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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외노자 정리 Mar 13. 2020

공공의 적, IELTS

목적이 이끄는 삶 (3): my case

이 이야기는 인터뷰의 형식을 따서 본인의 삶에 큰 변화를 주었던 2014년 말의 어느 시점부터 현재까지의 삶을 고찰하는 작은 이야기 입니다. 총 10편의 이야기가 준비되어 있고, 오늘 그 세 번째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3. 나의 적은 , 그러나 IELTS 공공의 



IELTS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네 그것은 영어권 사용 국가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을 영어권 사용 국가로의 진출을 조기에 '진압'하는 최소한의 진입장벽 entry barrier 입니다.

International English Language Testing System; IELTS


IELTS를 논하기 전에 먼저 2009년의 흑석동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때는 2009년 2학기가 끝나고 '장학금'이 확정 된 시점, 추운 겨울이었으나 마음만은 포근했던 이유는 ('전장' 전학기 장학생은 아니더라도)  2010년 1학기 장학금의 수혜자로 확정되었기 떄문입니다. 부분 장학금이라 35%의 1학기 등록금이 면제되었습니다.


여기 저기에 사용된 나의 장학금 명세서

2010년 1학기는 저에게 큰 의미가 있던 학기였습니다.

첫째, 가을학기 졸업생으로 (2010년 가을) 취업의 문이 봄 학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좁았다는 것.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업'과 '유학'을 동시에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10년과도 같았던 그렇게 정신이 없었던 한 학기가 10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단 한줄로 요약됩니다.


무엇을 어떻게 할지 어떻게 할지 몰라서 갈팡질팡 하던 때



그 당시에 저는 ‘독일로’ 유학이 가고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서울까지 이미 '유학'을 보낸 부모님께 또 손을 벌리며 '유학가겠습니다.'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저의 유학 동기는 '공학적 감각으로 자동차의 디자인에 참여, 공학적으로 유의미한 디자인을 창출'해 내겠다'였지요. [1] '무엇'이 저에게는 나름 확실했었으나 그것을 '어떻게' 진행할지는 서툴렀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이 유학동기만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반면 그것을 진행하기 위해 독일의 작은 지방에 있는 '산업공학'으로 유명(하다고 생각한) Essligen University에 지원했습니다. 나름대로 독일 대학 순위라던지, 국제적 명성등을 살펴보긴 했지만 해당 학과의 국제학생들의 '등록금'은 1학기 50만원, 총 4학기 200만원으로 정말 매력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지원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첫째, TOEFL 성적이 2점 미달이었구요.[2] 

둘째, 산업공학으로 유명한 학과 답게 '직무경력' - 최소 1년 - 을 요구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유학에 실패하고, 취업을 하게 됩니다. 가장 돈을 많이주는 '건설회사'에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기적적으로’ 합격하여 예상치 못한 고난의 시간들을 겪고 난 이후, 다시 2015년의 제 앞에 IELTS라는 것이 펼쳐졌습니다.


일단 TOEFL을 한번 실패했던 저였기에, IELTS는 더욱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IELTS는 TOEFL보다 훨씬 '쉽다'라는 네티즌들의 의견들이 인터넷상에 많았기에 '쉽게'생각했고, 결과적으로 IELTS에 100만원 이상 돈을 쏟아부었습니다. (총 시험 5회)


첫번째 시험은 '나의 실력을 점검해 보자'라는 취지로 치루었는데 (당연히?) 학교에서 요구하는 Overall 6.5, each 6.0 이상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진리의 첫 시험, 이때만 해도 speaking/writing이 그렇게 애먹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작업복을 입고 시험을 치르러 갔습니다. 금요일 오전까지 근무를 하고 (아부다비는 금요일이 토요일입니다.) 열심히 차를 타고 달려가서 시험을 쳤으나 그 결과는 낙방이었습니다.


그 이후 그는 아부다비 주재 영국 문화원 British council 에서 주관하는 IELTS 속성반 (저녁 7-9:30)에 등록해서 2개월간 (6.5일/주) 근무 환경 속에서도 주경야독 했다고 합니다. 낮에는 석유 생산을 위한 건설에, 밤에는 그의 미래를 건설하기 위한 공부에 힘을 썼으니 현대판 주경야독이지요.
(하략)
- 그 남자의 공부법: chapter 2.3 -


이렇게 열심히 공부를 했고, 3번의 시험을 더 치르렀으나 극심환 근무환경과 스트레스, 그리고 잦은 출장 (국내/해외-Etihad airline silver를 2개월만에 성취)으로 피폐한 환경 탓인지, 아니면 제가 시험에 원래 쥐약이라 그런지, 아부다비에서 치른 4번의 시험은 그놈의 말하기 speaking 으로 인해서 좌절되었습니다. 읽기, 듣기, 쓰기는 정말 문제 없었는데 왜 ‘말하기’가 문제였을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단 두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내 영어 말하기에는 ‘부산 사투리’의 강세가 있고

내 영어 말하기에는 ‘건설’에 그 기반을 한다.


악센트로 인해 제 영어의 발음은 듣는 사람에게 혼동을 주었고,

제 영어 말하기의 근본적 시작이 건설업과 같이 하니 ‘비지니스’적인 영어에’만’ 소통이 원할했던 것입니다.

즉, ‘생활영어’ 혹은 ‘학문적영어’에서 요구하는 스킬들이 전혀 부재한, ‘생존 영어’라고 봐야겠습니다.


굵직굵직한 계약분쟁을 제 입으로 논하고, 해결하였으나 그것이 IELTS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제 직무능력과 경험에는 큰 도움이 되었지만 특별한 목적이 있는 ‘시험’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래된 격언일지 모르겠습니다.


시험 준비는 평소에 하라



하지만 이 격언은 바뀌어야 합니다.


시험 준비는 시험 준비로 하라.


평소에 준비한 것이 시험 준비였다면 시험은 누워서 떡먹기 a piece of cake 이겠습니다만, 당신의 평소 실력이 시험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통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시험을 준비한다면 그 시험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확실히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나서야 당신의 시험 준비는 평소에 될 수 있습니다.




2017년 11월

한국에 복귀하여 치른 첫 시험이 저의 (아마 인생에서의) 마지막 IELTS가 되었습니다. 상기 서술한 중요한 요소들을 깨닫는데 10개월의 시간(2017.01월 아부다비의 첫시험 대비)과 150만원이 넘는 돈이 소모되었습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찾아오는지는 역사를 경험한 역사가의 눈을 빌어 우리는 경험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경험한 그것이 여러분의 경험이 되기를 기대하며, 오늘 인터뷰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다음 이야기, Master of Science, 그리고 Ph.D  이어집니다.





[1]

산업 디자인과 학생이 봤을 때는 '초보적 수준'의 디자인일지 모르겠지만, 저는 참 열심히 했었습니다. 면접보랴, 전공 시험 보랴, 자기소개서 쓰랴, TOEFL 공부하랴 정신없는 와중에서도 저는 Sor-A라는 디자인을 창출하여 '한국 대학생 자동차 디자인 공모전'에도 나갔습니다.


입상했을까요?





[2]

TOEFL을 3개월 정도 열심히 준비했던 것 같습니다. 5월 부터 7월 까지 더운 여름 학원도 등록해서 열심히 다녔지만 TOEFL은 저에게 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습니다. 2점이 "Reading"에서 부족했는데 그 부분을 해당 학교에 TOEIC 성적 (Reading/Writing)을 제출하며 생떼를 부렸습니다.

놀라운 것은 '인정 해 주겠다.' 였구요. 그렇게 어학 성적을 인정받아 열심히 지원서를 쓰고, 교수님들께 추천서를 받아서 송부한 결과가 '참담'했다는 것이지요.


A+을 득한 전공과목의 교수님들과의 질의 응답입니다. (순서는 다르지만 대부분 동일합니다.)


교수님: 그래 학생. 어디 학교에 무슨 과를 지원하겠다고?

저: 네 교수님, Esslingen University의 산업공학과를 지원하려 합니다. 제 동기는...


교수님: 무슨 대학?

저: Esslingen...


교수님: ??? 거기가 독일 대학인가???

저: 네 교수님. 산업공학 부분에선 나름 유ㅁ......


교수님: 아 알았네. 나는 아헨이나 베를린을 생각했네만.

저: 아 그런 전통적인 공학이 아닌 제가 하려는 것은 자동차디자...


교수님: 알았네 알았어. 드래프트를 써서 조교에게 맡기게나.

저: 네.




...




교수님 전상서,



잘 지내시지요 교수님.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독일이 아닌 영국에 있답니다.

그때의 교수님 반응은 아직도 생생한데 그래서 더욱 더 기억에 남습니다.


미숙했던 저와 완숙했던 교수님의 대치된 반응에도 무덤덤하게 제 길을 정진했던 2010년의 저를 아직도 저는 응원한답니다. 그때의 제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것이니까요.



한국도 그리고 영국도 코로나 바이러스로 시끄럽습니다.

아무쪼록 몸 건강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2020년의 제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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