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많은 재산이 있다네/ 하루의 첫 음절인 아침, 고갯마루인 정오, 저녁의 어둑어둑함, 외로운 조각달/이별한 두 형제, 과일처럼 매달린 절망, 그럼에도 내일이라는 신(神)과 기도/ 미열과 두통, 접착력이 좋은 생활, 그리고 여무는 해바라기/ 나는 이 모든 것을 여행가방에 넣네.'
- 여행자의 노래, 부분/ 문태준
라오스 진료봉사에 함께 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충남보건의료노조가 도청과 함께 기획한 해외 의료봉사란다.
거의 매일 회의에 모임인 12월의 한 복판이라 선뜻 내키지 않았으나, 내 여행가방 속 재산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기에 그 절박함을 채우기로 했다.
3박5일, 비행기에서 이틀을 자야 하는 빠듯한 일정이다.
저가 항공은 제주나 일본여행 정도에 그쳐야 함을 배웠다.
즐길거리(모니터)도 먹거리도 없이 5-6시간을 버티는 것은 생각이상으로 고되었다.
딸이 요즘 베스트셀러라며 건네준 '불편한 편의점' 덕분에 지루한 라오스행 비행을 견딜수 있었다.
바로 영화 시나리오로 써도 될 만큼, 깨알 재미와 탄탄한 스토리라인이 잘 버무려진 수작이다.
의사 초년생 때 선교단체에서 진행하는 해외의료봉사를 몇 차례 경험했고 거의 30년 만이다.
현지 가이드로 위장취업?중인 인상 좋은 H목사님이 우리 팀의 안내를 맡았다.
라오스가 생각보다 까다로워서 약품이 제대로 공항 검색대를 통과할 수 있을지 노심초사였단다.
윗선부터 실무자까지 크고 작은 봉투?를 찔러주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다고 한다.
설명을 듣다 보니 의문이 들었다.
'누구를 위한 봉사지?'
워낙 기후가 좋고 기름진 땅에 인구는 고작 700만 정도라 잘 살진 못해도 먹고사는 걱정은 없는 나라다.
사회주의 국가인 데다 불교의 영향으로 라오인들은 욕심없고 순해 보인다.
단기 해외 의료봉사라는 게 제대로 된 설비를 갖추기 힘드니, 그저 몇 일분의 진통제나 감기약, 구충제, 비타민 등을 나누어 주는 것이 전부다. 20여 명의 전문인력과 도비 포함 4,000여 만원이 투입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낭비스럽다. 차라리 장소를 제공한 방비엥의 시골 학교에 교육기자재를 제공하거나 설비에 투자하는 것이 진짜 봉사 아니었을까?
'선한 목표'(현지 의료봉사)를 달성하기 위해 '악한 방법'(봉투/뇌물?)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별로 없어 보이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 '일이 되게 하려면...' 이라는 당위성은 모든 가치에 우선해도 되는가? 이런 관행은 소수일지라도 정직한 라오 관료들에 대한 부정이자 유혹이며, 향후 정직하게 파트너쉽을 맺으려는 한국사람들에게도 악영향을 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서 어딘가에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하자...'라는 결과론자들을 책망하는 말씀이 있지 않은가?
그래도, 진료 중에 마주친 라오인들의 순박한 눈빛과 천사 같은 아이들의 초롱한 눈빛은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장영희 교수의 <내 생애 단 한번>을 다시 들쳐 보았다.
책 속에는 <벨벳 토끼>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서양 동화 한편이 소개되어 있다.
한 아이가 아끼는 말 인형과 장난감 토끼의 대화다.
"나는 '진짜' 토끼가 되고 싶어. 진짜는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
잠자는 아이의 머리맡에서 새로 들어온 장난감 토끼가 아이의 오랜 친구인 말 인형에게 물었다.
“진짜는 무엇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는 아무 상관이 없어. 그건 그냥 저절로 일어나는 일이야."
말 인형이 대답했다.
“진짜가 되기 위해서는 많이 아파야 해?"
다시 토끼가 물었다.
"때로는 그래. 하지만 진짜는 아픈 걸 두려워하지 않아."
“진짜가 되는 일은 갑자기 일어나는 일이야? 아니면 태엽 감듯이 조금씩 조금씩 생기는 일이야?"
"그건 아주 오래 걸리는 일이야."
“그럼 진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해?”
“아이가 진정 너를 사랑하고 너와 함께 놀고, 너를 오래 간직하면, 즉 진정한 사랑을 받으면 너는 진짜가 되지."
“사랑받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지?"
"깨어지기 쉽고, 날카로운 모서리를 갖고 있고, 또는 너무 비싸서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는 장난감은 진짜가 될 수 없어. 진짜가 될 즈음에는 대부분 털은 다 빠져버리고 눈도 없어지고 팔다리가 떨어져 아주 남루해 보이지. 하지만 그건 문제 되지 않아. 왜냐하면 진짜는 항상 아름다운 거니까."
'진짜가 될 즈음에는 대부분 털은 다 빠져버리고 눈도 없어지고 팔다리가 떨어져 아주 남루해 보이지. 하지만 그건 문제 되지 않아. 왜냐하면 진짜는 항상 아름다운 거니까.'
또박또박, 마음에 글씨를 쓰듯 천천히 다시 한번 읽는다. 괜히 눈물겹다. 털은 다 빠지고 눈은 없어지고 팔다리는 떨어져도 진짜는 항상 아름답다는 말을 마음을 다해 인정한다.
진짜가 되기에 3박5일은 너무 짧지 않은가?
(PS) 쓰고 보니 함께 한 팀원들의 고생을 폄하한 것 같아 죄송하다. 대전충청 각지에서 모인 보건의료노조 조합원들과 J본부장님의 헌신과 노고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진료뿐 아니라 아이들을 위한 풍선만들기, 바람개비 만들기, 페이스페인팅, 바른 양치교육... 노인들에게 돋보기 나누어주기 등 오랜 경험이 없으면 절대 현실화할 수 없는 일정들을 효율적으로 소화해 냈다. 진료팀의 K & C간호사, 통역을 맡아준 미남 라오 청년 V, 그리고 낭만닥터 김사부의 의료자문 J교수님과의 환상적 팀웍에도 박수를 보낸다. 진료후 밤 비행기를 타야하는 빠듯한 일정중 땀에 젖은 몸을 씻을수 있도록 본인의 거처를 내어주신 H목사님의 친절과 다정함은 오래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