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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 정 Jul 18. 2024

선택 연습, 인생 연습

2024.07.14. 청풍호반의  초록선물세트 가은산 등반기

삶은 '선택들의 총합'이다.

그때 그 선택들이 모인 것이 내 삶, 곧 인생이다.  


산은 크고 작은 선택들의 '종합 훈련장'이다.


선택 하나. 약속은 무조건 지켜야 하는가?


Y대장의 고뇌가 깊다.

남덕유산 들꽃 능선을 고대했는데, 남도 전체가 비예보다.

정기산행은 산악회원이면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행사이지만, 실 상황은 그렇지 않다.

이름값 하는 명산일수록 신청자가 몰린다.  


'남덕유'란 이름을 보고 신청한 회원들(J)은 이유가 어떻든 산행지가 바뀌면 불만이다.

반면, 변화에 개방적인 누군가(P)는 행선지를 바꾸더라도 우중산행을 피하는 게 당연하다.   

초딩들까지도 열광하는 MBTI에서 J(판단형)와 P(인식형)의 간극은 생각보다 넓다.


우등버스  출발 직전까지 일기예보를 확인하던 Y대장의 대안은 투표!

강원과 충북 내륙 일부만 비예보가 없단다.

이리하야 남덕유, 치악, 금수 세 후보를 놓고 실시간 투표가 진행되었다.


'변화무쌍'한 자연을 사랑하는 멤버들 답게 P가 압도적, 금수산이 간택되었다.  

제천 쪽으로 선회한 버스는 악어봉을 조망하고 금수산을 오르려다 악어봉 등산로가 폐쇄되는 바람에 다시 이웃한 가은산이 최종 목적지가 되었다.


하늘 가득한 구름이 그늘을 선사하고 능선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준 덕에 최고의 여름산행이 되었다.



선택 두울. 악법도 법이니 무조건 지켜야?


충북 제천시와 단양군에 걸쳐 위치하고 있는 가은산(575m)은 금수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줄기에 솟아있는 산으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석산이다. 곰 바위 · 돌고래 바위... 등 자연사 박물관을 방불케한다.  능선마다 펼쳐지는 남한강과 청풍호반의 시원한 조망에 눈이 즐겁다. Y대장 왈, 가은산의 백미는 청풍호로 금방이라도 날아 오를 듯한 새바위. 그런데 새바위로 가는 능선길이 비탐방으로 출입금지란다. 사람이 많이 찾는 산도 아니고 위험한 코스도 아닌데 왜?


말 그대로 책상머리 탁상행정의 전형이다.  


Y대장의 묵인하에 불합리한 규칙에 알레르기 반응이 있는 (나를 포함한) P들은 비탐방을 뚫고 새바위를 향했다.  새바위가 지척인 지점쯤에서 사진만 찍고 돌아갈까? 잠시 고민하다, 바위 앞까지 가기로 했다.


역시, 해 보지 않고 아쉬워하기보다 일단 저지르고 후회하는 게 맞다.


멀리서는 보이지 않던 아기새 한 마리가 어미새 뒤편에 앙증맞게 앉아 있다.   


다시 주 등산로로 회귀하는 게 다소 힘들었지만, 이후 기대 이하로 실망스런 정상에 이르자, 이구동성 새바위 안 들렀으면 어쩔 뻔?




요기쯤서 되돌아 갈까 고민
하마터면 너를 못 볼뻔


선택 셋. 대비할 것인가? 즐길 것인가?


새바위에서 사진을 찍는데 하늘에 드론이 떴다. 철없는 나는 '방송국 촬영인가...' 손도 흔들어 주었다. 그런데, 메인 능선에서 기다리던 Y대장이 한 걱정이다. 비탐방구간 단속을 드론으로 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벌금이 무려 인당 최소 10-30만 원 이란다. 민소매와 반바지 차람이던 O가 갑자기 바람막이를 꺼내 입는다. 눈에 확 띄는 형광색 티셔츠의 K여사는 비도 안 오는데 배낭을 방수포로 덮는다. 하산길 관리공단 직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한 일종의 은폐, 위장이다.


한편, 사전 예보 없는 촬영단속은 인권침해라는 비판론자, 이런 단속 사례를 뉴스에서 본 적이 없다는 경험주의자, 정부돈으로 그렇게 싸구려틱한 드론을 샀을 리가 없다는 합리주의자...등은 걱정 덜어 놓고 산행을 즐겼다. 이런 선택에 정답은 없다. 다가올 재난에 미리 대비해서 나쁠 것은 없다. 다만, 하산 길 내내 벌금 걱정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손해막심이다.


다행히 이번 선택은 속편한 사람들 편이었다.  

하산 후 늦은 점심 자리, 벌금 굳은 것을 떠올리니 "돼지갈비 4인분 추가"를 마음껏 외쳐도 속이 그렇게 편할 수 없다!  



돌고래 주둥이? 바위


조망이 없어 실망스러웠던 정상



벌금이 무서운 김여사의 은폐작전


선택 넷. 정든 지팡이를 포기할 것인가?  


분명 양손에 쥐고 출발했는데 정상을 앞둔 모 지점에 이르러서야 등산스틱이 내 손에서 사라졌다. 중간중간 쉬었는데 어디서부터였는지 도무지 기억이 없다. 일부 구간을 열심히 되돌아갔지만 그리운 님들은 보이지 않는다. 다시 선택의 순간이다. 힘든 코스가 아니고, 남의 물건 손대지 않는 좋은 나라니 더 찾으면 찾을 수 있겠으나, 나 때문에 전체 일정이 늦어지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너와의 인연은 여기 까지로구나.. 부디 더 좋은 주인 만나 행복하렴..'


안나푸르나에서부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오랜 친구와 아쉽게 작별했다.


지역주민들은 가은산을  '가는 산'이라 부른단다.  옛날 마고할미가 이 산에 놀러 왔다가 반지를 잃어버렸는데 온 산을 뒤져 마침내 반지를 찾은 할멈은 '이 산에 골짜기가 하나만 더 있었더라면 도성이 들어설 땅인데, 내가 이곳에 눌러앉아 살려고 해도 한양이 될 땅이 못되니 떠나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해서 가는 산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전설이.

하마터면 이 몸이 마고할비가 될 뻔했다.    


돌아가자니 두 다리가 후덜덜
옥순대교-가은산정상-상천주차장, 놀멍쉬멍 코스


P.S. 선택 두개 더. 

- 새벽에 출발하니 아침은 꼭 챙겨 먹이는 CJ산악회의 주 메뉴는 해장국. 이번엔 오후 2시면 문을 닫는, 30년 전통의 복서울해장국, 언제 또 올지 모르는데 선지, 우거지, 뼈 해장국 중 하나만 고르기, 참 어렵다.


- 하산 후 식사자리, 주류와 비주류 테이블중 선택해야 한다. 전자는 몸이 힘들고 후자는 좀 심심하다. 이래저래 삶은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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