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드록펜 Jul 24. 2023

개발자와 엔지니어, 잡부와 브뤼콜레르

IT 비개발 직군, 그 모호함을 톺아보다.

“잡부입니다.”

최근에 그만둔, 두 번째 회사(이하 C 회사)에서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했다. 겸손의 말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정확한 표현이기도 하다. 창업 초기의 스타트업에서 비개발 직무를 맡는다는 건, 꽤 넓은 범위의 일들을 한다는 뜻과 같다. 그 일 각각의 깊이와 별개로.


[C회사 입사일에 만들어갔던 나의 (예상)업무 범위]



첫 번째 회사(이하 S회사)에서 프로덕트 매니저(PM)의 역할에 대한 교육을 들을 때, PM은 개발과 디자인을 빼고 다 하는 사람이라고 들었다. 여집합으로 설명되는 역할이라… 틀린 설명은 아니다. 제품의 프로세스와 화면을 기획하고, 사용자(고객)과의 상호작용을 고민하고, 제품의 약관을 고치고 팀 외부와 소통하는 일 등. 실제로 개발자와 디자이너가 하지 않는 일을 했으니까.


범위를 팀에서 회사로 넓혀도 마찬가지다. 사업계획서를 작성하고, 런웨이를 계산하고, 사내 제도와 문화/복지를 기획하고, 채용 공고를 쓰고 지원자와 인터뷰를 하고, 정부지원사업비 정산을 하고. 개발자와 디자이너가 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 그렇지만 뭔가 더 필요하다. ~를 빼고 다 한다는 것만으로는 그 역할의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경험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는 앞의 여집합 이상의 설명을 끌어내지 못한다. 제너럴리스트 이상의-평이하고 또 지루한-의미밖에. 그렇다면 용어 자체를 파고들어보면 어떨까. 결론부터 풀자면 이렇다. 개발자 및 디자이너가 엔지니어에 가깝다면, 비개발 직군은 브뤼콜레르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비개발 직군(잡부)의 의미와 가치가 선명해진다고 나는 믿는다.


브리콜뢰르는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쓴 <야생의 사고>에서 유래한 말로, 엔지니어에 대응하는 개념이다.


문명 세계의 엔지니어가 목적에 꼭 맞는 재료와 도구 없이는 일을 하지 못하는 이들이라면, 야생 세계의 브리콜뢰르는 한정된 재료와 도구를 새로운 방식으로 활용함으로써 현실을 헤쳐나가는 사람들이다.


이 비교를 조금 더 깊게 파고들어가보자. 개발자와 디자이너가 하드 스킬의 중요성이 높은 직군인 반면, 잡부는 소프트 스킬과 경험의 중요성이 더 높다. 개발자(및 디자이너)가 해서 늘 필요한 자원을 모두 갖춘 채로 일하지는 않는다. 그들도 부족한 정보를 찾고 학습한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불확실성이 변수라면, 잡부에게 불확실성은 상수다.



한정된 자원으로 최선의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 분투하는 일, 세상에 없는 형식의 문서를 만들고 그를 활용해 필요한 정보를 전달하는 일, 일의 결과물(output)과 성과(outcome)가 명확하게 연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는 일. 어쩌면 우리 잡부들은 스타트업이 마주하는 불확실성의 최전선에 자리한 이들이 아닐까.



여기서 우리 잡부가 하는 일이 가지는 가치와 의미가 분명해진다. 우리는 VUCA에 특화된 지식노동자이다. VUCA는 Volatility(변동성), Uncertainty(불확실성), Complexity(복잡성), Ambiguity(모호성)의 앞 글자를 딴 용어로, 예상치 못한 맥락에 처했을 때 계획에서 벗어나 성과 또는 목표를 달성하는 능력을 말한다. 잡부는, 뛰어난 잡부는 VUCA에 능한 브리콜뢰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는 ’~빼고 다‘ 라는 여집합 표현을 넘어, 우리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고 싶다. 브리콜뢰르라는 이름을.




작가의 이전글 로드킬 당한 고양이를 보고 든 생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