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에서 철학하기, 유진

9월호, 첫 번째 두드림

by 외노자 정리

이 글은 상식의 노크, 콕: 첫 번째 두드림의 '그 사이에 콕' 부분에 수록된 글입니다. 정식으로 콕COC과 저작권 계약이 되어 출판된 글이므로 무단 전재/수정/재배포는 저작권 법에 의해 처벌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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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에서 철학하기」


당신이 철학을 '해야 하는' 이유


숱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삶이 공허하다 느끼게 되고, 그 자기 연민의 언저리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 몸부림친다. 우리는 뚜렷한 목표와 가치 아래에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한 전사가 되지만, 그 고통을 감내해야 할 이유가 없으면 어떤 투쟁의 기회에도 맞서려 하지 않는 겁쟁이가 된다. 당신은 많은 경우에 실패를 무서워하기보다는, 그 실패가 의미 없는 시간 낭비가 되는 것을 무서워한다. 또한 고통을 두려워하기보다는, 그 고통이 의미 없는 자학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 날까 봐 두려워한다.

사람은 누구나 ‘가치 있는 목표’를 원한다. 자아를 실현하고, 타인과의 관계로 이루어진 이 세계에서 뜻깊은 영향을 끼치길 소망한다. 하여 자신의 삶에 뚜렷한 의미가 부여되기를 바란다. 일상의 잡다한 고뇌와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그렇지만 오늘날 많은 경우에, 이러한 시도는 실패로 귀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돈과 겉치레를 쫓는 첨단의 세태는 적어도 그의 추종자들이 기대했던 만큼의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보장해주지 못하고 있다. 많은 오락과 소비재는 즐거움을 약속하지만, 그것들은 향유하는 순간에 국한될 뿐, 근본적인 삶의 질을 높여주진 않는다.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이 이러한 풍조에 익숙해진 나머지, 앞서 열거한 일련의 것들이 주는 불분명한 효용에 만족하며 살려고 애쓴다는 것이다. 우리는 내적으로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것을 점차 포기하고 있다. 말하자면 인생의 부차적인 것들에 집착하며 ‘사는 게 원래 그런 거지, 뭐’라는 식으로 타협하려고 한다.

21세기의 5분의 1 지점에 도달한 작금의 시대엔, 특정한 가치관이나 의견이 상대적인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다. 우리는 과거의 많은 철학자나 지식인들이 추구했던 바와는 다르게, ‘세상만사를 일관성 있게 설명하는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는 입장을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는 당신이 어떤 주장을 하게 될 때, 그것은 일반적으로 ‘경우에 따라 옳고 그름이 달라지는’ 의견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보나 의견의 가치가 상황 맥락에 의존하는 이러한 상대주의는 ‘이것이 무조건 옳다’고 주장하며 권력을 독점해왔던 세력의 종말을 가져왔다. 그리고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더 시끄러운 세상이 도래했다. 이제 사람들은 무슨 이슈가 생기면 신중하고 겸손한 태도로 지식인이나 전문가의 견해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먼저 한 마디 씩 거드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것만 같다.

이런 지경에 이르니 당신과 나의 세계는 마치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의 수렁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들에 점점 더 집착하고, 사랑이나 우정 같은 추상적 가치를 그러한 것들로 환산시키는데 열중한다. 돈이나 이익 따위의 것들로 말이다. 또한 자기 또는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목소리를 드높인다. 누구나 한 마디 씩 거드는 문화는 소외된 이웃에게도 공평한 기회를 제공할 것 같지만,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소음이 파도처럼 사회적 약자들을 잠식한다. 이러한 광경은 얼핏 뚜렷하고 명료하게 보이지만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도 분열되고 파편화되어 있다. 따라서 그 속에서 보다 가치 있는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허함을 느끼게 된다. 그들의 숱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지식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너무 많은 지식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인터넷에 몇 초만 검색해도 나오는 단편적인 정보의 나열이 아니라, 특정한 정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유로운 사유(思惟) 능력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유는 소박하게 ‘성의 있는 의식 활동’이라고 정의해도 무방하다. 예컨대 공원에 앉아 있는 노숙자를 보고 무의식적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지나칠 게 아니라, 나와 같은 한 인격체의 삶의 터전이 공공장소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제도상의 한계를 따져보는 것. 왜 그가 분명 스스로 원치 않았음이 분명함에도 극빈층의 삶을 영위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최소한의 숙고. 이성을 본인이 기존에 해왔던 대로, 그저 무비판적인 습관에 내맡기지 않고, 스스로 쥐고 휘두를 수 있는 적극성을 갖추는 것. 이런 것들이 단적으로 사유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도출된 사유의 결과가 단순히 머리에서 끝나지 않고 행동으로 이행될 때, 우리는 종종 그 낯선 길에서 가치 있는 투쟁에 대한 용기를 얻는다.

그러니 만약 당신이 삶에서 얻을 수 있는 내면의 충만함과 행복의 지속을 경험하고 싶다면, 삶에 불현듯 찾아오는 고통의 감내를 위한 힘의 단서를 찾고 싶다면, 무엇보다도 ‘나’와 이 세상에 특별한 의미를 남기고 싶다면, 철학을 ‘하는 것’을 추천한다. 철학을 하는 데는 어떤 전문적인 지식도 필요 없다. 즉, 철학자들이 무슨 사상을 전개했는지, 각각의 ism이나 ~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분할 필요 없다. 그러한 내용들은 보다 정밀한 사유에 도움이 될진 몰라도, 꼭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철학을 하는데 필요한 것은 오직 잠깐의 시간과 당신의 의지뿐이다. 만약 두 가지 모두 갖추어 철학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앞으로의 여정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의도한 바가 운이 좋게도 고스란히 전해질 수 있다면, 아마 당신은 가치 있는 삶의 의미를 스스로 ‘만들 수 있게’ 될 것이다. 다른 곳에서 찾을 필요 없이 말이다.


다음 호 줄거리, 「철학이 쥐여준 유용한 도구들」


뉴스, 미담, 다양한 견해, 왜 모두들 이렇게까지 다른 걸까?

당신의 일상 속 철학하기 ‘주관의 건전성’을 판별하기 위한 작은 도구 세 가지를 소개한다.

논리적 검토, 정당화된 주관 그리고 의견과 사실의 구분을 통해 지적 분별력을 기르고, 어린아이와 같이 ‘왜’라고 따져 묻는 습관에 대해 이야기한다.




유진


이성적 탐구와 논리적 사고를 좋아하는 철학도입니다.

철학이 가는 길을 뒤쫓는 게 아닌, 사람이 가는 길에 철학이 이바지하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런 세상 속에서 사람들이 스스로 인생의 의미를 만들어가길 바랍니다. 또한 가능하다면, 저의 글이 그러한 의미를 형성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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