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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 정 Oct 10. 2023

어쩌다 괘방산, 해파랑길 37코스

귀때기봉에 뺨 맞고 괘방산 내달린 산행기

'혹시 모르니 우비 준비하세요'

아시안게임 축구 결승, 한일전, 더구나 1:2 역전승, 가슴이 터질 것 같은데 Y대장의 공지사항이 떴다.  


시월 정기산행은 설악 귀때기청봉, 남들 다 가는 대청이 아니고 단풍에 물든 대청을 마주할 수 있는 곳을 오르기로 했다. 귀때기는 해발 1,578m의 높이를 자랑한다. 설악산의 봉우리 가운데 가장 높다고 으스대다가 대청·중청·소청 삼 형제에게 귀싸대기를 맞았다는 전설과 귀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바람이 매섭게 분다는 설이 팽팽하다. 새벽 4시 집결이라 이불을 끌어올려 금메달의 흥분도 함께 잠재웠다.  


CJ산악회의 자랑, 28인승 리무진버스에서 부족한 잠을 보충하고 눈을 떠보니 오색이다. 산채비빔밥에 메밀전, 도토리묵, 된장찌개로 배를 든든히 채웠다. 다 맛났지만 특히 백김치맛이... 환상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침이 고이는 물김치


설마 했는데, 식당을 나설 때 시작된 빗방울이 한계령 휴게소에 도착하니 점점 굵어지고 바람도 심상치 않다. Y대장은 고민 끝에 귀때기 대신, 날씨 상황을 봐가며 백담사 쪽을 고려해 보잔다. 비 젖은 너덜길 등정이 위험하기도 하고, 곰탕이 분명한 날씨라 조망도 보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신기하게도 28명 전원이 한마디 불평도 반대도 없다. 그만큼 대장에 대한 신뢰가 깊다는 뜻.


삼삼오오 우산을 들고 낙산사를 거닐었다. 이 나이 먹도록 낙산사를 말로만 들어 보았던 내겐 좋은 기회였다.

소나무와 잘 어우러진 의상대, 허리를 숙이면 관음보살님 얼굴을 하늘을 배경으로 볼 수 있는 관음전, 이름이 더 이쁜 '꿈이 이루어지는 길'을 오롯이 가슴에 담았다.


 


"대왕해물철판전골", 바다를 다 담아 놓은 듯한 비주얼의 처음 맛보는 요리였다.

원래 하산 후 주린 배를 든든히 채우려 예약한 메뉴였는데, 꼬인 일정 때문에 이른 점심 메뉴가 되었다.

육해공군이 모두 담긴 푸짐한 안주가 술을 불러 회원 중 주류 몇 분은 대낮부터 만취상태!


제일 위 국수를 다 먹고 나면 그 아래 닭이 한 마리 누워있음



식당에 가기 전 마른 해산물 전문점에서 잠시 쇼핑까지 했으니, 천안아산 최강의 빡샌 산악회가 한순간에 '패키지 관광'으로 변질된 듯했다.


Y대장이 고민 끝에 내놓은 대안은 괘방산, 해파랑길 트레킹!

처음엔 모두 평창의 명산, 계방산으로 잘 못 알아들었다.


안인진에서 345m 괘방산과 183 고지를 거쳐 정동진까지 9.1km의 산과 바다를 동시에 조망할 수 있는 트레킹 코스다.

' 에게게 겨우 삼백미터...' 그래도 말 그대로 해발, 즉 바다레벨에서 오르는 것이니 무시하다간 큰코다친다.  


생각보다 오르내림이 심하고, 9킬로라는 거리도 만만치 않다. 배산임수가 아닌 우산좌해의 기막힌 풍경의 숲길이 펼쳐졌다. 괘방산 정상까진 놀며 쉬며 느긋하게 걸었다. 철 모르는 진달래와 꼭 불꽃놀이 불꽃을 닮은 산부추가 눈길을 끈다.


'설악이야 다음에 기회가 있겠지.. 예상밖의 비가 아니었으면 이리 좋은 길을 어찌 알았을꼬'

실망을 긍정으로 바꾸니 모든 게 힐링이다.

 



가을? 진달래
부추꽃(웹에서 퍼온 사진)
우산좌해의 해파랑길 37코스


앞에 1자를 써넣고 싶던 정상석


Y대장이 어딘가 전화를 한다.  

원 일정엔 없었지만, 일부러라도 동해까지 와서 먹어 볼만한 음식점이라며 저녁 식사를 추가했다. 문제는 식당이 일찍  닫아서 5시까지는 정동진까지 완주해야 한단다. 느긋하던 발걸음이 빨라졌다. 곳곳에 철책과 경비초소가 남아 있는 산길을 그야말로 '특전사'처럼 내달렸다.


갑자기 산에서 파도소리가 들린다. 멀리 정동진이 내려다 보이고 마침내 종착지다.

그런데 하산해 보니 파도소리가 아니라 차들이 질주하는 소리였다.

순간 힐링이 짜증으로 바뀔번했다.


그러고 보니 '동해의 세찬 파도소리와 질주하는 차의 소음이 거기서 거기네...'  

원효대사의 해골바가지가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이름은 횟집인데, 회는 없고 매운탕과 물회와 회무침이 전부다. 이미 상이 차려져 있는데, '푸짐하다!'

4명 성인 남자가 소자리 망치매운탕 하나로 충분할 정도고 일 인분인 물회와 회무침도 양이 장난 아니다.

입인지 코인지 정신없이 들이붓고 다시 리무진 버스에 올랐다.


 

가자미 물회와 회무침, 매운탕을 못 찍어 아쉽...


성인 남자 4인이 망치매운탕 소자로 충분, 가격도 착한 메뉴판


후기를 적고 보니 산행기가 아닌 먹방여행기가 되었다. 그래도 불만은 1도 없다.

산행도 좋지만 먹방은 더 좋지 않은가?


산악회 멤버들은 Y대장의 호를 '중탈'이라 놀린다. '중도탈락'의 줄임말로 체력, 건강 등의 이유로 예정된 코스에서 중도하산하는 것을 뜻한다.  1,578m 귀때기봉을 목표로 했다가 345m 괘방산을 올랐으니 오늘은 모두 중탈인 셈이다. 그런데, Y대장은 '중탈'이라 쓰고 '지산'으로 읽어달란다. '중도탈락'이 아닌, '지혜로운 산행'이라나... 이렇게 오늘도 한수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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