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호, 첫 번째 두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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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대하여」
(1) 니체의 말
어느 날 어떤 학생이 나를 찾아와서 진지한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은 뭣 때문에 인생을 살아가십니까?’
그 질문은 바로 내가 20여 년 전에 여러 스승과 선배들에게 던지던 질문이다. 정말 우리는 뭣 때문에 인생을 살아가는 것일까.
이것은 인생의 근본 문제에 속하는 질문이다. 톨스토이는 이 문제를 가지고 일생을 고민했다. 그의 82년의 긴 생애는 이 문제를 탐구하기 위한 진지한 악전고투의 기록이요, 정신의 시종일관한 사상 편력의 발자취였다. 그의 「인생론」도 「우리는 뭣을 해야 하는가」란 책도 「나의 참회」란 저술도 모두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쓴 독실한 인생 탐구의 도큐먼트였다. 우리는 톨스토이와 같은 진지한 인생 탐구의 사색인들을 수없이 들 수 있다.
생각하는 갈대의 파스칼은 그 두드러진 예라고 하겠다. 대지의 생에 충실하라고 외친 니체. 홀로 신 앞에서는 실존을 강조하는 키에르케고오르. 「수상록」의 저자 몽테뉴. 위대한 사랑의 장전을 우리에게 남겨 놓은 사도 바울. 어떤 이는 철학의 입장에서 생각했고, 어떤 이는 종교의 눈으로 보았고, 어떤 이는 문학적 관점에서 탐구했다. 그들이 인생을 보는 입장과 각도는 진지한 태도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인생론이 우리에게 생생하게 어필되는 것은 그 진지성과 성실성 때문이다. 거짓이 없기 때문이다. 인생의 참에 서서 인생의 참을 찾으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참은 참을 부르고, 성실은 성실에 통한다. 거짓에서 나는 말은 우리에게 힘을 줄 수 없으며, 불성실에서 발한 로고스는 인생의 생명적 진리가 될 수 없다. 남을 움직이려거든 먼저 나부터 움직여야 하고, 남을 감격시키려거든 내가 먼저 감격을 해야 하는 것이다.
니체의 말이 생각난다.
그는 신을 부정한 무신론자였지만 누구보다도 경건한 사람이었다. ‘나는 모든 책 중에서 오직 저자가 피로 쓴 책만을 사랑한다. 피로써 써라. 그러면 피가 정신이라는 것을 너는 깨닫게 될 것이다.’
피란 말을 참이란 말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성실이란 말로 옮겨 놓아도 좋을 게다. 감격이라고 해도 좋고 정열이라고 해도 괜찮다.
붓대를 잡고 글을 쓰는 사람은 니체의 잠언을 뼈에 새겨야 할 것이다. 한국에는 읽을 만한 글이 없고, 볼 만한 책이 적다는 이야기를 가끔 듣는다. 물론 거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게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원인은 피로 쓰는 필자가 적기 때문이다. 자기의 생명을 조각하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면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지 아니할 까닭이 없다.
한 자 한 자에 피의 맥박이 스며 있고, 한 줄 한 줄에 성실의 정신이 배어 있다면, 생명의 문자가 아니 될 까닭이 없고, 읽어서 피와 살이 아니 될 리가 만무하다.
피는 피에 호응하고 성실은 성실에 감동한다. 내 혼이 울면 네 혼도 우는 것이요. 내 생명이 춤추면 네 생명도 춤추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성이요. 인간성의 깊은 진리다. 니체의 말은 비단 글 쓰는 일에만 한한 것이 아니다.
교육에도 해당하고, 정치에도 적응되고, 종교에도 통하는 진리다. 사람과 사람과의 대인 관계의 기본질서에다가 니체의 피의 정신을 적용한다면 그대로 산 진리가 될 것이다.
피로써 젊은 생명을 가르쳐 보라. 피로써 나랏일을 다스려보라. 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외쳐 보라. 학교에는 빛이 솟고 사회에는 보람이 가득 차고 사회에는 생명이 넘쳐흐르리라.
(2) 생각하는 갈대
우리는 정말 뭣 때문에 인생을 살아가는 것일까. 칸트가 이 질문을 던졌고, 소크라테스가 이 질문을 발했다. 아마 누구나 일생에 몇 번쯤은 마음의 옷깃을 가다듬고 진지한 정신으로 자기 인생에 대해서 이러한 질문을 던질 것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이러한 질문을 던지게 되는 계기와 형편은 각각 다르다. 사랑하는 자식의 애통한 죽음을 당해서, 또는 자기 인생의 온 정열을 기울이던 사업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또는 애인이나 절친한 친구에게 배신행위를 당한 경우에, 또는 불의의 중병으로 생명이 사생의 고비를 방황하는 경험을 하였을 때, 그렇지 않으면 인생에 관한 깊은 철학적 사색에 골몰했을 순간에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우리는 모두 살아야 한다. 이것은 생의 기본 명제다. 그러나 인간은 살아갈 뿐만 아니라 살아가는데 대해서 사색을 가지는 존재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생에 관해서 진지한 사색을 한다.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기 때문에 동물이나 물건의 질서와 차원을 넘어선다. 사색은 지성의 특권이다. 지성인이란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자요, 살아가면서 생각하는 사람이다. 만일 지성인이 사색하기를 그만둔다면, 그는 스스로 지성인임을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색하지 않는 지성을 생각할 수 없다. 인간은 갈대처럼 약하다. 모진 바람 앞에 꺾이우기 쉽고 독스러운 질병 앞에 한없이 약하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힘을 가졌다. 생각하는 힘을 가졌기 때문에 인간은 위대할 수 있다.
인간의 높은 존엄과 품위는 생각하는 데 있다고 말한 파스칼의 말을 나는 순순히 인정하고 싶다. 우리는 인생에 관해서 옳게 생각하도록 힘쓰고 옳은 생각을 통해서 인생을 옳게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성찰 없는 생활은 살 가치가 없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대인은 깊이 사색하는 습관과 힘을 점점 잃어버리고 있다. 그것은 현대인의 생활이 너무 바쁘기 때문이요, 현대의 사회기구가 너무도 복잡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스콤의 거미줄에 얽혀서 살아가고 있다. 너무나 많은 지식의 중압 밑에서 신음해야 하고 조용히 생각하고 충분히 소화할 겨를 없이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밤낮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주위에는 다채로운 감각적 자극이 너무나 많다. 현대인은 인간의 말초신경에 간지러운 자극과 흥분만 일으켜주는 감각적 향락의 도가니 속에서 살아간다.
현대인은 생각하기 전에 먼저 느끼고 감각한다. 현대인은 이미 생각하는 갈대가 아니고 느끼는 갈대다. 지식은 많아도 지혜는 적다. 공연히 분주하기만 하고 조용한 한가의 시간이 드물다.
어지러운 경험의 혼돈은 있어도 정연한 생활의 양식은 부족하다. 현대인은 생각하는 갈대가 아니고 생각 아니하는 갈대요, 생각 못하는 갈대로 전락하고 있다. 현대인은 진지하게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다. 생명의 존중을 강조한 시바이쩌는 현대인의 병리를 다음과 같이 예리하게 진단했다.
‘현대인은 무사상이다. 현대인은 자기의 사상을 갖지 않는다. 그는 진리에 대한 감각도 잃어버리고 진리를 회구 하는 말도 상실하고 그저 무사 상인 채 취생몽사 하여 여러 가지 의견 사이를 이리저리 부동하고 있다.’
사색을 포기하는 것은 정신적 파산의 선고나 다름없다. 현대는 사색의 멸시와 사색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차 있다. 현대인은 매일매일의 허다한 지식에 압도되어 정신적 자신을 상실하고 새로운 지식을 자기의 것으로 소화하지 못한다. 시바이쩌의 말은 분명히 깊은 통찰과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현대인의 머리는 남의 사상으로 가득 차 있고, 그의 지식은 잡다하여 통일과 체계가 없다. 지식의 과잉과 지혜의 빈곤, 이것이 현대인의 불행한 정신적 상황이다. 그는 무사상의 비극 속에 있다. 현대인은 확고한 주체성이 없다.
지식과 지혜는 엄연히 다르다. 지식은 지혜의 한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지식이 많다고 곧 지혜가 많은 것은 아니다. 지혜란 인간의 지식과 감정과 의지가 하나의 아름다운 질서 속에 통일되고 종합되고 조화된 상태다. 지혜는 인생과 사물에 관한 올바른 판단력이다. 인간생활에 지도와 질서를 주는 것이 지혜다. 지혜는 곧 질서다. 우리는 잡다한 지식의 노예가 되지 말고 생활에 통일과 질서와 조화를 주는 지혜의 소유자가 되어야만 하겠다. 우리는 깊은 의미에서 생각하는 갈대가 되어야겠다. 인생에 관해서 옳게 생각할 줄 알고, 옳게 생각하는 것을 통해서 인생을 옳게 살아야 한다. 인간은 두 번 태어난다고 한다. 한 번은 존재하기 위해서 태어나고, 한 번은 생활하기 위해서 태어난다. 첫째 번의 탄생은 생물학적의 탄생이요, 둘째 번의 탄생은 정신적인 탄생이다. 그것은 깊은 자아의 자각과 탄생을 의미한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생각하고 살기 위한 탄생이다. 우리는 둘째 번의 탄생을 통해서 생각하는 갈대가 된다. 아니 생각하는 갈대가 될 때 우리는 제2의 탄생을 갖는 것이다.
인간의 높은 존엄과 품위를 간직하고 진정한 자아의 자각과 확립을 위하여 우리는 깊은 의미에서 생각하는 갈대가 되어야겠다.
(3) 운명애
우리는 뭣 때문에 인생을 살아가는 것일까. 우리는 저마다 이 세상에 내어 던져진 존재다. 이 불안한 시대에, 이 가혹한 사회에, 김 아무개의 몇째 아들로서 또는 몇째 딸로서 얼마만큼의 건강과 용모와 재주와 덕을 가지고 지금 여기에 내어 던져진 것이다. 그것은 내 뜻이 아니다. 나를 낳은 부모의 뜻도 아니다. 그것은 나나 내 부모의 자유로운 선택의 세계가 아니다. 내 뜻과 내 자유와 내 선택과는 아무 관계없이 어떤 불가항력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다.
이것은 나의 운명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작용할 여지가 없는 세계를 우리는 운명이라고 칭한다. 인간은 운명을 선택하는 자유가 없다. 운명은 내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좋건 싫건 받아야 하는 것이요,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희랍어에서는 운명의 신을 모이라(Moira)라고 한다. 모이라라는 말은 ‘몫’이라는 뜻이다. 운명은 각자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자기의 몫이다. 운명의 신은 어떤 이에게는 후한 몫을 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박한 몫을 준다. 내 몫이 남의 몫보다 적다고 또는 나쁘다고 불평할 수도 없다. 불평을 해도 소용이 없는 일이다. 각자가 받아야 하는 운명의 몫이 공평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의 몫을 순순히 받는 수밖에 없다. 자기의 몫을 살펴보고 좋은 것이 있으면 고맙게 생각할 일이요, 나쁜 것이 있으면 꿋꿋한 정신으로 참고 견디는 도리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기에 니체는 운명애(Amor Fati) 철학을 말했다. 자기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인간은 운명에 대해서 세 가지 태도를 취할 수 있다. 하나는 운명에 인종하는 태도요, 또 하나는 운명에 반역하고 운명을 이기려고 몸부림치는 태도다. 그러나 니체의 의하면 ‘나 즉 운명(Ego fatum)’이라고 생각하고 나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필연적인 것을 다만 견딜 뿐만 아니라, 더구나 감출 것이 아니라, 이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니체의 운명애다.
우리는 운명의 신에게서 저마다 자기의 몫을 받았다. 운명의 신이 우리를 이 역사적 현실 속에 내어 던진 것이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면, 피투성이다.
왜 역사의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나지 않고, 불안과 위기의 안개가 자욱한 이 세기에 태어났을까. 왜 살기 좋은 딴 나라를 버리고 하필 수난의 십자가를 짊어진 이 사회에 탄생했을까. 왜 바위나 나무로 태어나지 않고 인간으로 태어났을까. 왜 내 몫은 이만한 재주밖에 안되고 이만한 환경밖에 안되는가?
아무도 여기에 대답할 자가 없고, 아무도 이 문제에 책임을 질 자가 없다. 그것은 나의 운명이요, 내가 반드시 받아야 할 내 몫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사랑하는 데서부터 인생을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일은 자기의 생을 깊이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 일회적인 생을 받았다.
두 번 있을 수 없는 생이요, 남이 대신 우리의 생을 살아줄 수 없는 생이다. 내가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생이다. 내 책임과 내 판단과 내 계획하에 내가 살아가는 생이요, 내가 창조하고 내가 건설해 나아갈 생이다.
우리의 생은 이 지상에서 오직 한 번 밖에 없기 때문에 한없이 소중하고 끝없이 엄숙하다. 인생은 엄숙하다고 로망롤랑은 말했다. 사실 인생은 엄숙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태도로 이 엄숙한 생을 살아갈 것이다.
(4) 자아실현
우리는 뭣 때문에 인생을 살아가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지극히 간단명료하다.
‘나는 내 멋에 겨워서 살아간다. 모든 사람이 나의 제멋에 겨워서 사는 것이요, 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말은 다소의 설명과 단서가 필요하다. 사람은 저마다 제멋에 겨워서 살아간다. 나는 이 명제에 대해서 두 개의 단서를 붙이고 싶다. 하나는 ‘가장 깊은 의미에 있어서’라는 단서요, 또 하나는 ‘반사회적 반가 치적이 아닌 한도 내에서’라는 단서다.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간다. 민주주의 사회는 각 개인의 다양성과 개성의 자유를 뭣보다도 강조하고 옹호하는 사회다.
사람은 저마다 얼굴이 다르고 목소리가 다르듯이 사고방식이 다르고, 행동양식이 다르다. 사물을 보는 관점이 각각 다르고 일을 처리해 나아가는 처리방식이 또한 서로 다르다. 각자 취미가 다르고 인생관과 세계관이 십인십색이다.
자유사회는 각 개인의 다양성을 기본원리로 한다. 하나하나의 개인이 저마다 제소리를 지르고 제 빛깔을 지니고 저 다운 보람과 가치를 갖는다. 저마다 유니크한 개성들이다. 자유사회는 이러한 개인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의 철학, 하나의 인생관, 하나의 사고방식, 하나의 가치 기준, 하나의 신앙,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강요할 수 없다.
그것은 독재의 사회다. 민주주의 사회는 진실로 다의 세계요, 개성의 세계다. 모두 제멋에 겨워서 살아가는 사회다.
나는 내 노래를 부르고 너는 네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회다. 나는 내 소리를 지르고 너는 네 소리를 발할 수 있는 사회다. 혼돈 속에 질서가 있고 부조화 속에 조화가 있는 사회이다.
나는 내 멋에 겨워서 산다는 말을 철학적으로 표현한다면 각자가 자아를 실현한다는 것이다. 저마다 제 개성을 발휘하고 제 천분을 살린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자아를 실현케 하라. 이것이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원칙이요. 자유사회의 제1 원리다.
인간은 자기의 개성을 발휘하고 천분을 살릴 때 진정한 삶의 보람과 인생의 행복을 느낀다.
뻐꾸기는 뻐꾸기답게 노래할 때 행복하고, 참새는 참새답게 지저귈 때 행복하다. 우리는 참새한테 뻐꾸기같이 노래하기를 바랄 수 없듯이 뻐꾸기한테 참새처럼 지저귀기를 요구할 수 없다. 화가는 그림을 그릴 때 행복하고, 음악가는 노래를 부를 때 삶의 보람을 느낀다. 미켈란젤로는 망치를 들고 대리석으로 자기의 이미지를 조각할 때 인생의 행복을 느꼈고 에디슨은 연구실에 들어박혀서 새로운 발명에 심혈을 기울일 때 사는 보람을 가졌다. 인간은 이 세상에 내어 던져진 운명의 존재인 동시에 자기를 내어 던질 수 있는 자유의 존재다. 인간은 창조하는 자유, 건설하는 자유를 가진다.
자기의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는 것이 자유사회의 자유인이다.
나는 내 노래를 부르는 자유를 갖고 너는 네 소리를 지르는 자유를 지닌다. 사람에 따라서 재주의 우열이 있고, 그릇의 대소가 있음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저마다 저 다운 방식으로, 제멋에 겨워서 자기의 개성을 발휘하고 자기의 천분을 살릴 수 있는 자유와 기쁨과 보람을 가질 수 있다.
인생은 정성스러운 창조의 일터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의 생명을 조각하는 생의 예술가다. 모든 사람이 다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도 없고 또 필요도 없다. 우리는 저마다 천분과 개성을 가지고 성심껏 자기 인생을 조각하면 그만이다.
사람의 마음은 기름진 옥토와 같다.
좋은 씨를 뿌리면 좋은 꽃이 자라고 나쁜 씨를 뿌리면 나쁜 것이 자란다.
아무것도 안 뿌리고 내버려 두면 잡초만 우거진다.
좋은 열매를 거두려거든 좋은 씨를 뿌려야 하고 많이 거두려거든 많이 부려야 한다. 아무것도 심지 않은데 나는 법이 없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의 심전을 개발하는 원정이다. 정성스럽게 가꾸어서 풍성하고 아름다운 심전을 만드느냐 잡초 투성이의 빈약한 나태의 심전을 만드느냐, 그것은 원정의 정성과 노력에 달린 문제다. 우리는 저마다 아름다운 심전을 가꾸는 성실한 원정이 되고 싶다. 자유 사회의 자유인들은 모두 제멋에 겨워서 살아가는 자유와 기쁨과 보람을 누려야 한다.
저마다 제 개성을 발휘할 수 있고 제 천분을 살릴 수 있는 사회는 우리의 소원이다.
만인으로 하여금 각자의 자아를 실현케 하라.
가장 깊은 의미에 있어서 또 반사회적 반가 치적이 아닌 한도 내에서 모든 사람이 저마다 제 멋에 겨워서 살아가는 사회 이것이 우리가 원하는 사회요, 또 가장 행복한 사회다.
‘네 발 밑을 파라, 거기에 맑은 샘물이 솟으리라.’라고 괴테는 노래했다.
우리 발 밑에는 언제나 맑은 샘물이 쉼 없이 흐르고 있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의 맑은 샘을 찾아야 한다. 저마다 제 노래를 부르고 제 소리를 길러야 한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제 멋에 겨워서 살아야 한다.
다음 호 줄거리
이병주 님의 글 ‘여성에 대하여 (1984.)’의 전반부를 소개한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중국의 가정, 시골의 가정 그리고 담배와 술을 권해도 싫은 티 없이 받아들이는 여성, 그들을 바라보며 여성에 대해 사고한다.
그리고 여성의 성숙과정과 그 내면을 바라본다. 어떻게 성숙하느냐가 문제가 될 수 있음을 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