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의 대화>
5살 봄을 지나면서, 남자애들 놀이와 여자애들 놀이가 생겨났습니다.
남자애들은 남자애들끼리, 여자애들은 여자애들끼리 놀기 시작한 거죠.
특히 여자애들은 남자애들을 잘 끼워주지 않습니다.
남자애들은 별생각 없이 여자애들과도 똑같이 놀려고 하는 게 보입니다.
그래서 남자애들이 없는 날은 5살 아들 녀석이 여자애들 사이에 끼려다가 울고불고
머리채 잡고 싸운 날도 있었더랬죠...
그러던 하루, 어린이집 친구들끼리 킥보드를 씽씽 타며 놀이터를 휘젓고 다녔습니다.
남자애들 킥보드 속도는 꽤 빠르고 반경도 넓어 애초에 따라잡기는 불가능입니다.
남자애들이 킥보드를 타고 종횡무진하는 중 같은 반 여자친구도 그 뒤를 따라 용맹하게 뛰어갑니다.
자주 놀이터에서 본 얼굴은 아닌데, 그날 엄마가 일찍 퇴근하고 놀이터 나들이를 왔나 봅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서 고함 소리가 들려옵니다.
“야!!!!!!!!!!!”
아마도 여자애의 엄마인 듯합니다.
아마도 엄마의 반경을 벗어나 멀리까지 뛰어갔다 온 탓인 듯합니다.
오랜만에 궁둥팡팡을 목격했습니다.
생각보다 화가 많이 난 듯 보였습니다.
저는 속 타는 엄마마음에 이입해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었습니다.
이럴 때 엄마들끼리는 못 본 척해주는 게 인지상정.
그런데 그 모습을 본 두 녀석들이 그 옆에 가 한 마디씩 거듭니다.
“왜 그래요? 소영이 왜 울어요? 왜 혼나요?”
눈치 없는 아들 녀석들을 보며 빨리 이리 오라며 엄마들은 손짓합니다.
집에 가는 길, 아이가 한마디 합니다.
“소영이 엄마가 무서운가 봐.
막 때리고 소리 지르고.
근데 소영이도 나한테 그랬어 어린이집에서.
엄마가 나빠서 걔도 나쁜 건가 봐.”
눈이 번쩍, 귀가 번쩍입니다.
엄마를 변호해 줘야 하나, 아이를 변호해 줘야 하나, 아니면 둘 다 아니라고 말해줘야 하나.
답을 모를 땐 다시 질문하는 게 상책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소영이 엄마가 소영이 혼내서?”
“응. 똑같아. 소영이가 나한테 막 화내던 거랑.
내가 특별히 잘못한 것도 아닌데”
“아, 그렇구나. 소영이 엄마가 소영이 다칠까 봐 그런 건가 봐.
그래도 놀이터에서 궁둥팡팡 까지 한건 좀 무서웠지?”
“어린이집에서 영상 봤는데, 우는 건 나쁜 거 아니랬어. 근데 운다고 또 막 혼냈잖아”
“맞아... 우는 건 나쁜 건 아니지.”
언제 이렇게 컸을까요.
순간 제가 놀이터에서 아들에게 했던 말들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제가 한 말이 제 아이의 귀에만 닿진 않았겠지요.
다른 아이들의 귀에도 모두 닿았을 텐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가는 말 따윈 애초에 없었던 겁니다.
아이들이 사리분별을 못해서 어른들은 소리친다고 생각합니다.
다칠까 봐 소리치고, 싸울까 봐 소리치고, 다 잘되라고 소리친다고요.
소리친다고 다치지 않고, 싸우지 않고, 잘되리란 보장도 없으면서요.
사리분별은 아이들이 아니고 어른들이 못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사리분별. 일의 이치를 구별하여 기르는 일.
다치는 게 싫어서 뛰지 못하게 하고,
싸우는 게 싫어서 어울려 놀지 못하게 하고,
다 잘되라고 다 못하게 하고.
어떤 게 이치에 맞는 일일까요.
설사 이치에 맞다 해도 이치보다 감정이 앞서는 순간 분별력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맙니다.
놀이터에서 가장 감정적인 사람은 아이들이 아니라, 사실 어른들입니다.
놀이터는 정말 무서운 배움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