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야, 오늘도 안녕하지?
지난번에 엄마가 편지에서 말한 '너의 가식을 응원해'에서 진정 응원을 얻었니?
그 응원이 부디 너의 안녕에 보탬이 됐길 바란다.
오늘은 너를 한번 더 응원해보려 해.
우리가 무의식 적으로, 혹은 빈말이라며 하는 말 있잖아.
“굿모닝, 좋은 아침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이게 정말 항상 진심이니? 솔직히 아니잖아.
마음에 없는 말일 때가 많거든. 그럼 그건 가식이지.
근데 이 가식은 사회생활에서 어느 정도 필요로 하는 의식이야.
예를 들어 아무 마음이 없으니 거짓말을 하느니 말을 하지 않겠다며, 아무 말도 없이 출근하고 퇴근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봐.
‘저 사람은 참 있는 그대로 솔직한 사람이군’ 하고 생각할까?
혹은 내가 싫어하는 저 사람이 주말에 아주 골머리나 썩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한들,
“수고하셨습니다. 주말에는 수고 좀 더 하세요!” 하고 퇴근인사를 한다면?
그 사람은 듣는 이에게 불쾌감만 주겠지.
영화배우 유해진 님이 이런 말을 했어.
“굿모닝이라서 굿모닝 하는 게 아니고, 굿모닝 하다 보니 굿모닝이 되더라”
가식적으로나마 내가 뱉은 말도 나의 노력이라는 거야.
엄마가 하루는 엘리베이터에서 선배 과장을 만나서 “안녕하세요?”라고 했지.
그 선배가 뭐라고 했는지 아니? “안녕 못해, 정 과장”
엄마는 더 이상 이어갈 말을 찾지 못했어. 그런데 이게 한 두 번이 아니었지.
그 선배과장은 항상 “안녕 못해”를 달고 살았거든. 그리고 그는 회사 내 기피하는 동료 1위가 됐어.
매일 한숨을 쉬었고, 매일 힘들어 못 해 먹겠다고 말했고, 가끔은 혼잣말로 욕도 했거든.
아주 날것 그대로 솔직한 사람이었지. 그는 하는 일마다 실수를 했고, 소위 펑크를 냈어.
이 팀, 저 팀 모두가 받지 않으려는 직원이 됐지.
한숨 쉬고 욕하는 솔직함의 대가는 한숨 쉬고 욕 나올 상황으로 되돌아왔어.
가식에는 무서운 힘이 있어. 정말 그렇게 되어버린다는 힘.
가식도 ‘말’이고 ‘행동’이잖아.
본심과 다르더라도 내가 뱉은 말이고 내가 하는 행동이니까 그 주체는 바로 ‘진짜 나’야.
그러니 한번 가식을 떨어보는 거야. 짐짓 그런 척, 연기해 보는 거지.
대신할 거면, 제대로 해야 돼. 남은 물론 스로도 속일 만큼.
내가 어젯밤 부부싸움을 했어도 다음날 출근길에 죽상하고 있는 대신 입 꼬리를 올리고 가식 떨어보는 거지. “좋은 아침이네요! 굿모닝입니다!”
내가 저 팀장, 저 과장이 꼴도 보기 싫어도 청룡영화상에 노미네이트 되는 명배우가 되어 보는 거야.
“어머~ 안녕하세요! 과장님, 안녕 좀 해주세요!”
가식을 떠는 내 입 꼬리, 연기하는 나의 하이 톤의 목소리. 그 순간 나는 안녕한 사람이 된다?
상대방이 실제로 안녕하든가 말든가, 굿모닝이든 배드모닝이든 솔직히 상관없어.
우선 내가 안녕한 게 중요한 거거든.
어때? 가식의 자아실현성! 꽤 괜찮은 기능 아니니?
“나는 괜찮아” “나는 용기가 있어”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아” “나는 꿈을 꾸는 사람이야”라는 셀프 가스라이팅도 마찬가지야.
설사 내가 지금 괜찮지 않고, 용기가 부족하고, 포기하고 싶고, 꿈을 잊어버린 사람이어도 그런 사람인척 하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 보는 거야.
그러면 10분 전보다 개미 똥만큼 진짜 괜찮아지는 거야.
내 안의 용기가 1그람이었는데 2그람쯤 채워지는 거지.
포기라는 말을 하루에 열 번쯤 하다가, 한두 번쯤 삼켜버리는 거야.
꿈은 잘 때나 꾸는 거지 생각하다가, 아이에게 “꿈을 잃지 마”라고 이야기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거야. 결국 “엄마도 꿈을 잊지 않을 거야 ”라고 내뱉어 버리는 거지.
그렇게 가식이 나에게 ‘가약(佳約)’이 되는 거지. 스스로에게 거는 가치 있는 약속.
처음엔 가식일 뿐이었던 약속이 가식을 이어가려는 진짜 노력을 통해 결국 진짜약속이 되는 마법!
누군가를 해하려는 마음이나 누군가를 속여서 남의 거를 뺏으려는 그런 마음이 아니라면 ‘가식’은 오히려 응원받을 ‘가치 있는 의식’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