺼이 약속을 지키는 척하는 게 모두 가식인 걸까? 말이나 행동을 너의 본심, 진심과 다르게 꾸미니까 말이야.


그렇다면 ‘가식’은 욕심에 대한 절제이고, 감정과 태도의 구분이고, 약속을 지키는 의지네.

필요하다면 욕심에 대한 절제를 하는 척, 감정이 그렇다 해도 태도는 그렇지 않은 척, 지키고 싶지 않지만 지키려는 시늉이라도 하는 척.

그 척, 척, 척의 연속성이 유지되는 한 ‘가식’은 반드시 버려야만 하는 행위는 아닌 것 같아.



사회생활에서도 마찬가지야.

모두가 다른 가치관, 이해관계, 성격을 갖고 있지.


그런데 만약 그 모두가 각자가 갖고 있는 가치관, 이해관계, 성격을 아주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만을 미덕으로 여긴다면 어떻게 될까? 그 사회가 진실한 사회가 되는 걸까?

엄마는 언제나 진실이 최선은 아니라고 생각해. 언제나 진심이 정답도 아니라고 생각해.


공적인 삶에는 일정한 ‘가면’이 필요하다.
우리는 사적 자아와 공적 자아를 모두 가지고 있다(주 2)


엄마 회사 이야기를 들어볼래?

김 팀장님은 솔직함의 대명사였지. 어찌나 솔직하고 투명한지 그 사람의 기분과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어. 소위 ‘필터’라는 게 없는 분이었어.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업의 담당자에게만 힘을 실어 줬고,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업의 담당자는 소외시켰지. 그가 예민하고 화가 나는 날엔 팀원들 모두가 예민하고 화가 나야 했고, 그가 기분이 좋은 날은 팀원들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렸지.


반면 이 팀장님은 가식적인 능구렁이였어. 국회에만 안 나갔다 뿐이지 정치인과 다름없었지. 윗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고, 아랫사람에게도 좋은 리더인 척 잘 맞춰줬어. 실제로는 윗사람에게 하는 보고가 진실이 아닌 적도 많았고, 팀원들이 하는 소리를 귀로 듣다 뿐이지 실제로 들어준 적도 거의 없었거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장점을 찾자면 바로 그런 그의 ‘가식’이라는 거야. 적어도 그 가식을 유지하려는 그의 노력이 그를 성급히 화나지 않게 했고, 쓴소리를 돌려하게 만들었고, 윗사람과 아랫사람 모두에게 친한 척 안부를 묻는 습관을 들이게 해 줬지. 그러니 그의 결과적인 행동만 두고 보면 사회생활에 결코 마이너스가 되지 않는 플러스적인 요소가 된 거야. 물론 같이 일하는 팀원들은 대부분 그가 가식적이란 걸 알아. 사실 팀원들도 관심도 없어 그의 본심 따위는. 그저 나에게 대하는 태도와 예의 등이 중요할 뿐이지. 바로 그게 그의 ‘가식’을 통해서 가능했지. 팀원들도 속으론 그 팀장을 존경하지 않더라도 겉으로는 최소한의 예의를 보이게 되는 거지. 서로의 가식이 탄로 나지 않도록. 그 팀은 겉으로 보기에 아주 잘 굴러갔지. 평가에서도 이례적으로 우수한 팀으로 인정받았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할 때는 일정한 ‘거리’라는 게 필요하거든?

각자가 불편하지 않되 공간을 보장해 주되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은 유지할 수 있는 적정한 거리. 엄마는 그 거리를 유지시켜 주는 게 ‘가식’이라고 생각해.

그 거리가 유지되어야만 팀장과 팀원, 팀원과 팀원 사이에 최소한의 예의가 차려지거든.


바로 가식이 그 적정한 거리를 이어주는 ‘가교(架橋)’가 되어주는 거지. 가식의 첫 번째 기능인 ‘가교’가 타인과의 긍정적 관계성에 주목했다면, 이번엔 자기 자신과의 관계로 눈을 돌려볼까?


자기 자신과의 가식인, 가약에 대해

다음 편지로 이야기해 보자.


주 1 : 라 로슈푸코, 잠언과 성찰, 2010

주 2 :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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