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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 정 Oct 26. 2023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참으로 친절한 카를로 로벨리의 과학교양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십수 년간 매월 한 권의 책을 읽는 독서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처음엔 한 달에 한 권이 버거울 때가 많았다. 그런데 그 한 권의 책에서 소개하는 또 다른 책을 더 찾아 읽게 되고, 이렇게 자라난 자발성 덕분에 독서량이 많이 늘었다. 지난달 유시민의 [문과남자의 과학공부]를 비교적 가볍게 읽고 자연스럽게 카를로 로벨리의 책을 접하게 되었다.

'... 그래 과학교양서는 이렇게 쓰는 거로군' 감탄하며 순식간에 마지막 책장을 넘겼다.  올 상반기 6개월 넘게 장회익 교수님의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강독 모임에 참석하면서 나의 이해력에 절망한지라 서평은 언감생심. 그래도 책을 읽기 전과 후 세상을 보는 시각이 조금은 바뀌었기에 그 흔적을 남겨 보련다.


로벨리는 서문에서 이 책의 내용을 이렇게 개략한다.


" 이 책은 일단, 오늘날 우리의 세계에 관한 이해를 정리할 수 있는 열쇠가 되는 몇 가지 아이디어들의 먼 기원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러고는 20세기의 위대한 두 가지 발견인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핵심 내용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플랑크 인공위성이 우주표준모형을 확증한 일과 세른 CERN'이 많은 이들이 기대했던 초대칭 입자 검출에 실패한 일처럼, 자연이 우리에게 준 최근의 신호들을 고려하면서, 오늘날 양자중력 연구에서 나타나는 오늘날의 세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나아가 공간의 알갱이 구조, 미시적 규모에서 시간의 사라짐, 빅뱅 물리학, 블랙홀의 열의 기원, 물리학의 토대에서 정보가 하는 역할까지 살펴볼 것입니다.(p10-11) "

 

몇 개의 단어만으로도 골치가 아프다. 하지만, 중고생시절 물리수업을 통해 형성된 시간과 공간, 세계 개념은 오래되고 어두운 동굴 속 사람들의 인식이며, 현대 물리학이 제시하는 동굴 밖 햇빛과 넓은 세계를 소개하겠다는 저자의 의욕이 동기부여가 다.



'바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사건의 과거와 미래 사이에는 (예를 들어, 당신이 있는 곳을 기준으로 당신의 과거와 미래 사이, 그리고 당신이 이 책을 읽고 있는 바로 이 순간) 어떤 ‘중간 지대’, 어떤 '연장된 현재'가 존재합니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대죠. 이것이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으로 발견한 것입니다.


당신의 과거 속에도 미래 속에도 있지 않은 이 중간 지대의 지속시간은 아주 짧고, 아래 그림에 도해했듯이, 당신을 기준으로 어디에서 사건이 발생하는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건이 당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연장된 현재의 지속 시간이 더 길어집니다. 독자의 코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중간 지대의 지속 시간은 기껏해야 몇 나노초 정도로, 거의 없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나노초 단위로 1초를 세는 횟수는 1초 단위로 30년을 세는 횟수와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도저히 알아차릴 수 없는 시간입니다. 바다 건너편에서는, 이 중간 지대의 지속 시간이 천 분의 1초입니다만. 여전히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시간은 아닙니다. 우리가 감각으로 지각하는 최소 시간은 10분의 1초대이거든요. 그러나 달에서는 연장된 현재의 지속 시간은 몇 초 정도이고, 화성에서는 15분 정도입니다. 이는 지금 이 순간에 화성에서는 이미 일어난 사건들이 있고 일어날 사건들도 있지만, 또한 우리의 과거에도 우리의 미래에도 있지 않은 일들이 발생하는 15분도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것들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우리는 전에는 한 번도 이러한 다른 곳을 몰랐습니다. 우리 옆에서는 이 '다른 곳'이 너무 짧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릴 만큼 재빠르지 못하니까요. 그러나 그것은 존재하고 실재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지구와 화성 사이에서는 원활하게 대화를 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내가 화성에 있고 당신은 여기에 있다고 해보죠. 나는 질문을 하고 당신은 내가 말한 것을 듣자마자 대답을 합니다. 하지만 내가 질문을 던지고 난 뒤 15분이 지나서야 나는 당신의 대답을 듣게 됩니다. 이 15분은 당신이 내게 대답했던 그 순간에는 미래도 과거도 아닌 시간입니다. 아인슈타인이 자연에 관해서 이해한 핵심적인 사실은 이 15분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이죠. 그것은 시간과 공간으로 이루어진 사건들의 짜임 속에 엮여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로 편지를 보낼 수 없는 것처럼 그것을 단축할 수 없습니다.


이상하기는 하지만, 세상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시드니에서는 사람들이 우리와 반대로 서 있다는 사실만큼이나 이상하죠. 하지만 사실이죠. 사람들은 사실에 익숙해집니다. 그러고 나면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것이 됩니다. 바로 공간과 시간의 구조가 이처럼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는 화성에서 일어난 사건을 두고서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지금'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문용어로 말해 아인슈타인은 '절대적 동시성'이 존재하지 않음을 이해했던 것입니다. 우주에는 '지금' 존재하는 사건들의 집합이라는 것은 없다는 뜻이죠. (p72~74)"


화성처럼 먼 거리에 있는 사람의 현재는 찰나가 아니라 15분쯤으로 확장된단다. 직관적 이해에 도달하진 못했지만, 일단 암기하기로!


"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은 별 가까이에서 공간이 어떻게 굽어지는지를 기술합니다. 이 굽음 때문에 빛도 휘어서 갑니다. 아인슈타인은 태양이 그 주위의 빛을 휘게 할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1919년에 측정이 이루어집니다. 측정된 빛의 궤도는 예측과 정확히 들어맞았지요. 그러나 휘는 것은 공간만이 아닙니다. 시간도 휩니다. 아인슈타인은 지구의 높은 고도에서는 시간이 더 빨리 흐르고 낮은 고도에서는 더 느리게 흐를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측정을 해본 결과 역시 사실로 증명되었습니다. 오늘날 실험실에서는 극도로 정밀한 시계를 사용하는데, 단 몇 센티미터 고도 차이에서도 이런 이상한 결과를 측정할 수 있습니다. 시계 하나를 바닥에 두고 다른 하나는 책상 위에 둡시다. 우리는 바닥에 놓아둔 시계의 시간이 덜 흐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시간은 보편적이고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질량에 따라 늘고 줄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질량이 있는 모든 물체처럼 지구도 시공을 비틀어 그 주위에서 시간이 느려지게 만듭니다. 쌍둥이 중 한 아이가 바닷가에서 살고 다른 한 아이는 산에서 살다가 나중에 다시 만나면, 한쪽이 다른 쪽보다 더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p88)"



요즘 등산을 즐기는 나에겐 좀 우울한 이야기다. 젊음을 유지하려면 산을 버려야 하나?


공간은 텅 비지 않았다  


 " 우리는 일반상대성이론 덕분에 공간이 단단하고 고정된 상자 같은 것이 아니라 전자기장처럼 역동적인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들어 있는 우주는 움직이는 거대한 연체동물과도 같아서 눌려지고 비틀리고 합니다. 양자역학은 그러한 모든 장이 양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즉 섬세한 입자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자연에 관한 이러한 두 가지 일반적인 발견으로부터 어떤 사실이 따라 나올까요?

물리적 공간도, 장이기 때문에, '양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 곧바로 따라 나옵니다. 다른 양자장들을 특징짓는 것과 똑같은 입자구조가 양자중력장을 특징짓고, 따라서 공간을 특징짓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간이 알갱이로 되어 있다고 예상합니다. 우리는 빛의 양자, 전자기장의 양자가 존재하고 기본입자가 양자장의 양자로서 존재하듯이, '공간의 양자'가 존재한다고 예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간은 중력장이므로 중력장의 양자가 '공간의 양자', 즉 공간의 입자적 구성 성분인 것입니다.

따라서 루프이론의 핵심 예측은 공간이 연속적이지 않다는 것, 무한히 나눌 수 없다는 것, '공간의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작습니다. 가장 작은 원자핵의 10억 분의 10억 분의 1보다도 작죠.

루프 이론은 공간의 원자적이며 입자적인 구조를 정확한 수학적 형식으로 기술합니다. 이 수학적 형식은 디랙이 쓴 양자역학의 일반방정식을 아인슈타인의 중력장에 적용하면 얻을 수 있습니다. 특히 부피는 (예컨대 정육면체의 부피는 임의로 작을 수가 없습니다. 최소 부피가 존재하는 것이죠. 이 최소 부피보다 더 작은 공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피의 최소 '양자'가 존재하는 겁니다. 공간의 기본 원자인 것이죠.(p167)"


" 거북이를 쫓아가는 아킬레우스 이야기를 기억하시나요? 제논은 느린 거북이를 따라잡기 전에 아킬레스가 무한한 수의 간격을 통과해야 한다는 생각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주목했습니다. 수학은 이 곤란함의 근본 원인에 대처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어, 어째서 점점 작아지는 간격들을 무한한 수로 더해도 전체 길이는 유한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자연에서도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아킬레우스와 거북이 사이에 정말로 임의로 짧은 간격이 존재할까요? 10억 분의 10억 분의 10억 분의 1밀리미터에 대해 말하고, 또 그것을 다시금 수없이 나누는 것을 생각한다는 것이 정말로 말이 될까요?

기하학적 양들의 양자 스펙트럼을 계산해 보면,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부정적입니다. 임의적으로 작은 공간의 조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공간의 가분성에는 하한이 있습니다. 아주 작은 척도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존재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트베이 브론스테인이 1930년에 대략적인 논증에 근거해 직관적으로 깨달았던 것입니다. 일반상대성이론의 변수들에 디랙 방정식을 적용한 것을 기초로 몇 년 전에 완성된 부피와 넓이의 스펙트럼 계산은 브론스테인의 생각을 확증하고 그것을 수학적인 공식으로 정식화합니다. 그러므로 공간은 알갱이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킬레우스는 거북이를 따라잡기 위해 무한한 수의 걸음을 걷지 않아도 됩니다. 공간이 유한한 크기의 알갱이로 이루어져 있기에 무한히 작은 걸음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킬레우스는 거북이에게 점점 다가가서 마지막으로 단 한 번의 양자도약만 하면 거북이를 따라잡게 될 것입니다.(p168)"


시간뿐 아니라 공간에 대한 나의 기존 인식도 틀렸다. 대상이 되는 무언가가 담긴 텅 빈 그릇이 아니고 공간 자체가 '공간의 양자'로 구성된 실체란다. 물질도 정보도 최소단위로 쪼개고 또 쪼개고... 무한히 쪼개지는 게 아니고 한 체계 내에 존재할 수 있는 정보에 한계가 있다는 것, 즉 무한에 한계를 지운 것이 양자역학의 깊은 의미라고 한다. 아킬레우스가 거북이에게 빠르게 다가가는 동안, 거북이도 느리지만 달아나므로, 영원히 잡을 수 없는 간극이 생긴다는 역설은 양자역학에 의해 부정된다. 알듯 모를 듯... 역시 외울 수밖에!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 공간이라는 배경이 사라졌습니다. 시간도 사라졌습니다. 고전적 입자도 사라졌고 고전적 장도 사라졌습니다. 그러면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 걸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자, 입자는 양자장의 양자입니다. 빛은 장의 양자에 의해 형성됩니다. 공간은 장에 지나지 않으며, 이 또한 양자입니다. 그리고 시간은 바로 이 장의 과정들로부터 태어납니다. 달리 말하면, 세계는 오로지 양자장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장들은 시공간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말하자면 하나 위에 다른 하나가 얹혀 있는 것, 장 위에 얹혀 있는 장입니다. 우리가 거시적 규모에서 지각하는 공간과 시간은 이러한 양자장들의 하나인 중력장의 대략적인 흐릿한 이미지입니다.

시공이 바탕에서 지탱할 필요가 없이, 그 자체로 존립하면서 시공 자체를 생성할 수 있는 장들을 '공변 양자장 covariant quantum fields'이라고 부릅니다. 세계의 실체는 최근에 극적으로 단순화되었습니다. 세계, 입자, 빛, 에너지, 공간과 시간, 이 모든 것은 단 한 가지 유형의 존재자가 드러난 것일 따름입니다. 바로 공변 양자장들이죠. 공변 양자장은 최초의 과학자이자 철학자인 아낙시만드로스가 가정했던 만물의 원질인 '아페이론', 무한정자를 오늘날 가장 잘 나타낸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의 연속적인 굽은 공간과 양자역학의 평평하고 균일한 공간 속에 있는 불연속적인 양자들 사이의 분리는 이제 완전히 해소되었습니다. 더 이상 모순은 없습니다. 시공연체와 공간의 양자 사이의 관계는 전자기파와 광자 사이의 관계와 같습니다. 전자기파는 광자를 큰 규모에서 어림하여 본 것입니다. 광자는 전자기파들이 상호작용하는 방식이고요. 연속적인 공간과 시간은 중력의 양자들의 역학을 큰 규모에서 어림하여 본 것입니다.(p192~3)"


 어렵다. 세계의 구성요소는 시간과 공간이 아니라 양자장이란다. 역시 외울 수는 있겠으나 양자장이 무엇인지 감이 잘 오지 않는다.  


과학을 신뢰할 수밖에 없는 이유


"과학의 역사의 첫머리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대목이 플라톤의 [파이돈]에 등장합니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지구의 모양을 설명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지구가 구형이며 그 속에 있는 커다란 골짜기에서 사람들이 산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합니다. 약간의 혼동은 있지만 꽤 맞죠. 그리고 그는 덧붙입니다. "나는 확신하지 않는다.” 이 한 대목이 대화편의 나머지를 채우고 있는 영혼의 불멸에 관한 터무니없는 이야기들 전부보다 더 가치가 있습니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이야기한, 우리에게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문서이기 때문이라서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그 대목이 빛나는 것은 플라톤이 당시 지식의 한계를 분명하게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합니다. "나는 확신하지 않는다."

우리의 무지에 대한 이런 날카로운 의식이 과학적 사고의 핵심입니다. 우리 지식의 한계에 대한 바로 이러한 의식 덕분에 우리가 세계에 관해서 그렇게 많은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지구가 구형임을 확신하지 않았듯이 오늘날 우리도 우리가 짐작하는 모든 것을 확신하지 않으며, 지식의 가장자리에 놓여 있는 것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지식의 한계에 대한 의식은, 우리가 아는 것 혹은 우리가 안다고 믿는 것이 부정확하거나 틀린 것으로 밝혀질 수도 있다는 의식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품고 있어야만 우리는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고 더 많이 배울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더 많이 배우기 위해서는, 가장 뿌리 깊은 믿음까지 포함하여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틀릴지도, 너무 순진한 것일지도, 조금 어리석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용기를 가져야만 합니다. 플라톤의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들인 것이죠.

과학은 이러한 겸손의 실행으로부터 태어납니다. 자신의 직관을 맹목적으로 믿지 말라. 모든 사람이 말하는 것을 믿지 말라. 선조들이 축적해 온 지식을 믿지 말라. 만일 우리가 본질적인 것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본질적인 것은 책에 이미 쓰여 있고 어르신들의 가르침 속에 이미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믿음에 확신을 가졌던 시기가 있었지요. 그 수 세기 동안에는 모든 것이 정체되어 있었고 아무도 새로운 것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아인슈타인과 뉴턴과 코페르니쿠스가 선조들의 지식을 맹목적으로 믿었다면, 그것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을 테고, 우리의 지식을 진전시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무도 의심을 제기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파라오를 숭배하고 거대한 거북이가 지구를 떠받친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인슈타인이 보여주었듯, 심지어 뉴턴이 발견한 것과 같은 가장 효과적인 지식조차도 결국 순진한 믿음에 불과했음이 증명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 과학은 모든 것을 설명하노라 자처한다는 비난을 받습니다. 과학자로서는 참 재미있는 비난입니다. 전 세계의 실험실에서 일하는 모든 연구자들이 알고 있듯이, 실상은 그 반대거든요. 과학을 한다는 것은 하루하루 자신의 한계와 씨름하며 알지 못하는 수많은 것들, 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과 대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을 설명한다고 자처하기는요! 우리는 내년에 세른SERN에서 어떤 입자를 보게 될지, 다음번에 망원경이 무엇을 보여줄지, 어떤 방정식이 세계를 참되게 기술할지를 모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방정식을 푸는 법을 모르기도 하고, 심지어 때로는 그 방정식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하기조차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연구하는 이 아름다운 이론이 정말로 옳은지를 알지 못합니다. 빅뱅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모릅니다. 폭풍, 박테리아, 눈, 우리 몸의 세포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생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릅니다. 과학자는 자신의 수많은 한계와 이해의 한계에 딱 붙어서 지식의 가장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면, 과학이 말해주는 것에 어떻게 의지할 수 있는 것일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과학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확실한 대답을 주기 때문이 아닙니다. 과학을 신뢰할 수 있는 까닭은, 현재 우리가 가진 최선의 대답을 주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찾아낸 최선의 대답 말입니다. 과학은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관해 우리가 아는 최선의 것을 반영합니다. 과학이 배움에 열려 있고 기존의 지식에 의문을 던진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과학이 제시하는 답이 우리가 손에 넣을 수 있는 최선의 것임이 보장됩니다. 더 나은 답이 발견되면, 그 새로운 답이 과학이 되는 것이죠. 아인슈타인이 더 나은 답을 찾아, 뉴턴이 틀렸음을 보여주었을 때, 그는 가능한 최선의 답을 주는 과학의 능력을 의문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는 그 능력을 확인한 것이었죠.

그러므로 과학의 답은 확정적이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얻을 수 있는 최선의 답이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답이 우리가 가진 최선의 답인 까닭은, 우리가 그 답을 확정적이라고 여기지 않고, 언제나 개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무지에 대한 의식이 과학에 특별한 신뢰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확실성이 아니라 신뢰성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진정한 확실성은 없고, 우리가 어떤 것을 맹목적으로 믿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확실성을 가지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대답은 과학적인 답입니다. 과학은 확실한 해답이 아니라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답을 찾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이라는 모험은, 그 뿌리는 기존의 지식에 두고 있어도 그 영혼은 변화 속에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풀어낸 이야기 속의 과학은 그 뿌리는 수천 년 전까지 닿아 있고, 온갖 생각을 유산으로 받아왔지만, 동시에 더 나은 무언가가 발견될 때에는 기존의 것을 내던져버리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과학적 사고의 본성은 모든 선험적 사고와 모든 숭배와 손대서는 안 되는 모든 진리 따위를 참지 못하는 비판적이고 반항적인 태도입니다. 지식에 대한 탐구는 확실성을 먹고 자라나지 않습니다. 확실성의 근본적인 결여를 먹고 자라납니다.(p

253~6)"


글의 말미에 로벨리의 설명은 '반갑게도' 이해가 되는 문장들이다. 워낙 방대한 내용이고, 시간, 공간, 우주에 대한 기존 관념을 뒤엎어야 해 소화가 쉽지 않았지만, 그의 설명방식은 시종일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감히 말하건대, 과학교양서 글쓰기의 전범이라 할만하다.  한국 독자들에게 보낸 친필 인사에서 그의 친절한 성품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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