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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 정 Feb 13. 2020

얼떨결에 버킷리스트, 안나푸르나를 걷다

 

‘진정한 여행의 발견이란 새로운 풍경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을 갖는 것이다.’

- 마르셀 프루스트     


먼저 낮 꿈을 꾸고      

 두 가지 꿈이 있다. 하나는 이루지 못한 억압된 욕망들이 말도 안 되는 비빔밥으로 나타나는 밤 꿈으로 대부분 개꿈이다. 한편, 낮에 꾸는 꿈은 다르다. 비록 지금은 ‘아직은...’ 이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고 싶은 소망이 담긴 꿈이다. 동네 뒷산인 봉서산에서 시작해 태조산, 성거산, 흑성산, 설화산, 광덕산.... 정도 산들을 주말에 짬짬이 오른 지 몇 년 되었다. 어쩌다 보니 설악과 한라산 정상도 한 번 올랐고, 3번의 도전 끝에 지리산 종주의 벅참도 경험했다. 지난해 봄, 한 모임에서 지인이 안나푸르나 자랑을 입에 침이 마르게 하는 것 들으며 ‘나도 언젠가는...’ 낮 꿈을 꾸기 시작했다.   10여 년 넘게 활동 중인 지역 합창단원들과 태조산을 걸으며 안나푸르나 트레킹이라는 인생 버킷리스트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 말이 씨가 되어 2020년 1월 설 연휴 휴가를 내고 안나푸르나를 만나게 될 줄이야! 덕분에 인생 교훈 하나 건졌다. ‘꼭 이루고픈 소망이 있다면, 먼저 낮 꿈을 꾼 후 말로 내어 놓을 것’       


일찍이 시작된 여행     

  3개월 전 여행사를 통해 항공권을 예매하고 네이버의 <네히트: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 카페에 가입해서 준비물, 주의사항 등을 챙겼다. 무엇보다 체력이 걱정인지라, 등산 초짜 수준인 멤버들과 주말마다 동네 산을 오르고, 매일 스쿼트 100개, 아파트 계단 오르기 등을 실천하고 톡방에 올리도록 독려했다. 학교 도서관에서 안나푸르나 트레킹 관련 수필집, 사진첩 등을 10여 권 빌려 돌려가며 읽었다. 이렇게 여행은 일찌감치 시작되었다.      


산 앞에 겸손할 것     

모두 들떠서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리무진 버스 안에서 갑작스러운 뉴스 속보를 접했다. 하필 충남 교육청 소속 교사들의 안타까운 눈사태 소식에 모두의 맘과 몸이 굳어 버렸다. 가족들로부터 오는 전화, 문자를 어찌어찌 응대하고 카트만두 직항 KAL기에 올랐다. 이번 여행의 목표는 ‘정상 도달’이 아니라 ‘안전’ 임을 다짐하며 마음 모아 기도했다.       


하루에 사계절

  카트만두에서 포카라까지는 쌍발 비행기로 이동하는데 날만 맑으면 히말라야의 산맥군이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장관을 이룬다. 갈 때는 우측, 올 때는 좌측 창가에 자리를 잡는 게 족보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의 전초 기지인 포카라는 위도상 마라도보다 적도에 가깝고 일본 오키나와와 비슷한 수준이다. 그래서인지 예상 밖으로 우리나라의 겨울보다 훨씬 따뜻하고 쾌적했다. 포카라에서 버스와 지프차로 트레킹의 시발점인 힐레(1,400m)로 이동하였다. 여기서부터 고도를 매일 조금씩 높여 가는데, 3,000 고지 전까지는 얇은 티셔츠에 가을 등산바지, 바람막이 정도면 충분했다. 최종 목표인 안나푸르나 ABC 베이스캠프까지는 3-4일이면 도착이 가능하지만, 우리 일정은 푼힐 전망대의 일출을 보고 돌아가는 코스로 다소 여유가 있었다. 이렇게 고도를 천천히 높이는 것이야말로 고산증 예방에 큰 도움이 된다. 25년 경력의 노련한 현지 가이드 왈, 고산증은 보통 4,000 고지 이상에서 발생한다고 하기에 나는 다이아목스, 비아그라 등 약을 복용하지 않았다. 3,000 고지 롯지에서 머리가 다소 무거운 듯하여 타이레놀 두 알만 삼켰다. 문제는 밤인데, 롯지라는 것이 매트리스와 베개, 이불 한 채가 전부고 난방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다. 여행사에서 제공한 오리털 침낭에 뜨거운 물 주머니를 미리 넣어 두고, 등에 핫팩 두 장을 붙였는데, 열이 많은 나는 자다가 너무 더워서 옷을 하나씩 벗어야 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기온은 떨어졌고, 일출을 보려면 새벽에 헤드랜턴을 착용하고 두툼한 겨울 패딩을 갖춰 입어야 했다. 그런데 바람도 한점 없고 일기가 너무 평온했다. 사방이 온통 눈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해만 나면 더워서 내려올 때는 두꺼운 옷을 모두 매달고 땀에 젖은 채 하산하였다. 1,000미터만 넘으면 칼바람에 귀가 떨어져 나가는 국내 산과는 달리, 너무 평온하고 따뜻한 겨울산을 경험했다. 이게 다 출발하는 비행기에서 올린 기도 덕분인가?

화장실이 밖에 있어서 불편했는데, 덕분에 새벽에 소변보러 나왔다가 하늘에 쏟아져 내리는 별무리를 보았다. 노트 9를 무작정 드리대었는데, 세상에나... 너무나 선명하게 북두칠성과 오리온이 담겨버렸다.

그야말로 ‘World Best Samsung!!’         

노트 9이 담아낸 오리온 자리

  

노트 9이 담아낸 북두칠성
정글 트레킹 중 구름 창문 사이로 보이는 안나프루나 남봉


호사다마?, 전화위복!     

  출발할 때 접한 사고 소식으로 ABC 베이스캠프로 가는 길이 통제되었다. 다행히 여행사 측에서 우회 루트를 신속하게 결정해 주었고 마르디히말 하이캠프라는 새로운 목적지가 정해졌다. 가이드 말이 안나푸르나보다 히말라야의 유명 산군들을 조망하기에는 하이캠프가 더 좋다는 말에 모두 신이 났다. 원래 4,130 고지에서 3,900 고지로 낮아져 트레킹 거리도 좀 줄어들었다. 모두 초보인 우리에게 딱 맞춤인 일정이 된 셈이다. 일정 변경 덕분으로 기막힌 히말라야 정글에 둘러 쌓인 야외 온천에서 몸을 푸는 호사도 누렸다.

  그런데, 어느 정도 체력이면 가능하냐고? 아마 가장 궁금한 점 일 것이다. 하루 트레킹 거리는 대략 7-15 km, 아침 8시 출발해 오전에 3-4시간 걷고 롯지에서 점심 먹고 다시 3-5시간 더 걷게 된다. 오르막도, 내리막도, 능선길도, 눈길도 있다. 만보계로는 하루 2만-3만 보 사이다. 한국에서 산 좀 탄 분이 보기엔 별것 아닐 것 같지만, 산소가 부족한 지역이라 만만히 보아서는 안된다. 욕심부리고 무리하면 숨이 급격히 차고 몸은 천근만근, 머리가 뻐근해지는 고산증이 찾아온다. 몸이 제대로 달아오르기 까지 평상시보다 절반쯤 천천히 걷는 게 요령이다. 일정 중 두 번의 장쾌한 일출은 평생 잊지 못할,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진 히말라야 산군이 황금빛으로 물드는 푼힐의 일출. 체력의 한계를 절감하며 숨 가쁘게 올라간 하이캠프에서 네팔인들이 신성시하는 마차푸차레 곁에 머문 새벽별과 초승달, 그리고 떠오르는 태양을 한 시야에 볼 줄이야. 더구나 그 날이 설날이었다!

‘감사하다’는 말 외엔 유구무언!         


물고기 꼬리, 신성한 마차푸차레의 일출(설날 아침 촬영)


푼힐서 울려 퍼진 하모니     

합창단 소속 산악회는 뭐가 좀 다른가? 당근! 쏟아지는 별을 보며 로이 킴의 ‘북두칠성’을, 그리고 푼힐의 일출을 보면서는 전인권의 ‘걱정 말아요 그대’를 4성부의 하모니로 노래했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산악인들이 아낌없는 박수를 쳐 주었고, 이후 오가는 여정에서 우릴 알아보고는 눈웃음과 함께 반갑게 인사를 건네주었다.

“나마스테”, “니하오”, “구텐 모르간” ...       


푼힐의 떠오르는 해를 향해, 날자 날자꾸나!


레알 올가닉, 치킨피자     

  트레킹 일정이 좀 일찍 끝난 날, 롯지 근처 마을을 둘러보았다. 근사한 전망의 레스토랑에 자리 잡고 메뉴를 보니 스파게티, 피자, 오믈렛, 각종 파이류, 맥주, 와인까지 갖추고 있었다. 맥주 몇 병과 치킨 피자, 애플파이를 주문했다. 그런데 잠시 후 레스토랑 마당에서 안주인이 토종닭을 잡아 털을 뽑는 게 아닌가. 설마... 하고 한 시간여를 기다렸더니, 닭가슴살 조각을 얹은 피자와 방금 사과를 으깨어 밀가루와 버무린 듯한 파이가 나왔다. 피자를 가리키며 혹시 이 치킨이 아까 마당에서 뛰어놀던 치킨 맞냐? 물었다. 안주인 마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리얼 올가닉 피자”(real organic pizza)란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프레시’한 피자와 파이를 히말라야 맥주와 함께 맛보았다.      


요통엔 히말라야 

  출발을 한 달여 앞두고 운동을 하던 중 허리 아래를 전기로 지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다행히 며칠 안정 후 회복되었지만, 조금 오래 앉거나 운전을 하면 허리가 뻐근해 내심 걱정이었다. 카트만두행 비행기 안에서도 허리 쿠션을 하고 자세에 신경을 많이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트레킹을 시작하고 이틀쯤 지났나? 문득 생각해보니, 온종일 허리통증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지내고 있는게 아닌가! 인천행 비행기에선 허리쿠션을 과감히 빼 버렸고 이후로 지금까지 성가시던 허리통증이 말끔해졌다. 요통에 걷기가 좋다는 얘긴 들었지만, 난 안나푸르나의 힐링에너지 덕분이라 믿는다.

그대 허리가 안 좋으신가? 히말라야로 떠나시라~^^

마르디히말 하이캠프에 본 마차푸차레


소소한 즐거움은 덤     

 시야를 압도하는 히말라야 산군들도 좋지만, 8일을 내리 걷는 것이 힘들지 않으냐고?

천만에!

히말라야 트레킹은 일정 전체가 ‘소소한 즐거움들’로 가득했다. 출발 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풍광들이 시시각각 펼쳐졌다.

저지대 정글 트레킹은 멀리 얼핏 얼핏 만년설을 품은 고산준봉들을 보며 걷는 재미 외에는 지리산, 설악산 계곡길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짙푸른 나무와 끝없이 깊은 숲길,

멀찍이 나무 위서 우릴 내려보던 흰머리 히말라야 원숭이,

오르내리 구불구불 길들과 주변의 돌 하나 풀꽃 한 송이,

맑고 넉넉한 시냇물과 크고 작은 폭포들, 폐포 하나하나를 씻어준 신선한 공기와 바람,

만년설과 그 위에 부서지는 햇살,

너무 오래 별을 잊은 채 살아온 날들을 부끄럽게 한 쏟아지는 별들의 향연까지, 모든 것이 ‘인생 풍경’이었다.      

12일간 걱정에 눈가가 짓무른 가족들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숲길과 눈길을 걷기 시작하면 온 몸의 에너지가 상승했고,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힐링타임’이었다.              


꿀팁 둘     

  출발 전 자유여행부터 전문 여행사까지 여기저기 검색을 했다. 비용을 많이 절약할 수 있는 것은 역시 현지 여행사를 이용하는 자유여행이지만, 초보 산악인임을 고려하여 국내 최대 트레킹 전문 혜초여행사를 선택했다. 결론적으로, 추가 경비가 아깝지 않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13명이 함께 움직였는데, 포터와 가이드, 전문 한식요리팀까지 20여 명의 현지인들이 완벽한 서비스를 제공하였다. 트레킹 일정 전 식사가 한식으로 나와, 매 끼니 두 공기씩을 흡입한 덕에 무사히 완주할 수 있었다. 누가 히말라야에서 닭백숙에 수제비, 비빔국수, 된장찌개, 낙지젓갈에 갓김치까지 먹을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매일 트레킹을 앞두고 시 한 편을 함께 읽었다. 한국에서 트레킹 일정을 보고 대략 그날 코스와 어울릴 것으로 생각되는 시를 배치했다. 무작정 걷다 보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다 문득, 아침에 읽은 싯구 하나 붙잡으면 시간도 잘 가고 힘든 줄을 몰랐다.

트레킹 이틀 차에 함께 읽었던 정호승의 시로 글을 맺는다.      


여행 / 정호승     

사람이 여행하는 곳은 사람의 마음뿐이다

아직도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의 오지뿐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여 떠나라

떠나서 돌아오지 마라

설산의 창공을 나는 독수리들이

유유히 나의 심장을 쪼아 먹을 때까지

쪼아 먹힌 나의 심장이 먼지가 되어

바람에 흩날릴 때까지

돌아오지 마라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람의 마음의 설산뿐이다             


트레킹 도중 큰 힘이 되었던, 이름몰라 '네팔제비꽃'이라 불렀던 야생화, 알고보니 꽃말이 겸손, 영원한 사랑인 프리뮬라(Primula)였음
마차푸차레 앞 춤추는 연인/암수?나무
사람의 발길을 허하지 않는 신들의 산 Fish tail, 마차푸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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