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MH Nov 01. 2020

나의 동료들

어느 직업환경에서나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의 좋은 유대관계는 중요할 것이다. 특히나 유아원이나 방과 후 학교에서 동료들과의 좋은 호흡의 중요성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평온하고 아무 일도 없는 듯 보이는 바로 그 순간 어디선가 갑자기 사건 사고가 터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키워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대목일 것이다. 성격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나이도 다른 등 모든 면에서 다른 어린이들이 30여 명 모여 있는 곳이 어떨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늘 상상과 기대 이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같이 일하는 동료와 서로 믿고 의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동료들 간의 좋은 유대감을 위한 개인적인 노력도 중요하지만, 센터 차원에서도 여러 프로그램을 마련해서 서로의 유대감을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그 프로그램 중 기억에 남는 것이 하나 있다.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 교사들만 출근해서 한 한기 간의 프로그램을 논의하던 미팅 시간이었다. 원장 선생님께서 준비해 오신 프로그램이 있었다. 두 사람씩 짝을 이루어 한 사람의 눈을 가리고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의 손을 잡고 바깥 놀이터 가장 먼 곳에 있는 물건을 집어 돌아오는 것이었다. 


우리의 바깥 놀이터는 넓기도 넓었지만 경사가 져 있었고 많은 꽃과 나무 그리고 여러 놀이기구들로 가득한 곳이어서 눈을 감고 누군가에게 온전히 의지해서 내려간다는 것이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내가 눈을 가리고 나이가 조금 있는 한 교사가 나를 붙들고 야외 놀이터로 향했다. 처음에는 한 발짝 내딛는 것조차 어려웠다. 온몸의 근육들이 딱딱해지는 느낌이 들 만큼 긴장하게 되었다. 내 짝꿍은 어디로 얼마만큼 가야 하는지를 일러주기도 하고 앞에 무엇이 놓여있는지를 꼼꼼히 설명해주기도 하였지만 나는 그이의 팔을 붙들고 굳어져갔다. 하지만 어느 순간 아예 맘을 놓아버리고 될 대로 되라지, 넘어져 봤자 뭐, 하는 식으로 마음을 고쳐먹고 나자 짝꿍이 일러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그 소리와 그이의 팔에만 의지해서 무사히 야외 놀이터를 한 바퀴 돌아 나왔다. 


모두 그런 과정을 끝낸 후 서로의 느낌들을 이야기했다.  나는 내가 얼마나 내 짝꿍에게 의지하게 되었는지를 말했다. 모두들 이 새로운 경험을 놀라워했다. 우리는 그 한 학기를 또 그 이후에도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그 어렵다는 어린이 교사로서의 바쁜 날들을 보내야 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느끼고 있었다. 


조금은 유치하다고 생각되는 이런 활동들이 백 마디의 말보다 효과적일 때가 많다. 쓸데없는 걸 또 시키는구나라고 생각했지만 잠시 민망함을 참고 몸을 움직여보았더니 의외로 큰 것을 얻었던 경험이었다. 


내가 만난 동료들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보자.


교사 중 누군가 월차나 병가를 내거나 처리해야 할 일이 과다하게 많아 일손이 더 필요할 경우 임시 교사를 짧은 기간 요청한다. 한 번 오신 분이 우리와 손발이 척척 맞다 싶으면 다음번에도 같은 분으로 요청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우리의 일원인 것 같은 분들도 꽤 있었다. 


유아원이나 방과 후 학교 교사 아르바이트를 전문적으로 알선해주는 회사가 여럿 있었다. 우리가 선호하는 회사가 있기는 했지만, 갑작스럽게 일손이 필요한 경우 한 회사에서 사람을 구해줄 수 없으면 여러 다른 회사에 연락을 취하고는 초조하게 대답을 기다려야 하는 긴박한 경우가 연출되기도 했다. 


아르바이트 알선 회사를 이용할 경우 일할 분의 이력이라던가 ‘어린이들과 일할 수 있는 자격’ 등을 우리가 따로 심사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일손이 줄어든다. 교사를 소개하기 전 알선 회사에서 이력서도 받고 자격도 심사하고 인터뷰도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검증된 교사들을 섭외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 팀과의 호흡일 것이다. 언제 갑자기 일할 사람이 필요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일일이 광고를 내고, 사람을 구하고, 자격을 심사하고, 인터뷰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알선 회사를 이용하는 것이다. 한 번 오신 분을 다음에 모실 때도 꼭 알선회사를 통해서 섭외를 해야 한다. 만약 한 번 오신 분과 장기적인 계약을 하고 싶을 경우에는 알선회사에 그 만한 소개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그 누구도 따로 물밑 거래를 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지만, 그럴 경우 소송에 휘말리게 됨은 자명하다.


그렇게 오신 분 들 중 아일랜드에서 온 배낭여행객이 있었다. 그분은 여러 번 우리 센터에 와 주셔서 친숙하게 되었는데,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들어오신 분이었다.  


그이는 아일랜드의 한적한 마을의 초등학교 교사라고 했다. 교원대학에 같이 입학한 여섯 명인가 일곱 명인가의 친구들이 같이 졸업하고 모두 다 같은 고향 마을에 발령을 받아 근무하다가 또 다 같이 배낭여행을 왔다는 것이다. 시드니로 오기 전 멜버른에서 아르바이트 선생님들을 하고 있었다고도 했다. 본다이라는 세계적인 해변 근처에 집을 하나 얻어 다 같이 밥해 먹고, 관광하고, 놀고, 그리고 아르바이트 자리가 나면 일하러 가는 식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생활을 상상해보았다. 작은 마을에서 같이 자라고, 같이 공부하고, 같은 업종에 종사하면서 그들은 어쩌면 친구라기보다 가족 같은 그룹 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아일랜드로 돌아가서 또 같은 마을의 학교에 근무하며 같이 늙어갈 것이다. 조그만 마을에 여섯 명의 선생님들이 한꺼번에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으니 그곳에도 사람을 구하느라 힘들었겠다는 생각도 잠시 했었다. 


나는 동료들과 가깝게 잘 지냈다. 운이 좋게도 좋은 사람들을 만난 탓이 클 것이었다. 

한 유아원에서 체코에서 오신 분과 일한 후 바로 다음 직장에는 슬로바키아인이 있었다. 두 사람의 이름도 헷갈릴 만큼 비슷했다. 그이가 슬로바키아인이라고 소개를 하는데도 나는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같은 나라 취급하면서 이야기를 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녀는 내 이야기를 귀담아들으면서 조용히 자신은 체코에서 온 것이 아니라 슬로바키아에서 왔다고 설명했다. 무지했던 나는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다르다고?라고 물어댔다. 그녀는 슬로바키아와 체코가 분리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슬로바키아와 체코가 분리된 지 그렇게도 오래되었는데 같은 나라 취급했으니 그녀는 상처를 입었을 것 같다. 

 

아주 오래전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데 나이가 많으신 할머니께서 말을 걸어오셨다. 어디서 왔냐고 물으시는 것이었다. 내가 코리아라고 했더니 모르셨다. 다시 사우스 코리아라고 했으나 또 모르셨다. 하는 수 없이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나라라고 손으로 지도를 그려가며 설명했으나 할머니는 곤란한 듯 모르겠다고 미안해한 적이 있다. 그 일은 1990년대 중반쯤 일어난 일이었다.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던 장소 바로 길 건너편에 커다란 현대차 매장이 있었다. 나는 그때의 속상함을 기억한다. 그러니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분리를 모른 나의 무지가 더 미안했다. 

 

나는 그녀가 어린 시절은 공산주의 국가였다가 나이가 들면서 공산주의를 탈피한 나라에서 어떤 심경의 변화를 겪었는지 궁금했다. 갑작스러운 많은 변화를 그녀는 어떻게 감당했을까 궁금했다. 나의 호기심에 그녀는 그리 시원한 답을 내지는 않았다. 그녀는 시골에 살고 있었고, 어린 시절이어서 그렇게 변화가 급변하다고는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자신의 할머니는 아마도 느끼는 것이 달랐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녀는 고향에서 박사를 받은 사람이었고, 자연주의자였다. 시간이 나면 배낭 하나를 메고 친구와 오지를 돌아다니곤 했다. 어느 때는 휴가를 몽땅 써서 한 달간이나 허허벌판을 다니면서 노지에서 자고 생활했던 적도 있다. 원주민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지혜를 배웠다고 말했다. 다시 도시로 돌아왔을 때 시멘트로 막힌 네모난 자신의 방에서 잠이 오지 않을 만큼 어색했다고도 했다. 나는 그녀가 느끼는 그 자연을 알지 못했지만 우리는 지구를 살리는 여러 방안에 대한 고민은 늘 같이 했고, 그러한 것을 프로그램에 반영하고자 노력했다. 


고국에 있는 가족 이야기도 우리의 대화에서 빠지지 않았는데, 그녀는 특히 할머니와의 추억 이야기를 나와 많이 나누었다. 어느 날 그 할머니께서 내게 보내신 선물이라면서 가지고 와서 나를 놀라게 했다. 하얀색 면으로 만든 가방 앞면에 면사로 레이스를 떠서 붙인 것이었다. 아주 얇은 면사로 뜨개질을 해서 만든 레이스는 하나의 작품이었다. 당시 그 할머니는 다리를 다치셔서 병원에 입원 중이시라기에 나는 한국적인 잔받침을 한글로 쓴 카드와 함께 선물했다. 얼마나 감사한지를 글로 표현하느라 열심히 썼지만 내 마음을 다 담지는 못했다. 내가 쓴 한글을 그녀에게 번역해주고, 그녀는 그것을 영어로 받아 쓴 후 다시 자신들의 언어로 또 번역해서 보내 드렸다. 얼굴도 보지 못한 인연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나는 팬케이크를 굽는 할머니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우리 방과 후 학교에는 정말 운이 좋게도 일주일에 한 번씩 팬케이크를 구워주는 할머니가 계셨다. 내가 근무하기 훨씬 전부터 매주 쉬지 않고 나오셔서 봉사를 해 주셨다고 한다. 연세가 70이라고 하셨지만, 한창 일 할 나이의 사람처럼 밝고 건강한 기운을 보이셨다. 팬케이크를 산더미처럼 쌓을 정도로 많이 구워 주셨고 아이들은 이 날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할머니 팬케이크가 맛있다고 특별한 비결이 있냐고 내가 물었다. 그러자 당신은 8살부터 음식을 해 오셔서 음식은 잘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할머니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할머니는 말레이시아 분이시다. 아주 가난한 집안의 많은 형제 중 장녀로 태어난 할머니는 겨우 8살의 나이에 남의 집살이를 시작하셨다고 한다.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입이라도 하나 덜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남의 집에서의 할머니 생활은 고단했다. 8살밖에 안된 아이가 음식도 해야 했고 여러 잡일도 해야 했었다. 자신의 생활도 곤궁할 텐데 동생들과 가족까지 돌보아야 했던 모양이었다. 자라서 결혼을 했지만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아서 남편과는 헤어지고 홀로 자식을 키워야 하는 또 다른 시련을 맞게 된다. 어렵게 어렵게 아들을 호주로 유학을 보낸 할머니는 하루에 3가지의 일을 하시면서 아들 뒷바라지를 하셨다고 한다. 3가지 일의 시작은 새벽 일찍 대사관을 청소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뒷바라지한 아들이 공부를 마치고 자리를 잡고 할머니를 시드니로 모셔온 것이었다. 

 

시드니에 오신 후 육십 평생 처음으로 학교라는 곳엘 가셨다고 한다. 이민자들을 위한 영어 코스였다. 할머니는 학교를 간다는 것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고 말하면서 조금 흥분하셨다. 왜 애들이 공부를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는 말도 덧붙이시면서 요즘 아이들은 너무 호사스럽다고도 했다. 할머니는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기뻐서 당연히 결석은 할 생각도 못하셨고 매일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셨던 모양이다. 그렇게 영어가 어느 정도 된 후 바로 자원봉사 활동을 시작하신 것이다. 우리 센터에서 팬케이크를 구워 주시는 것도 하시고, 치매 노인 요양원에서 치매 노인들의 친구 노릇도 하신다고 하셨다. 

 

치매 노인 요양원에는 특별히 돌보는 한 분이 있다고 하시면서 그분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할머니 말씀으로는 치매를 앓고 계시는 분이 항상 과거 이야기를 하면서 우울해하신다면서 과거만 생각하는 사람이 치매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확신에 차서 이야기하셨다. 그리고는 언제나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는 말로 끝을 맺으시는 것이었다. 

 

듣기만 해도 눈물이 날 만큼 지독한 할머니의 지난 삶을 할머니는 굳이 되새기며 한스러워하시지 않으시고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시는 것이었다. 할머니의 강인함과 나의 나약함이 늘 비교가 되었다. 

 

어느 날 할머니는 손수 뜨신 목도리라면서 내게 선물하신 적이 있다. 뜨개질도 잘하시네요라는 나의 칭찬과 감사의 말에 할머니는 요즘 유튜브에 보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말로 답해 주셨다. 일흔이 되신 분이 버스 타고 지하철로 갈아타면서 자원봉사를 다니시는 것도 모자라 유튜브로 모든 것을 배우시다니. 또 한 번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할머니는 투정 부리는 아이들, 음식을 앞에 놓고 깨작거리는 아이들을 늘 못마땅해하셨다. 내게 요즘 아이들은 어려움을 모르고, 아이들의 투정을 부모가 너무 받아준다고 불평하셨다. 나는 할머니가 느끼시는 것을 공감할 수 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한 학기가 끝나고 조촐한 음식으로 파티 아닌 파티를 할 때도 할머니께서 참석하셨다. 학부모들과 교사들이 서로 덕담도 나누고 감사의 인사도 하는 자리였다. 빈 말일지라도 교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학부모들이 할머니께 하는 감사의 인사는 박했다. 오직 한 학부모만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고 할머니는 나중에 내게 섭섭함을 드러내셨다. 나도 같이 섭섭했다. 

 

기회가 된다면 할머니의 이야기를 센터의 어린이들에게 전해주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어려움을 모르는 어린이들이 할머니의 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깨닫는 바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지만, 그들이 상상할 수 없는 힘든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급한 개인적 사정으로 시드니를 떠나오면서 실천하지는 못한 계획이 되고 말았다. 


모든 일에 애정을 가지고 임해야 하겠지만 유아교사야 말로 열정, 그리고 사명감이 없다면 감히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조금 게으른 것이 아닌가 싶게 느껴지던 한 동료교사에 대해 내가 놀라는 일이 발생한 적도 있다. 


 한 아이가 자신이 늘 가지고 다니는 인형에게 집을 만들어 준다고 종이 박스로 하루 종일 씨름했다. 내가 어떻게 만들 것인지를 물었을 때 종이 박스를 여기저기 가리키며 무엇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의 머릿속에 든 그것을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 아이는 더 이상 나에게 설명하는 것을 포기하고 단계별로 도움이 필요한 것을 요구했다. 가위를 들고 종이박스를 자르다가 나를 쳐다보는 식이었다.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거의 하루 종일 매달려서 뭔가가 완성되기는 했다. 그 아이는 매우 만족한 얼굴이었지만 집이라기보다 그냥 박스를 자르고 그 안에 종이와 천을 구겨 넣은 정도였다. 자신의 작품을 한참 쳐다보다 뚫린 곳에 끈을 닫겠다고 했다. 마땅한 끈이 없어서 나는 그 애 옷에 있던 벨크로를 가리키며 다음 날 그걸 사 올 테니 그걸 붙이는 것은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아이는 너무 기뻐하면서 그 일을 내일로 미루었다.

 

나는 점심시간에 그 일을 이야기하면서 바쁜데 벨크로까지 사러 가야 할 판이라고 조금은 불평스러운 듯 이야기했더니 한 동료 교사가 열정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 열정이 식으면 이 일을 끝내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그렇게 말하는 교사가 달리 보였다. 늘 설렁설렁 일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이도 하루하루 치열하게 열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이는 사실 여행 코디네이터로 일하다가 유아 교사로 다시 공부한 사람이었다. 여행일도 재미있었지만 자신은 이 일이 즐겁다고 말한 적이 있다. 유아 교사는 힘든 직업이다. 같이 일한 사람들을 돌아보면 억지로 직업이니까 겨우 일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덧붙여 동료들로 부터 배운 아이들을 다루는 몇 가지 꿀팁도 소개하고자 한다.


처음 어린이 교사가 되어 출근했을 때, 같이 일하게 된 교사가 있었다. 그녀는 경험이 아주 풍부했고, 나는 열정만 가득한 초보였기에 그녀에게서 배운 것이 많았다. 

 

어떤 어린이는 떼를 쓰면서 울다가 토하는 경우가 있었다. 어디가 아파서 토하는 경우가 아니고 제 성질에 못 이겨서 그러거나 아니면 그렇게 해서 이목을 집중시키려는 것일 수도 있는 것 같았다. 처음 겪는 일이라 몹시 당황을 하자 그 교사는 태연하게 아이가 토할 것 같아 보이면 아이 자신의 손을 그 아이 입으로 갖다 대라고 일러주었다. 정말이지 아주 효과가 좋았다. 그 아이는 일부러 토하는 것이었기에 제 손에다 토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토하는 것이 통하지 않자 그다음은 물건을 집어던지기 시작한 것이 문제였지만 일단 토하는 것은 그렇게 해결이 되었다. 언제나 한 가지씩 한 가지씩 해결해야 하니까.

 

어린이들이 시간과 상황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고자 하는데 어른들이 들어줄 수 없는 상황일 때에는 아주 단호하게 거절해야 한다. 잠을 자야 하는 시간에 잠을 자지 않는 것은 그럴 수 있어도 자꾸 밖으로 나가겠다고 우기는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가 신발을 신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내가 ‘너는 아마도 신발을 신고 자려나 봐?’라고 했고, 이런 내 대응에 대해 동료에게 상의를 한 적이 있다. 그이 말로는 ‘아마도’라는 말속에는 그렇게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는 반승낙의 의미가 있는 것 같다면서 자신이라면 단호하게 ‘네가 밖에 나가려나 본데 지금은 밖에 나가는 시간이 아니어서 신발은 필요 없단다’라고 말했을 거라고 했다. 정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습관이 나에게는 필요했던 것이다. 
 

이전 23화 안전을 위한 훈련과 습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