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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 정 Jul 16. 2023

Mt. 키나발루, 존경을 배우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악천후속 키나발루산 등정기

여행 = '트레킹!'


얼떨결에 버킷리스트 히말라야에 다녀온지 3 년, 몸이 근질거렸다. 그날 이후 나에게 여행은 '트레킹'과 동의어가 되었다. 카트만두를 떠나 인천공항에 내리자마자 코비드 소식을 접했다. 지루했던 바이러스와의 싸움도 이제 종점을 지나고 있다. 다시 히말의 봉우리들을 보고픈 맘 간절하지만, 여름 네팔은 나무에서 벌레가 뚝뚝 떨어진다니 언감생심. 마눌님 윤허를 득하기도 어려워 차선책으로 키나발루를 마음에 품었다.


해발 4,095m, 높이는 내로라하는 히말의 봉우리들에 뒤지지 않지만 적도 근방에 위치해 만년설 대신 단단한 화강암으로 덮인, 그래서 비교적 안전한 산이다. 특히 여름은 건기이고 날씨가 온화해 정상에서 일출의 장관을 보기에 최적이란다.



얼마 전 맘에 꼭 드는 산악회를 소개해줘 더 가까워진 오랜 친구 L에게 둘만의 우정여행을 제안했는데,  L의 대학선배 C형이 합류하였다. 코로나 이전부터 키나발루 트레킹이 버킷리스트였다는 C형은 등산뿐 아니라 MTB, 승마, 테니스, 와인에 대해 마니아 수준의 식견을 갖추고 '유익+유쾌'한 대화로 분위기를 이끄는 재미난 분이다.


살짝 바뀐 일정


여행사 홈피의 일정은 저녁 비행기로 출발해 이틀간의 산행 후 다음 날 마누칸 섬에서 스노클링 후 바로 인천행 밤비행기를 타는 3박 5일짜리로, 그야말로 '빠듯'했다.  


7월 12일에 출발하려다 귀국 후 급한 일정 때문에 하루를 당겨 11일 출발하는 상품을 여행사에 문의하였다. 이틀 산행 중 묵어야 할 파나라반 산장에 숙소 예약이 어려워 스노클링을 먼저 하고 산을 오르는 일정으로 변경하겠단다. 돌이켜보니 이게 신의 선물이었다...


7월의 코타키나발루는 대개 화창하고 비가 와도 전형적인 스콜(squall) 정도라 여행에 최적기다. 태풍이 만들어지는 지역이라 그 피해는 필리핀 등으로 향할 뿐이다. 그런데 여행 이튿날 마누칸 섬에서 예상밖의 큰 비를 만났다. 섬에서 뭍으로 귀가할 보트가 뜨지 못해 3시간 넘게 기다리다 가까스로, 그야말로 '탈출'했다. 7월 날씨로는 매우 이례적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에 내일 날씨가 살짝 걱정스러웠다.


한편으론 원 스케줄대로였다면 이 비를 고스란히 산에서 맞을 상황이었으니 바뀐 일정덕을 톡톡히 본 셈이라 가슴을 쓸어내렸다.

차로 2시간여를 이동해 키나발루 산 국립공원 입구의 숙소에서 짐을 풀고 젖은 옷을 말렸다.


우중 스노클링, 보이는 것이라곤 물고기 알들뿐



엑소더스, 마누칸


이제 내일이면 키나발루를 만난다.  

아침 9시 30분 트레킹의 시작점인 팀폰 게이트(Timpohon gait, 1,866m)를 출발해 베이스캠프 격인 파나라반 산장(Panalaban, 3,272m)까지 6.11km를 오른다. 이튿날 정상인 로우 피크(Lows peak, 4,095m)까지 2.72km를 올랐다가 다시 팀폰 게이트까지 총 8.72km를 내려와야 한다.


왕복 17.44km, 지리산 종주에 비하면 별거 아닌 듯 하지만 이틀간 고도 2,229m를 오르고 내려야 하니 고산증이 복병이다.

다이아목스정을 나눠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나이키와 아디다스?


파나라반 산장까지의 산행은 순조로웠다.  간간히 비를 뿌리기는 했지만 어제의 폭우를 피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출발 지점은 여름이지만 고도를 올릴수록 추위에 대비해야 했다. 우린 꼭 필요한 짐만 작은 배낭에 넣고 방한복 등은 하나의 배낭을 만들어 현지 가이드 겸 포터인 R에게 맡겼다. 서로의 이름을 소개했지만 익숙지 않기는 피차 마찬가지, C형이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했다.  


" My name is Nike, I'll call you, Adidas."


이후로 C형은 나이키, 가이드 경력 32년 차의 노련한 R은 아디다스로 불렸다.

나이키, 아디다스, & 폴


오색에서 대청봉 오르는 길처럼 지루한 계단길을 천천히 천천히 올랐다.  능선도 조망도 볼 게 없었다.

가끔 네펜데스(Nepenthes)라는 식충식물과 쉼터에서 만나는 꼬리 짧은 다람쥐들이 유일한 볼거리였다.


길가에서 만난 식충식물, 네펜데스


파나라반 산장까지의 첫날 일정은 6km를 6시간에 걸쳐 올라가면 되니 부담이 없다. 서두를수록 고산병을 만날 확률이 높으니 "천천히 천천히"를 외치며 즐거운 대화와 휴식과... 여유로운 산행이었다.  

오후 4시 전 여유 있게 파나라반에 도착했다.


 


20대로 보이는 말레이시아 청년 2명과 히잡을 둘러 쓴 3명의 아가씨들과 함께 8명이 한 방에 묵게 되었다.

한국 드라마 덕분에 "오빠, 예뻐요, 괜찮아요" 정도는 술술 나온다. 오빠 아니고 아저씨라고 교정해 주었지만 그래도 오빠라해서 냅 두었다^^.


정상에서 일출을 보려면 새벽 1시에 간단히 요기를 하고 2시 30분엔 출발해야 한다. 이른 저녁을 먹고 6시쯤 잠을 청했다. 친구사이라는 5명의 젊은이들의 소곤거림에 잠이 드는 둥 마는 둥...  세찬 비바람 소리에 잠이 깼다. 시계를 보니 자정을 막 넘겨 어차피 일어냐야 할 시간이었다.


번복, 또 번복


C형은 이런 날씨에 정상 도전은 무모한 일이라는 입장이었고 친구 L도 고개를 끄덕였다.  5명의 젊은이들은 털 목도리, 샌들 같은... 말도 안 되는 복장으로 산행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노련한 가이드 아디다스도 이런 비바람엔 바위가 매우 미끄럽고 사람몸이 좌우로 흔들려 "dangerous"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머릿속에서 아쉬움과 갈망이 똬리를 틀었다.  


보통 이런 악천후엔 산악 레인저가 정상 상황을 보고 입산을 허하거나 통제한다.

간단한 요기를 마친 새벽 2시 30분, 레인저는 날씨 상황을 지켜보고 30분 후에 입산여부를 다시 결정하겠다고 했다.


'틀렸구나..' 우린 짐을 풀고 속옷차림으로 다시 침상에 올랐다. 하지만 잠이 리 없었다.

1시간쯤 후 기적처럼 비가 잦아드는가 싶더니 아디다스가 헐레벌떡 방으로 들어왔다. 레인저가 등반을 허락했단다.  

이층 침대에서 뛰어 내려온 내 입에서 일단 체크 포인트인 사얏사얏에서  가보겠다는 말이 나와버렸다. 황당해 하는 C형 입에서 기다리던 말이 나왔다.


"그렇다면 친구인 L이 같이 가야지..."


희미한 헤드랜턴 빛에 의지하여 물에 젖은 바위 계단을 한 발 한 발 오르고 또 올랐다. 번복, 또 번복으로 다른 팀보다 출발이 1시간쯤 늦었다. 사얏사얏 포인트를 2시간 내에 오르지 못하면 정상을 목전에 두고 하산해야 한다. 마음이 급하니 절로 발걸음이 빨라졌고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다행히 사얏사얏 포인트를 제한시간보다 20분이나 빠른 5시 10분에 통과하였다.

바람은 여전히 거셌으나 차갑지 않았고 달아오른 몸을 식히는데 좋았다.


어느 해인가 11월 초 단풍 보러 설악오르다 대청에서 살을 에이는 칼바람과 첫눈에 온몸이 얼어붙는 경험을 한 나에게 적도에 위치한 키나발루의 돌풍은 선풍기 바람처럼 시원다.   


물에 젖은 바위에 대한 릿지화 등이 꼭 필요


이렇게 너른 너럭바위라니! 산 봉우리 하나가 바위 하나인 듯한 엄청난 봉우리 위에 오르자 정상인 로우 피크(Lows, peak)가 눈앞에 나타났다. "700 meter to go" 가이드의 목소리에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 젖은 솜처럼 무거운 발을 들어 올렸다.


사우스 피크와 로우 피크 사이, 광활한 너럭바위


열 걸음쯤 떼고 나면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심장 뛰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걸음과 호흡의 조화가 무너진 걸까? 싱크로나이즈가 맞지 않는 느낌이다. 잠시 허리를 숙이고 숨을 고르고.... 다시 열 걸음쯤 걷고 쉬기를 반복하였다.


'내 생애 이렇게 끝.까.지. 몸이 반응한 적이 있던가?'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했다.

'가만있자 내 나이가.... 여기서 포기해야 하나?'


그 순간 몇 년 전 지리산 종주를 앞두고 지극히 정상임을 확인했던 관상동맥CT 검사가 떠올랐다.

두려움이 자신감으로, 입가의 묘한 미소로 바뀌었다.  

다시 한 걸음을 내어 디뎠다.


앞서 간 친구 L의 얼굴이 보였다. 로우 피크 표지판 앞에 사진을 찍으려 기다리고 있었다.

해발 4,095m, 키나발루의 정상이 내 눈 아래 있었다!  

이런 표정이라니!


건너편 사우스 피크가 구름 사이로 떠오른 태양에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그러고 보니 바람이 완.전.히. 사라졌다!

거대한 신들 같은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가 고요함으로 가득했다.

이런 경건함이라니!



키나발루가 '죽은 자가 존경받는 곳', '영혼의 안식처'로 불리는 이유가 다가왔다.  



말레이시아 판 연오랑세오녀


키나발루는 보르네오섬 토착민인 키디잔 족들의 고향인 '아키나발루'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12세기 경 이 부근 해역을 지나던 중국 왕자가 탄 배가 좌초되어 구조된 일이 있었는데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중국 왕자와 당시 보르네오 공주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후 중국 왕자는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중국으로 돌아갔고 보르네오 공주는 떠난 남편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매일 산 꼭대기로 올라 남중국해 쪽을 바라보다 결국 병들어 죽게 되었다. 이를 불쌍히 여긴 산신령이 그녀의 모습을 영원히 꼭대기 바위에 새겨 남중국해를 바라보게 해 주었고, 이후 사람들이 이 산을 "키나발루"라고 불렀단다.

말레이시아 판 연오랑세오녀 신화네!  



정상부근 작은 물구덩이가 만든 미러이미지, 아디다스 촬영


날아갈 것 같은 기분으로 파나라반 산장을 향했다.

산장에 남아 있을 C형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새벽까지 내 폭우에 바위산에서 내려오는 폭포가 얼마나 장관이었나 몰라. 내년에 CH랑 다시 와야겠어. 그땐 산장에서 2박 하려고.... 아 그리고 워키토키를 가져와야겠어. 난 이번에도 베이스캠프에서 선발대랑 계속 소통한 거야.... "


C형은 여전히 유쾌했고 L과 나는 입을 다물었다.


CH는 우리 셋을 품어 준 산악회 핵심 멤버로 산행 중 어디론가 사라져 담배 한 대를 맛있게 피고 오는 요가 마스터다. 산악 가이드 아디다스가 "This is my energy"라며 담배 피우러 사라지곤 했는데, CH와 궁합이 잘 맞을 것 같다는 것이다.


당나귀 귓봉? 인가하는 이름의 영봉들


몸이 먼저 반응하는 리스크테이커, 넉넉히 품어준 산 키나발루


예측하기 힘든 위험 앞에서, 순간의 선택이 생사를 가를 수 있다.


해발 3~4천 미터 고도에서 저녁 6시부터 새벽 3시까지 폭우와 강풍이 계속되었다면 산행은 포기해야 한다. 그것이 당연이고 상식이다.  헌데 30분을 지켜보자던 산악 레인저의 입산 허가 순간, 리스크테이커(risk taker)인 내 몸은 머리보다 한 발 먼저 반응했다.


'비가 잦아들었다. 바람은 여전히 강하지만 차지 않다. 나보다 훨씬 젊지만 등산 경험이 없고 운동화를 신은 사람들도 출발했다. 말이 그렇지.. 이 먼 곳에 언제 다시 오겠는가? 일단 시도해 보고 여의치 않으면 포기해도 늦지 않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런 생각들은 내 발과 손보다 빠르지 않았다.

천만다행으로 하늘이 돕고 키나발루가 우릴 품어주었다.


하산 후 다음 날 0시 20분 인천행 비행기에 올랐으니 꼬박 25시간여를 깨어 있었고 손목의 만보계는 36,700보를 가리키고 있었다. 허벅지가 터질 것 같지만 영.혼.은 구름 위를 나는 것 같았다.  



로우피크에서 바라본 암봉, 운해, 그리고 일출


* 키나발루 산을 오르고자 하는 이를 위한 팁


- 여행사 패키지는 너무 빡새다. 하지만 늘 그렇듯 항공료, 숙박료, 키나발루 등반 예약비용 등 계산해 봐도 이 가격은 절대 나올 수 없다. 하나투어랑 혜초여행사 상품이 완벽하게 똑같고 심지어 한국인 가이드도 같은 분들이다. 둘 중 저렴한 것을 고르면 된다. 하나투어는 거의 매일 산장 예약이 가능하고 혜초는 주 2일만 가능하다.


- 11월부터 2월까지 우기는 피해야 한다. 하지만 이번 여행처럼 건기라도 하루 한 번쯤은 거의 비가 온다. 고어텍스 바람막이 혹은 등산화 등 비에 대한 대비가 중요하다.


- 적도의 고산이다 보니 시작은 여름복장, 정상은 예측할 수 없는 추위에 대비해야 한다. 첫날 봄가을 복장으로 오르고 포터에게 바람막이와 경량 패딩 정도 맡기면 충분하다. 라반라타라고도 하는 파나라반 산장의 숙소는 위풍이 거의 없고 침구도 충분해 잘 때는 전혀 춥지 않았다.


- 폭우에 대비해 확실한 판초 혹은 상하의 따로 된 우비를 준비함이 좋지만 너무 더울 수 있으니, 경량 우산이나 가벼운 비닐 우비도 하나 챙기는 것이 좋다.


- 상행, 하행 모두 계단길이 대부분이다. 특히 하행길에 무릎에 무리가 오기 쉽다. 스틱은 반드시 챙기고 하산 길엔 무릎보호대도 착용할 것.



*** 글을 마무리하려니, 현지 산악 가이드 겸 포터인 R(아디다스)의 선한 얼굴이 떠오른다.  스무 살에 포터일을 시작해 지금 52세니 30여 년 주당 4-5일은 정상을 올랐단다. 산행 둘째 날 새벽, 사실상 우리 셋은 등반을 포기했었다. 이 분 입장에선 안 올라가면 더 편하고 좋았을 것이다. 침상 위에서 아쉬움에 잠 못 이루고 있을 때 방문을 열고 ''마침내 레인저가 등반을 허락했다"는 소식을 전해주지 않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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