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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 정 Sep 13. 2023

헬로 가을, 이끼왕국 가리왕산

장구목이 들고 심마니교 나고, 10.8 km  등반기

9월을 훌쩍 넘겨 열흘 째인데 낮 기온은 여전히 30도를 웃돈다.

'여름연장->가을실종', 이러다 반팔 반바지 차림으로 한가위를 맞다.

이달 정기산행의 목적지는 강원도 정선이다.

가리왕산, 1,561m로 높이로는 대한민국에서 Top 10중 9위이고, 당당한 백대명산이다.


새벽 5시 30분 천안 출발, 리무진 버스에서 부족한 잠을 보충하고 진부에 도착하니 8시, 살짝 배가 고팠다.  

전국 맛집 아카이브를 꾀고 있는 Y대장의 선택은 부림식당, 이런 시간에 산채백반이라니!   


직접 만든 부드런 두부와 산나물로 배를 채우고 삼박자 커피 한잔 손에 들고 식당문을 나섰다.


'... 공기가 다르다'


'아직 여름'인 천안을 떠나니, 진부는 '이미 가을'이었다.  



일관성을 배우다(장구목이-임도-정상)


장구목이를 들머리로 정상까지 4.2km를 '줄기차게' 올랐다.

시작부터 정상까지 30도쯤의 오르막이 끝없이 이어졌다.  


'참 일관성 있는 길이네'

잠시의 내리막도 능선도 없다.

그냥 정상을 향해 돌격 앞으로다.

다행히 임도까진 넉넉한 수량의 개울물 소리와 그 사이로 불어오는 냉장고 바람이 더위를 식히기에 충분하다.


흔한 계곡과 뭔가 다르다? 했더니...... 온통 이끼다!!

물에 젖은 바위들이 몽실몽실 초록옷을 입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스며들 듯 사는 거다. 천천히, 이끼처럼 들러붙어 사는 거다.”


만화 원작인 동명의 영화에서 박해일은 이렇게 중얼거린다.  

그래서인지 왠지 습하고 눅눅한 이미지였는데, 가리왕산의 이끼는 우아하기 그지없다.  4억 5천만 년 전에 물에 살던 녹조류가 육지로 첫 발을 옮긴 '녹색 개척자'가 바로 이끼다.  자기 몸의 20배의 수분을 머금고 내뿜을 수 있어 최근 실내 인테리어용 자연 가습기로 각광을 받고 있다.


"산에서 길을 잃으면 이끼 반대 방향이 남쪽이에요. 해가 안 드는 북쪽에 이끼가 자라거든요.."

척척산박사 Y대장의 설명이 귀에 박힌다.


9개 이끼폭포 중 하나


임도를 지나니 계곡물도 사라지고 경사가 15도 업, 심하게 가파른 길이 정상까지 이어졌다.

짧은 등산 경험상, 일단 천 미터가 넘으면 절대 방심하면 안 된다.


만만치 않다더니 가리왕산, 역시 제대로 힘들다.  

발끝만 보고 힘겹게 오르다 두 번이나 나뭇가지에 이마를 찌었다. 정글 비스무레한 숲길을 비스듬히 가로막는 나무들이 유난히 많다.


'그래서 가리...왕산인가?'


그건 아니고,  삼한시대 맥국(貊國)의 갈왕(葛王 또는 加里王)이 이곳에 피난하여 성을 쌓고 머물렀다고 하여 갈왕산이라고 부르다가 가리왕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단다.


가리어진 길, 이마조심


다채로운 들꽃들, 냄새나는 인간들


산행 중 Y대장 곁에 머물면 유식해진다.  

휙 지나칠 바위이름, 들꽃들의 어여쁜  이름들을 주워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초입부터 지천으로 피어있는 오늘의 히로인은 보라색 옷을 입었다. 무엇처럼 보이냐 기에...  닭 볏을 떠올렸는데, 투구꽃이란다. 간간히 아이스크림? 핫바?를 닮은 촛대승마와 산달래미나리도 반갑다.


"껍질이 희다고 모두 자작나무 아니고요. 유광은 자작나무, 무광은 은사시나무예요. "

'은사시나무가 광택이 날 것 같은데 무광이라고....?'


이렇게, 오늘도 산지식이 풍성해졌다!



투구꽃, 9월 가리왕산의 지배자


산달래미나리
촛대승마
큰솔이끼




클수록 속을 비우는 주목

정상에 오르자 멀리 소백, 태백, 치악, 오대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내 눈엔 다 그산이 그산인데, Y 대장의 이어지는 설명은 매번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저 고개만 끄덕일 밖에.


정상석에서 사진을 찍고 고개를 들어보니 유명 산군들 위로 구름이 또 다른 장관을 이룬다.

가리왕산 정상의 산군과 구름


'내려올 걸 왜 힘들게 오르냐고?'

' 바로 이 맛 때문!!'


그런데, 옥에 티이자 눈살 찌푸려지는 기억 하나...

정상에 이쁜 잠자리 떼를 상상했는데, 날파리 떼가 득시글하다.

1,561m 정상이 뾰족하지 않고 작은 평전이다.

넉넉한 정상에 비박족들이 몰려들고 밤새 그들이 남긴 흔적?이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우웩~).   


황기 족발, 콧등치기, & 수리취떡


각자 싸온 먹거리들을 나누고 마황치 삼거리를 지나 심마니교까지 6.6km를 '가열차게' 내려왔다.  

대청-오색코스 비스무레 한 무작정 계단 하산길이라 무릎이 시큰하다.

자연휴양림 근처 넉넉한 계곡물에 발과 몸을 담그니 종일 산행의 피로는 자취가 없다.  


산행을 시작한 후 '가장 맛있는 음식'이 바뀌었다.

값도 종류도 중요치 않다.

뭣이 되었든 산행 중, 혹은 산행 후 먹는 음식이 최고로 맛있다!

만 원짜리 와인도 산정상에서 마시면 '돔페리뇽 향'을 내뿜는다.  


하산 후 잡냄새 하나 없이 쫀득한 황기족발과 콧등을 칠 정도로 찰지다는 메밀국수 한 그릇 들이키니 세상 부러울 게 없다.


'No옵션 No쇼핑'인 줄 알았더니, 정선장에 풀어놓는다.

처음 맛보는 수리취떡, 정선산 곤드레, 취나물을 봉다리에 담으니 요즘 '주말 과부'인 아내의 눈꼬리가 살짝 내려갈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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