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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 중간 어디쯤 Jun 12. 2021

밤 11시에 찾아온 사명

밤 9시~11시. 수요일. 벼르고 벼르다 주 1회 두 달여 동안 듣게 된 하브루타 수업, 마지막 시간이었다.

이 사진들을 보고 느낀 점을 이야기하고, 짝과 나누는 시간이었다.


제일 처음, 

우와~ 넓은 세상이구나!

자연은 역시 좋아

그러다,

그런데 저기 바다에 서 있는 사람, 대체 뭐 하는 거지?

혼자.. 무섭겠다..

저렇게 햇빛 드는 숲이라도 혼자 있으면 무서울 것 같아

저렇게 고요한 곳에서.. 나라면 아무 말이나 해볼지도 모르겠어.


누구 없어요?

아님 오늘 물고기 몇 마리 잡을까? 스스로 다독이는 말을 하려나.

저렇게 이쁜 꽃과 이슬도 같이 나눌 사람이 있으면 더 이쁘게 느껴질 듯해..


갑자기

오늘 병원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15살 앳된 소녀와 아버지

 년간 이어진 기약 없는 딸의 병원 생활에 지칠 법도 하지만 늘 활기차게, 장난기 어린 아버지의 목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지는 게 신기해서 오늘은 내가 먼저 물었다.


두 분 병실에는 항상 즐거운 대화가 오가는 것 같아요.

늘 재밌는 일이 있었나 봐요?


참, 이게..

기관절개관을 하고 있는 소녀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입모양으로 대화한다. 성대마비와 호흡근 위약으로  목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아 나는 한 번도 소녀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왜 목소리들이 병실을 가득 채운 것 같이 느껴졌을까..? 심지어 그 말을 두 분께 할 때는 이 말이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버님이 말씀하셨다.

우리 원래 둘 다 엄청 과묵했어요~

얘가 심심하다고 하니..


15살

맞아.

사춘기 여중생과 아버지는 저런 대화 하는 거 못 봤어. 아마 과묵하셨단 말, 진심이실 거야.


해맑기까지 한 아버님의 목소리였는데.. 갑자기 내 질문 때문에 현실의 무거움이 덧입혀진 것이 느껴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서 괜히 다른 말을 둘러댔다.


보조기 사장님이요~ 내일 오시기로 하셨어요.

내일 잘 의논해봐요 우리.

오른쪽 눈은 이제 괜찮아졌네요~~ 다행이다..  

뭐 이런..

민망해서 둘러대는 그런 말들.


밤 11시 즈음.

다른 수강생 분들은 그림을 보며 아늑한 자연, 휴식을 주는 자연 - 이런 이야기들을 들려주시는데


나에게는.. 병원에서의 그 순간이 갑자기 떠올랐다.

적막과 고요 속에서 딸의 두 손을 놓지 않으려고 더 세게 부여잡으신 그 아버지의 아귀힘과 괜찮아, 괜찮아 다독 거려주시는 힘 있는 목소리가 느껴졌다.


평소에 그런 보호자분들께서 나에게

"잘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고개 숙여 인사하신다.

여태 자동으로 "네~ 잘 알겠습니다" 같이 인사하곤 했었는데 이제는 내가 별생각 없으면 안 될 것 같다.

'잘 부탁드립니다'라는 말의 엄청난 무게를  잘 몰랐거나 외면했던 것 같다. 왜 그랬을까..?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던 나를 다독여 본다.


저런 강한 분들께서 나에게 주시는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파도를 없애지는 못하지만

방파제는 같이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어디 있을지.. 좀 더 찾아보는 사람이 되리라 결심한다.


파도를 일으키는 바람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믿어보는 사람이 되어 보겠다.


그렇게

밤 11시에


사명이 생겼다. 나에게.

너무 무거운데 한편으로는 기쁘다. 이제서라도 제대로 갖게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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