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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르멘 Dec 05. 2023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지 마세요

나는 선택적 생존자

올해로 39살, 사회생활 14년차가 됐다. 


얼마전 친한 회사동료가 

"과장님은 회사 스트레스 별로 없으시죠?" 라고 물었다. 


(티나나?)


"네, 물론 있을 때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별로 없네요?" 


그렇다. 

누군가에겐 아니꼬운(?) 소리일수도 있겠다만, 

현재 롸잇나우 나의 회사생활 스트레스는 크게 없다. 

아이를 낳은 이후로는 집에서의 육아생활보다는 오히려 쉽다고 느껴질 정도. 


후배가 요새 회사 스트레스가 많다는 걸 알고 있었고, 상황도 그럴만 하긴 했다. 

유독 일이 몰렸고, 해외출장도 잦았다.


그후배도 워킹맘이었는데 조부모님 도움을 받고 있는터라 유지가 되는 삶이었다. 


그런데 후배가 최근 들어 "나한테 왜그러는지 모르겠어요"라는 말을 자주 했다. 

상사가, 회사가, 왜 나를 못살게 굴고 나한테만 일을 시키는지 모르겠다는 말. 


누구나 업무가 가중되고 그상황에 갇혀버리면 이런 생각을 하기 쉽다. 

"왜 나한테만, 왜 나한테 그래?" 


나는 그말이 좀 안타까웠다. 

그래서 미안하지만 냉정한 말을 해주고 싶었다.  


"지금 피해자 코스프레 하는거 알죠? 

스스로를 피해자로 만들지 말아요. 그거 끝없는 구렁텅이에요"


후배는 다행히도 성숙한 성인이라 내말을 영양제로 삼았다. 

삐딱선을 타고 상처 받기 보단.. 


피해자의 사전적 정의는 해를 입은 당사자. 


스스로를 피해자로 생각하고 피해자로 만들면 세상 모두가 가해자가 된다. 

그럼 당연히 고립되고 우울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스스로를 피해자로 만드는건 본인이다. 


누구도 매일 야근을 종용하거나, 무조건적으로 일을 완벽하게 수행하라고 할수 없다. 

물론 상황적으로 어쩔수 없는 상황은 있다. 

그러나 그게 내정신을 갉아먹을만큼 잦아진다면 그때부턴 본인에게도 책임이 있다.


"이건 오늘 못하겠습니다" 

 "그건 제가 할수 있는 수준에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나를 지키는 정당한 말을 스스로 내뱉지 못한 책임. 


그래서 내시간과 내마음을 컨트롤 하지 못한 책임. 


1시간을 야근하든, 일주일 내내 야근하든 야근하는 주체는 나다. 

내가 맡은 일을 70점짜리로 하든, 100점짜리로 하든 일을 하는 주체는 나다. 

그점수 안의 생활과 점수 밖의 생활 중 무엇이 더 중요한지 선택하는 주체도 나다. 


모두 내가 선택하는 주체다. 


그렇게 생각하면 피해자의 덫에서 자유로워 진다. 

내가 선택한 거니까, 나를 위한 선택이니까 우울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어짜피 완벽한 상황 따윈 없다. 

외적인 환경에 내 안녕을 내던지면 나는 영원히 행복할 수 없다.


해외출장에서 돌아온 후배와 만났다. 


"선배님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맞아요. 사실 제가 피해자인척 했어요. 그냥 다 억울해서.

 근데 그게 저만 못살게 구는 거더라구요." 


나도 이런 경험이 없진 않다.

최근 나도 이런 유사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다. 


조부모 도움없이 아이를 키우면, 워킹맘의 일상은 아주 팽팽한 긴장감으로 유지된다. 

갑자기 아이가 아파서 등원을 못하거나, 내가 정시퇴근을 못하거나 하는 상황이 오면

지진경보가 울려댄다. 


그때부터 나도 피해자 코스프레 모드로 돌입한다.


"아니 왜 오늘? 

 아니 왜 나는 아무도 안 도와줘?

 (종국엔) 이망할놈의 대한민국 이러니 애를 안낳지!!!"


모두가 가해자가 된다. 

오늘도, 아무도, 대한민국도. 


하지만 눈치챘는가? 

이상황의 가해자는 실체가 없다.


오늘 아이가 아프지 말란 법 없고, 그냥 아픈 수많은 날들 중 하루일 뿐이다. 

365일 정시 퇴근하는 직장인이 있을리 없고, 오늘 내가 그런 직장인인 거다. 

아무도 안 도와주는 상황은 오늘내일 상황 아니고, 아이가 태어난 후로 쭈욱 그랬다. 

아니, 내아이를 키우는데 조부모 등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 자체를 나는 올바르다 생각 안해왔다.


그리고 어린이집 선생님들도 도와주는 누군가다. (너무나 감사한)

살림을 나보다 더 잘하고 아이에게 다정한 남편도 든든한 육동(육아동지)다. 

그러니 '아무도 안도와주는' 상황이란 말도 틀렸다. 


그래놓고 내가 코너에 몰리니 

그런 모든 상황 설명들을 무시하고 그냥 피해자인척 하는거다.

그게 쉬우니까. 


정신 차리고 보면 나는 피해자가 아니다.

나는 오히려 선택적 생존자다. 


나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버텨지는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 

친정부모님이 아프셔도, 시부모님이 일을 하시거나 편찮으셔도  

그와는 상관없이 어쨌든 독립적으로 유지되는 삶을 선택했다. 


비록 단축근무를 하면서 사회적 평가나 연봉에서 희생(?)이 있었지만 

나 스스로 선택한 옵션이니 괜찮다.


그보다는 내가 아이의 주양육자로서 지금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니까.

 

언젠가 이선택을 후회하는 순간이 있을수도 있다.

승진에서 밀린다든가, 퇴직금이 줄었다든가. 


그렇다 해도 하는수 없다. 

그래도 최악은 아니니까.

최악은,

내가 그때 내선택이 아니라 어쩔수 없이 상황에 몰려 혹은 누군가 때문에 

피해자로 산 삶일거다. 


물론 나도 가끔은 나와 다른 선택조건의 삶을 보면 

내가 피해자인듯한 느낌이 들때가 있다.


하지만 이내 "흥!"하고 무시한다. 


나는 나를 피해자로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여러가지 상황과 선택 속에서 

나를 위한, 나에 의한, 나의 선택으로 살아가고 있는 

선택적 생존자. 


나는 내주변에 사람들도 부디, 피해자가 아닌 선택적 생존자가 되길 바란다. 


안그래도 팍팍하고 고된 세상, 스스로를 피해자로 만드는 불쌍한 짓은 하지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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