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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록펜 Mar 19. 2018

사랑의 모양이 만들어지는 곳

그들의 자세에서 우리의 모양을 보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커버 표지는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가지고 왔습니다.


 

     학교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저는 자존감이 낮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보았다. 자신이 가진 콤플렉스를 밝히며 시작한 그 글은 그런 자신의 단점마저 사랑해주는 이에게 미안함과 고마움, 사랑을 전하며 끝났다. 글쓴이가 미안함 보다는 고마움을 더 느끼며 사랑하길 바랐다. 글쓴이는 미안해 할 필요가 없다. ‘엘라이자’가 ‘그’에게 미안함을 느끼지 않았듯이.


    내가 불완전한 존재란걸 모르는 눈빛이에요. 있는 그대로 나를 봐주니까요.


영화 속 이 대사가 생각났다. 글쓴이의 단점까지 보듬어주며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게 해 주는 그 사람은 그런 눈빛을 가진 이가 아닐까. 그들이 다듬은 사랑의 모양이 영화 속 그것과 닮아 있다고 믿는다.


      엘라이자처럼 듣지 못하는 이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존재’이며, ‘그’처럼 이질적이고 순수한 이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그런 눈빛’으로 누군가를 바라보곤 한다. 영화의 부제인 ‘사랑의 모양’의 뜻을 풀어 쓰면 저 대사가 되지 않을까. 사랑의 모양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지금은 없는 사랑의 모양을 기억한다. ‘그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사람을 기억한다. 아름다운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눈을 보고 있으면, 마음속이 티없이 맑아지고 한없이  따뜻해지는 사람이었다. 그 눈으로 웃을 땐, 그 미소를 단 한번만이라도 더 볼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리라, 다짐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모든 사랑이 그렇듯 언제나 행복하지는 않았다. 크고 작은 다툼이 있었고, 크고 작은 상처를 서로의 속에 남겼다. 나에게 기대하지 않으려 한다는 말을 들었다. 실망했다. 나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을 나는 사랑한 거냐며 따졌다. 그 사람은 좀처럼 하지 않던, 사랑한다는 말을 그때 처음 꺼냈다. 그 말에 나는 무너졌지만 응어리가 남았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바라지 않는 사랑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 응어리가 깊은 마음에서 길어올린, 그 사람이 가진 사랑의 자세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엘라이자와 ‘그’는 서로에게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다. 엘라이자는 ‘그’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위해서 그를 돌려보내려 한다.  ‘그’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함께’라는 마지막 애원을 엘라이자가 끝내 거절해도 그는 더 묻지 않고 돌아선다. 그들이 가진 사랑의 자세란 그런 것이다. 서로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서로를 사랑하는 자세. 그 사람이 가지고 있었지만, 나는 가지지 못했던. 그 사람은 그때부터 알고 있었을까. 기대를 하지 않으려 한다는 말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겠다는 말이었을까.


       여태껏 나는 우리의 관계가 나만 놓으면 끝나는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완전히 틀렸다. 그 사람이 보여준 자세가 우리를 빛나게 했고, 내가 가진 얄팍한 욕심이 우리를 돌이킬 수 없게 만들었다. 우리가 함께했던 아름다운 시간은, 내가 한없이 느린 그 사람을 기다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한없이 좁은 나를 품어주었기에 이어질 수 있었다.



평화는 상대방이 내 뜻대로 되어지길 바라는

마음을 그만둘 때이며,

행복은 그러한 마음이 위로받을 때이며,

기쁨은 비워진 두 마음 부딪힐 때이다.

 

                 황대권, 「야생초 편지중에서


       오래도록 수첩에 담겨있던 글이지만, 그 뜻을 이해하기 까지는 오랜 시간과 잘못된 선택, 무거운 후회가 필요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순간에도 나는 그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은, 내 뜻대로 되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제 알겠다. 그 마음의 끝에는 행복도, 기쁨도 없다. 하물며 사랑이 있을리가. 사랑의 모양은, 사랑을 대하는 서로의 자세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이제 알겠다. 이 어른을 위한 동화가 주는 교훈이 따뜻하게 아프다.



우리는 언제나 너무 빨리 만난 사랑 때문에,

너무 오래 만나지 못한 사람 때문에,

그리고 너무 늦게 알아버린 진실 때문에 아파한다.


              이정명, 「별을 스치는 바람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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