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ANA INTERVIEW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나드론스타팅 Mar 09. 2018

아나드론 : MDM 문주현 회장을 만나다

사진_아나드론 김지영(편집장)


      

MDM 회장 문주현, 상상이 생각을 바꾸고 인생을 바꾼다 사막에서도 상상하라!


상상력은 문주현 회장이 선택한 삶을 지탱해온 가장 큰 힘이다. 그에게 '상상'은 '인생의 판'을 바꿀 수 있는 도전과 용기를 표현하는 다른 말이다. 그에게서 듣는 '상상'이라는 두 음절의 단어는 사람들 각자가 갖고 있는 자신만의 프레임을 깨야 큰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로 들린다.


지난 2월에 서울의 한 대학교에서 열린 특강에서 문주현 회장은 "끊임없는 상상이 성공의 원동력이다. 상상이 생각을 바꾸고 인생을 바꿀 수 있다." 고 말했다.


창간 1주년을 맞은 『아나드론』은 경희대 총동문회장 김성호 제양항공해운 회장의 도움말을 듣고, 3월의 기업인으로 MDM 그룹 문주현 회장을 만났다.

       

   

   

경영, 시장의 트렌드를 읽고 끊임없이 도전하다

   

  

Q. MDM은 부동산 개발회사로 출발해 부동산종합금융그룹으로 성장했습니다. 2010년 공기업 민영화 1호 매물이었던 부동산금융사인 한국자산신탁을 인수했고, 그 후 수 년 만에 신규수주 실적과 순이익 부분에서 업계 1위에 올랐습니다. 2012년에는 납입 자본금 600억 원 규모의 여신전문 금융업체인 한국자산캐피탈(KAIC), 2015년에는 자산운용사인 한국자산운용(KAIM)도 설립했습니다. 큰 흐름에서 창업 이후 MDM의 성장 과정과 성장을 이끈 특별한 비결에 대해 소개해 주십시오.


처음부터 오늘의 결과를 계획하고 달려온 것은 아닙니다. 제 이름 석자를 걸고 출발하던 당시 지녔던 성공에 대한 '간절함'과 '열정' 그리고 끊임없는 '도전'을 통해 오늘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커다란 자본이나 배경도 없었지만 경험과 아이디어로 승부하겠다는 마음으로 창업이라는 결단을 내렸고, 어느새 20년이 되었습니다. IMF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4월, 믿을 건 제 자신 밖에 없었기에 이름을 걸고 해보자는 마음으로 상호도 'MDM(Moon Development & Marketing)'으로 정했습니다.


성장 과정을 크게 보면 시드머니(종잣돈)를 만들고 회사 기반을 닦는 데 10년, 이후 부동산 개발시장과 금융업에 진출해 부동산과 금융을 융합한 종합부동산금융그룹으로 성장하는 데 10년 걸렸습니다.


아이디어를 가장 큰 밑천으로 시작한 기업이다 보니 시드머니를 만드는 데 제법 시일이 걸렸는데, 그 기간 동안 수행한 마케팅 실적만 하더라도 분양 매출액 16조 원(분양 세대수 4만 세대), 컨설팅 분양매출 1조 1000억 원에 이릅니다.


2007년 '부산 월드마크 센텀'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개발사업에 나섰는데 판교, 송파, 광교, 수서, 마곡, 위례, 상암DMC, 삼송, 부천 중동, 동탄을 비롯해 2017년 원흥역 푸르지오시티 사업까지 직접 시행한 프로젝트를 모두 성공시켰습니다. 우리 회사는 설립 20년 만에 연면적 94만 평, 총 분양 매출액 11조 원의 개발사업 시행실적을 보유한 국내 최대의 부동산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특히 2010년 금융공기업인 한국자산신탁을 인수해 부동산과 금융을 결합한 국내에서는 새로운 비즈니스 플랫폼을 구축했습니다. 이후 리츠 AMC 인가, 여신전문금융업인 한국자산캐피탈 설립, 자산운용사인 한국자산에셋운용을 설립해 부동산 개발·신탁·리츠·캐피탈·자산운용을 수직계열화한 종합부동산금융그룹을 완성했습니다.


지난해에는 글로벌 자산운용사인 거캐피탈(Gaw Capital)과 미국 시장 진출을 위한 전략적 파트너십도 체결해, 해외 부동산 개발, 투자 등 글로벌 비즈니스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항상 변화의 흐름을 읽으려 노력하고, 미래를 예측하며 사업을 추진해 왔습니다. 시장의 트렌드를 제대로 읽는다면 사업은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Q. MDM은 국내에서 가장 성공한 디벨로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문주현 회장께서 정의하는 '디벨로퍼'란 무엇입니까? 그 역할과 의의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디벨로퍼는 시대를 읽는 통찰력과 기획력으로 도시를 만드는 기획자(planner)입니다. 보이지 않는 아이디어로 유형의 고부가가치를 만들어 내는 일을 합니다. 땅 매입에서부터 설계·금융·시공·관리·운영·마케팅 등 다양한 전문 분야를 융합해 최고의 하모니를 내게 하는 오케스트라 지휘자 역할을 하는 게 바로 디벨로퍼입니다.


이해하기 쉬운 예를 말씀드리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직업도 디벨로퍼입니다. 싱가포르 리콴유 수상, 일본 동경역 마루노우치를 개발한 미쓰이 등이 모두 디벨로퍼죠. 오늘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관광명소로 자리 잡은 북촌 한옥마을, 인사동, 혜화동의 한옥마을을 만든 이도 디벨로퍼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일제가 계획적으로 북촌 진출을 시도할 때 그곳에 한옥 지구를 개발해 조선인의 주거 공간을 지켜내고, 조선의 주거문화를 혁신적으로 개선한 분이 바로 한국 최초의 디벨로퍼 정세권(1888~1965)입니다. 80여 년이 흐른 지금 우리 디벨로퍼들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미래 스마트시티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Q. 국내 부동산 개발 사업은 예전과 크게 다른 양상으로 변모하고 있습니다이로 인해 소비자들이 얻게 되는 이익은 무엇인지또 업계 변화의 방향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부동산 개발을 둘러싼 모든 환경이 변하고 있습니다. 변화의 핵심 키워드는 인구와 4차 산업혁명입니다. 1~2인 가구 급증, 저출산 고령화 등 급격한 인구구조의 변화는 새로운 형태의 주거시설, 커뮤니티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사물인터넷(IoT)과 인공지능(AI), 증강현실(AR), 가상현실(VR), 자율주행, 드론 등으로 대변되는 4차 산업혁명은 기존과 다른 도시 인프라, 생활공간을 필요로 합니다. 앞으로 도심 중심의 콤팩트 스마트시티, 오피스의 주거화 등 공간의 변화, 불특정 다수가 사는 그룹 홈, 공유부동산 등이 더욱 활성화 될 것입니다.


디벨로퍼 업계에서는 부동산과 4차 산업혁명을 어떻게 융합할 것인가, 전통적 형태의 가정 해체와 개인 중심 삶의 시대에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 커뮤니티를 어떻게 제공할 것인가를 계속 고민하고 있습니다.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부동산 시장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디벨로퍼 업계도 철저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Q. 샐러리맨 시절 특진을 거듭한 끝에 30대 후반에 임원이 됐습니다다니던 회사를 나온 이후 대기업의 영입 제의를 뿌리치고 창업을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을 들려주십시오.


저는 남들보다 많이 늦은 나이인 서른 살이 넘어서 직장에 공채 1기로 입사했습니다. 제가 입사한 시절만 하더라도 나이가 많으면 취직이 잘 안되던 때입니다. '저를 뽑아준 회사를 위해 뼈를 묻겠다'는 생각으로 미친 듯이 일에 매진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주상복합아파트, 최초의 주거용 오피스텔 개발 등 맡은 사업 마다 화제를 불러 모았고, 사업도 성공했습니다.


그런 공로로 일곱 번의 특진을 거쳐 30대에 임원이 되고 언론에서 '샐러리맨의 신화'라고 기사도 자주 나오면서 본의 아니게 당시 부동산 업계에서 유명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1997년 말 갑작스럽게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사태가 터졌습니다.


그 때 회사를 그만 두었는데 여러 대기업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습니다. 다시 샐러리맨으로 돌아갈 것인가 고민했죠. 좋은 사무실에 아파트와 자동차까지 준다고 하니 처음에는 솔깃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지금까지는 내가 회사의 울타리에서 커온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회사 울타리에서 벗어나 내 실력을 검증해 보자. 돈도 배경도 없지만 창업이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고 1998년 봄에 서울 서초동의 한 칸짜리 오피스텔(33m²)에서 나 홀로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Q. 2008년 닥친 미국발 금융위기 때 수많은 부동산 개발회사들이 도산했습니다금융위기가 터지고 경기흐름이 바뀔 때마다 MDM이 달랐던 점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경영환경은 늘 급변합니다. 경제상황도 바뀌고 소비자의 취향도 바뀝니다. 그 무엇보다 '시장의 트렌드'를 제대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갖고 있는 단순한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직원들에게 항상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판매하는 상품이 '내가 사고 싶은가', '내가 살고 싶은가'를 스스로 묻고 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원칙으로 지금까지 단 한건의 실패 없이 모든 개발사업을 성공시켰습니다. 좋은 땅을 사서 그 땅과 소비자들이 원하는 좋은 상품을 공급하는 것. 기본에 충실하고 원칙을 지켜온 것이 경기 변동에도 흔들리지 않은 이유 같습니다.



Q. 부동산 개발업계에서 성공한 비결 가운데 하나는 좋은 땅을 선택한다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시행 사업을 전개할 택지를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과그러한 기준을 세우게 된 이유는?


제조업과 달리 부동산 개발·건설업의 원재료는 '땅'입니다. 기본적으로 원재료가 좋아야 소비자에게 좋은 상품을 제공할 수 있고 개발사업도 성공합니다.


제가 땅을 선택 할 때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람'입니다. 미래에 그 곳을 이용할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사람들이 살고 싶은 공간인지, 나는 이곳에 살고 싶은지를 항상 먼저 생각해 봅니다. 땅은 사람의 생활을 담고, 그 사람들에 의해 땅의 가치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요즘엔 전통적인 역세권, 학세권에 이어 몰세권, 숲세권, 의세권이라는 말 까지 나오고 있는데 디벨로퍼로서 생활편의시설과 교통 여건을 살피는 건 기본입니다. 과거에는 편의시설이 갖춰지고 인허가 리스크가 없는 공공택지를 주로 매입했는데 남아있는 땅이 줄어들면서 경쟁이 치열해지고 가격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저는 적정 가치를 초과하는 가격에는 땅을 사지 않습니다. 땅값을 높게 치르면 수익을 내기 어려워지고 소비자들에게도 부담을 가중시키게 된다는 평범한 진리 때문입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저평가된 유휴지나 잘 활용하면 가치를 높일 수 있는 땅을 주목합니다.



Q. 아파트오피스텔 등 부동산 상품을 만들면 바로 팔리던 시대가 지났습니다앞으로는 참신한 아이디어와 기획력이 없으면 부동산 개발에서 절대 성공하지 못하는 시대라고 합니다두 가지 질문입니다그동안 매번 분양에 성공해온 배경이었던 MDM의 차별화된 마케팅 전략에 대해 시기별로 특징을 정리해 주시고향후 전개해 나갈 새로운 경영 방식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십시오.


부동산 개발사업의 성패는 마케팅이 좌우합니다. 입지를 선택하고 시장의 트렌드를 정확히 파악해 소비자를 만족시킬 좋은 상품을 기획하는 단계부터 마케팅은 시작됩니다. 그 동안 시행했던 모든 사업들에 다 특별하고 차별화된 마케팅전략이 있었습니다만 몇 가지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부산 해운대 땅을 매입해 대우 월드마크 센텀 사업을 시행했습니다. 최고급 주상복합 상품을 기획하고 당시 부산 아파트 시세(3.3m² 당 800만 원)의 두 배인 1600만 원으로 분양가를 높게 책정했습니다. 그 어려웠던 시기에 계약금도 20% 납입 조건으로 분양했는데도 대성공을 거뒀습니다. 주변에서 우려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결과는 성공이었죠. 입지에 맞는 고급화 전략, 철저한 수요조사와 상품특화가 만들어낸 결과였어요. 지금은 부산지역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고급 주거단지가 됐습니다.


이 사업이 성공하면서 '디벨로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11년에는 분양시장이 위축되어 있자 '판교 푸르지오 월드마크' 개발사업을 추진하면서 '선(先)임대분양'이라는 아이디어를 시장에 도입해 분양에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2013년 '광교 더샵 레이크파크' 개발 시에는 주부나 1~2인 가구의 가장 큰 고민이 '밥'이라는 점에 착안, 오피스텔 최초로 호텔식 조식·중식·석식 3끼니를 제공하는 클럽 라운지 시설을 도입해서 시장에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설거지로부터 해방"이라는 직관적인 카피를 메인 광고 문구로 사용했더니 주부들의 호응이 엄청났습니다. 대성공이었죠. 생활편리성을 강조한 원스톱라이프(one-stop life)의 '몰세권'이라는 새로운 개념도 만들었습니다.


많은 택지가 미분양으로 남아있던 때에 삼송지구 신세계몰 맞은 편 부지 약 10만m²를 제가 모두 매입했습니다. 서울 접근성도 뛰어나고 신세계몰이 오픈하면 그 어떤 곳보다도 생활편리성이 좋아질 거라는 점을 높게 봤습니다. 2015년 말부터 지금까지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몰세권'이라는 마케팅 차별화전략으로 성공을 거둔 사례입니다.


올해 수원 광교 신도시에 오피스텔(1,805실) 공급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1~2인 가구 시대를 맞아 단순하게 거주 공간만 제공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주거 문화를 제공할 예정입니다. 365일 식사 서비스와 수영장, 북카페, 카페테리아, 농구장, 사우나, 헬스장 등 다양한 호텔 수준의 편의시설을 설치할 계획입니다. 퇴근 후 저녁이나 주말에 와인을 갖고 와서 실비로 마실 수 있는 바(카페)도 넣을 겁니다. 친구도 사귀고 취미도 즐기는 등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단지', '새로운 커뮤니티'를 만드는 게 기본 콘셉트입니다. 멋진 작품을 하나 만들 겁니다. 많이 기대해 주세요.



Q. 창의력을 바탕으로 한 MDM의 사업전략이 화제를 모았습니다가령 2007년 부산 대우월드마크 센텀 사업의 지급보증 없는 PF, 광교 토지 리턴제 등 남들이 생각지 못한 방식의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MDM이 사업에서 중시하는 창의력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요이와 관련한 부산과 광교 프로젝트 당시 일화를 소개해 주십시오.


MDM이 중시하는 창의력이란 없는 것을 창조해내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들을 융합하는 능력입니다. "남들과 다르게 보고, 남들과 다르게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2000년대 부동산 개발시장에 새롭게 등장한 금융기법인 프로젝트파이낸싱(PF)의 관행을 깬 첫 사례가 바로 부산 해운대 '월드마크 센텀' 사업입니다.


당시 금융권에서 PF는 프로젝트의 사업성을 보고 대출을 실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신용도 좋은 건설회사의 대출금상환 지급보증을 무조건 요구하던 때입니다. 건설회사는 지급보증을 명분으로 공사비를 올려 디벨로퍼가 얻을 이익을 가져가는 것이죠. 저는 이러한 것은 PF의 취지에 맞지도 않고 불합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급보증을 없애고 대신 디벨로퍼와 은행이 이익을 더 가져가자고 은행을 설득했습니다. 그 결과 업계 최초로 건설사의 지급보증 없이 은행 프로젝트파이낸싱(PF)을 성사시켰습니다. 이 일화는 국내 대학 교재에 사례로 실려 있기도 합니다.


2012년에 시행한 '광교 푸르지오 월드마크' 사업은 글로벌 금융위기 시절 아무도 관심 갖지 않던 땅을 '토지 리턴제'라는 생소한 방식으로 매입해 개발에 성공한 사례입니다. 땅을 사는 사람이 없으니 일단 매매계약을 체결하고 나중에 계약을 해지하더라도 토지 매도자인 경기도시공사에서 매수자에게 계약금을 되돌려 주겠다는 것이었죠. 땅을 보러 갔는데 경사가 꽤 급하더군요.


일반적으로는 경사가 진 땅을 '좋지 않은 땅'으로 인식하잖아요.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그러다 보니 이걸 오히려 역으로 이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지 경사를 활용해 저층부(지하) 상업시설을 지상 1층처럼 개발하면 1층 매출이 두 배로 늘어나게 되죠.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약점'으로 생각하는 것을 '강점'으로 바꿀 수 있는 것, 남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MDM의 창의력이라고 생각합니다.



Q. MDM은 국내외 최고의 부동산 엘리트 전문가 집단으로 구성되었다고 들었습니다인재 육성을 위해 MDM이 각별히 정성을 기울이는 부분이라면?


첫째는 투명한 인사 시스템입니다. 실력과 실적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고 우대합니다. 우리 그룹에서 혈연·지연·학연·나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모든 구성원이 잘 알고 있습니다. 실력만 있으면 되기 때문에 능력을 키우는데 집중하고 이를 바탕으로 실적을 거양하기에 유능한 인재들이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둘째는 무슨 일이든 직원이 제안을 하면 해보라고 권장을 합니다. 회사를 마당 삼아 마음껏 뛰어놀게 만들어 주는 것이죠. 실패하더라도 실행하고 도전할 때 실력도 커지는 겁니다.


셋째는 '모두가 사장이고, 회사를 위해 일하지 말고 자신을 위해 일하라'는 것입니다. 신입 사원부터 사장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책을 강구하는 기업문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모든 구성원의 문제해결 능력이 커질 것이고 또 자신을 위해 일을 하니 수동적이 아닌 능동적인 인재가 양성될 거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물론 무엇보다도 회사의 이익을 직원과 함께 공유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1등 기업을 만들고 직원들 급여와 복리수준도 최고의 대우를 해주고 있습니다.

        

   

  

새로운 '판', 인생의 '판'을 바꾸는 꿈과 도전을 계속하다

  

  

Q. 샐러리맨 신화의 주역으로 꼽히고 있습니다어린 시절 생활과 당시 간직했던 미래의 꿈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어린 시절에는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미래에 대한 꿈을 꿀 겨를도 없었어요. 아홉 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나 중학교를 졸업하고 농사와 갯일(김·미역 등 바다 관련 일)을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혹한의 추위와 육체적 고통과 싸워야 하는 김·미역 양식과 농사일을 하면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했습니다. 홍수나 폭풍·해일이 지나가면 1년간 고생한 게 다 휩쓸려갔습니다.


허탈하고 심신이 지쳐가던 어느 날 직업훈련원생 모집 소식을 접했습니다. 무조건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고향을 떠나 광주 직업훈련원(지금의 한국폴리텍대학) 기계과에 원서를 냈습니다. 인기가 워낙 좋아 입학경쟁률도 10:1이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절반을 넘었습니다. 입학을 해서 줄곧 1등을 했지만 그 곳의 생활도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기계를 깎고, 쇳독에 걸리고.


당시에 무엇보다도 이대로는 평생 공장 생활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공부를 해보자. 늦깎이라도 대학에 가자.’라는 생각으로 무작정 검정고시를 준비했습니다.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군대를 제대한 후에 대학진학을 준비했죠.


동년배 보다 7~8년 늦은 스물일곱의 나이였지만 결국 경희대 회계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어린 시절을 뒤돌아보면 제게 주어진 인생의 '판'을 바꾸는 도전을 계속한 것 같습니다. 거창한 미래의 꿈은 없었지만 그때그때마다 새로운 '판'을 깔고 싶은 꿈을 계속 꾸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저는 늘 '판'을 바꾸고, '새판'을 까는 도전을 즐거워합니다.



Q.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진학하셨습니다남달리 어려웠던 학업 과정을 겪으면서 자신과 한 약속이 있다면 소개해주십시오또 그 약속이 이후 회장님의 삶에 미친 영향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대학에 입학한 며칠 동안은 날아갈 듯이 기뻤죠. 제가 원하던 것을 얻었으니까요.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다음 날부터는 현실이더군요. 학비는 물론이고 하루하루 생활고를 걱정해야 했습니다. 생활비와 학비를 벌기 위해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열심히 뛰었습니다. 배가 고파 늘 율무차만 마시다 보니 사정을 모르는 나이 어린 학우들은 저를 보고 율무차 형이라 불렀습니다.


어느 날 당시 용산에 있던 봉신 장학재단에 제 소개서(살아온 삶)를 보냈는데, 그 장학재단에서 2년 전액 장학금을 주었습니다. 그 독지가의 도움으로 학업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장학금을 받던 날 다짐했습니다. '반드시 성공해서 가난한 학생들을 돕겠다'고 제 자신과 약속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나와의 약속이었지만, 그 약속을 꼭 지키기 위해 더 열심히 살아온 것 같습니다. 이 사회로부터 도움을 받았으니 이 사회와 더불어 사는 삶, 나누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는 사명도 그때의 약속에서 시작됐습니다.



Q. 바둑과 탁구에 관심이 크다고 들었습니다공인 아마 바둑 5단의 실력자로한국기원 이사를 지내고 계십니다또 서울시 탁구협회장을 역임(2013~2015)했습니다바둑을 처음 배우게 된 계기는사업과 인생을 바둑 또는 탁구에 비유한다면?


아마 바둑 5단의 실력자는 아닙니다. 국내 최초의 한국여자바둑리그 출범을 후원했더니 한국기원에서 명예단증을 준 것인데 공인 5단으로 알려졌네요. 어릴 적에 형과 삼촌이 바둑 두는 걸 보고 어깨 너머로 익혔습니다. 제 또래가 대부분 그렇겠지만 바둑도 탁구도 정식으로 배워본 적이 없어요. 책보다는 실전을 통해 배운 야전형 스타일입니다. 젊었을 때 돈 없이도 할 수 있는 게 탁구, 바둑이어서 많이 즐겼습니다.


지금 보면 제 사업이 집을 지어 파는 건데 바둑도 집을 짓는 거니까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국기원 이사도 맡고 한국여자바둑리그도 출범 이후 4년 연속 후원을 하고 있습니다. 바둑과 사업은 비슷한 대목이 많습니다. 바둑에서 맥점 하나로 상황이 역전되는데 사업에서도 그런 일이 비일비재 합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에 대비해 몇 수를 내다보고 둘 수 있다면 바둑도 사업도 성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인생과 사업도 바둑처럼 한곳만 바라보지 말고 전체를 아우르는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합니다.

       

     

    

누군가의 삶에 선한 영향을 주고싶다

  

  

Q. 창업 이후 경영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공헌활동을 전개하셨고모교인 경희대학교 발전에도 기여하셨습니다그 동안의 활동과 상표창 내용을 소개해 주십시오또 이러한 활동이 삶에서 지니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회사를 창업한 후 3년이 지난 2001년에 장학재단을 설립해 현재까지 장학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 장학사업과 별도로 미래 우리나라를 책임질 후학양성을 위해 제 모교인 경희대학교, 그리고 가천대학교에 발전기금을 후원(8억 원)했습니다. 2012년에는 서울시 관악구청 1층에 <용꿈꾸는 작은도서관>, 2014년에는 서울시청 지하 1층 시민청에 <서울책방> 시설을 마련해 별도로 기부했어요.


젊었을 때 책을 대단히 좋아했는데, 책을 사서 볼 돈이 궁해 조바심을 내던 제 모습이 떠올라서 흔쾌히 지원했죠. 또 전국검정고시 총동문회 총회장을 맡고 있는데 매년 검정고시 준비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 모교 대학생이나 한양대학교에도 매년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고 때때로 학술행사도 후원하고 있어요.


스포츠·문화 분야도 인연이 닿아 후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한국기원 이사로 재직하고 있는데, 2015년에 역사상 최초의 한국여자바둑리그가 출범할 수 있도록 후원했습니다. 올해 까지 4년 연속 후원(11억 원)하고 있습니다. 올해 우리나라에서 평창 동계올림픽 및 동계패럴림픽대회가 개최되는데 성공을 기원하고자 후원금을 기탁했습니다.


탁구계는 2013년부터 3년간 서울시 탁구협회장을 역임하면서 인연을 맺었습니다. 협회 최초로 꿈나무 육성을 위한 '후원회 밤'도 개최했는데, 당시에 후원금만도 1억 4000만 원을 모금했습니다. 물론 협회 재정지원을 위해 협회장으로서 매년 별도의 후원과 탁구 꿈나무들에게 장학금도 지급했죠.


그 외에 '장흥 국제통합의학박람회', '전주 얼티밋 뮤직페스티벌' 등 다양한 문화 활동도 후원하고 있습니다. 취약계층 지원을 위해 사회복지재단 정기 후원 및 쌀 기부, 119생명번호 서비스 후원, 경희의료원 의료봉사단 버스 기증 등 다양한 사회공헌활동을 하고있습니다.


또한 현재 법정단체인 한국부동산개발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데 협회 재정지원을 위한 후원과 부동산 산업 육성을 위한 활동을 다각도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룹을 경영하면서 다양한 사회적 활동을 하다 보니 그 동안 많은 상과 표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상이나 표창에 별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다만 2014년에 전국 NGO 단체연대에서 '올해의 닮고 싶은 인물'로 저를 선정했을 때는 사실 기분이 좋았습니다. 누군가의 롤 모델이 되고, 누군가의 삶에 선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자체가 좋았습니다.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눔을 실천하고 있듯 이 제2의 문주현이 많아져서 더 밝고 따뜻한 사회가 될 거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Q. 문주장학재단의 설립 배경과 과정운영 방식성과특징 등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가장 어려웠을 때 독지가의 도움으로 대학을 다니던 시절 제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장학재단을 만들었습니다. 창업 3년만인 2001년 10억 원이라는 돈을 벌었어요. 그때 절반인 5억 원을 출연해 <문주장학재단(文柱奬學財團)>을 만들었습니다. 장학 재단설립 얘기를 들은 직원들은 "사장이 회사를 키울 생각이 없나 보다", "회사를 접을 모양이다"는 말들을 했죠.


제게는 '나와의 약속'을 실천한 것이었고, 벼르고 벼르던 사회공헌의 시작이었습니다. 장학재단의 등록증서를 받은 순간 그렇게 기쁠 수 없었습니다. 그때 또 하나를 약속했습니다. '환갑이 될 때 까지 재단 출연금 100억 원을 만들자' 작년에 제가 환갑이었는데 출연금이 334억 원입니다. 재단의 연 운용 수익이 약 8억 원 가까이 되는데 수익의 거의 전부를 장학금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총 2,215명의 학생에게 40억 원의 장학금을 지급했습니다.


문주장학재단은 장학금 수혜자의 성적이나 학교를 따지지 않습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사람 위주로 선발합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장학생이 된 이후에 선정 될 때 보다 성적이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거죠. 학업에 전념하라고 장학금도 줬는데 성적이 떨어지면 되겠어요? 그래서 장학생으로 선발되면 등록금의 100%를 지급합니다.


일부만 주면 나머지 학비를 벌기 위해 또 일을 해야 하는데 학비 걱정말고 학업에 전념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Q.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시대입니다노블리스 오블리제와 관련해 성취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기업의 본질은 이윤추구에 있습니다. 하지만 남은 이윤으로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드는데 앞장 서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회가 있고, 소비자가 있어야 기업이 존재할 수 있듯이 기업이나 개인의 성공은 사회와 주변사람의 도움이 함께한 덕분입니다. 그래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강조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거창한 명분 보다는 제가 사회로부터 도움을 받았듯이 '흙수저'들이 물 좋은 개천이라도 들어가서 성장하도록 '판'을 만들어 주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우리 사회 구성원 대부분은 금수저가 아닌 이른바 개천 출신입니다. 젊은이들이 집안 탓, 출신 탓하지 않고 도전 정신을 갖고 인생을 개척해 나가도록 도와주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Q.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갈 젊은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가치가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또 그들에게 용기가 될 말씀을 전해주십시오.


최근 '워라벨(Work and Life Balance)'이라는 말이 젊은 세대가 추구하는 가치를 대표하는 것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는 개인주의 성향의 젊은 세대를 관통하는 말이죠. 저는 각 세대는 그 시대의 필요에 맞는 가치관을 결정한다고 봅니다. 기성세대는 항상 젊은 세대를 걱정했지만 역사는 늘 발전된 방향으로 흘러왔습니다.


저는 우리 후배 세대, 젊은 세대를 믿습니다. 진취적인 '도전정신'을 잃지 않는다면 어떤 난관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간절함'과 스스로 뭐든지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 어떠한 어려움도 이길 수 있다는 '열정'만 있으면 우리 젊은 세대가 원하는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남들에 비해 시작이 많이 늦었습니다. 하지만 남들보다 조금 더 늦다거나 부족하다고 해서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극복해야 할 '콤플렉스'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이겨냈습니다. 인생에서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합니다.



Q. '2017 한국의 영향력 있는 CEO' [사회책임경영부문]에서 수상하셨습니다이 상의 의미와 앞으로 MDM의 경영 계획에 대해 소개해 주십시오.


'한국의 영향력 있는 CEO'라는 권위 있는 상을 수상해 영광입니다. 하지만 저는 수상 자체에 대해서 큰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상은 사실 저보고 더 책임감을 가지고 경영을 잘하라는 채찍질로 생각하고 있고요(웃음).


'사회책임경영'이라는 부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언론을 통해 몇 번 밝힌 적 있지만, 사실 돈에 대한 제 생각은 확고합니다. 돈은 내것이 아니라 잠시 맡아 놓은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돈이란 돌고 돌아야 하는 것이고, 사회를 위한 나눔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거창한 계획보다는 항상 이 생각을 마음에 품고 그룹을 경영할 생각입니다.



드론은 상상을 현실로 이끈다


Q. 새 정부는 4차 산업혁명을 추진하기 위한 정책 과제 가운데 하나로 드론산업 기반 구축 방안을 논의하고 있습니다이르면 올해 2월부터 토지·주택 관련 업무에 드론이 본격적으로 활용되고이로 인해 창출되는 신규 드론시장이 연간 250억 원에 달할 전망입니다드론과 관련해 앞으로 예측되는 건설·건축 현장 변화에 관해 말씀해 주십시오.


디벨로퍼나 건설광고 업계에서 사업 현장이나 건설현장 촬영에는 이미 모두 드론이 이용되고 있어요. 아주 짧은 시간에 이뤄진 변화예요. 앞으로 측량, 설계, 시공, 유지관리 등 건설 산업 전 분야에서 이용될 겁니다. 고층건물의 건설과정을 관리하거나 안전관리에도 매우 유용한 수단입니다.


드론이 진화할수록 주거·업무·상업시설의 공간구조는 물론 도시인프라도 새롭게 구축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지금은 드론 택배가 와도 아파트에서 받을 곳이 없습니다. 미래 아파트는 드론 이착륙장을 갖춰야 하지 않을까요. 드론, 자율주행차 등 4차 산업혁명과 결합한 스마트시티, 디지털라이프가 가능한 도심 속 콤팩트시티(Digital Compact City), 미래의 주택이 필요하게 됩니다. 4차 산업혁명은 디벨로퍼와 건설업계에도 새로운 동력이 될 겁니다.



Q.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 Price Waters Company는 2016년 보고서에서 앞으로 건설 인프라 부문에 드론이 창출하는 시장가치를 452억 달러(약 50조 원)로 가장 높게 보고 있습니다실제 건물이나 교량의 건설하자진단건설부지의 측량건설공정의 촬영 등에 드론이 이미 사용되고 있습니다향후 드론이 산업 각 분야에 미칠 영향을 전망하신다면?


스마트폰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올 거라 생각합니다. 드론 기술이 발전해 가는 것을 보면 어렸을 때 시골에서 농사일할 때가 생각납니다. 농약을 살포할 때 일이 힘들기도 하지만 농약에 중독도 되고는 했습니다. 그때마다 막연히 헬리콥터가 공중에서 뿌려주면 참 좋을 텐데라는 상상을 했었죠. 영화에나 나올 수 있는 상상으로 여겨왔었는데 모두 현실이 되었습니다.


농사를 짓거나 물건을 나르고 심지어 올림픽 성화봉송은 물론 평창 올림픽 개막식에서 오륜기 드론 쇼로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잖아요. 최근엔 사람이 탈 수 있는 드론시험비행에도 성공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가까운 시간 안에 텔레비전이나 냉장고처럼 가정마다 한 대씩 드론을 가지고 있는 시대가 올 수도 있죠. 인공지능이나 자율주행을 융합한 드론 자가용 시대도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또한 군사 기술로만 여겨지던 드론이 물류·유통업계의 운송수단(드론 택배)으로 적극 개발되고 있고, 농업, 산림, 기상, 안전, 재난구제, 과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로 그 이용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각 산업 분야에 새로운 시장,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가 창출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더불어 급격한 기술의 진화로 기존과는 전혀 다른 수단과 시스템이 작동되는 사회가 도래하는데, 새로운 법과 제도의 개선, 사회적 안전망 구축도 함께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촬영과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만난 문주현 회장의 인상을 요약하면, 그는 주변 분위기 전체를 리드하는 '크리에이터(creator)'였다. 가지런한 치아를 환하게 드러내는 큰 미소는 천진난만한 개구쟁이를 닮았고 "이태리 남자처럼 찍어주세요~ 저는 포토그래퍼 말을 세상에서 제일 잘 들어요~"하고 촬영 분위기를 스스로 연출하는 순간 센스와 멋을 아는 남자의 전형을 보였다.


드론, 그리고 도시 개발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자 그는 미리 준비한 종이 위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곧바로 스케치하는 열정을 드러냈다. 스마트시티, 디지털 라이프가 가능한 도심 속 콤팩트시티, 미래 도시가 가져올 모습이 그의 상상력을 재촉하는 듯했다. 모든 상황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문주현 회장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사람'에 대한 통찰력과 상상력이 뛰어난 '크리에이터'로 MDM 그룹을 지키고 있었다.


부동산 개발 업계의 마이더스, 부동산금융그룹의 새 지평을 연 디벨로퍼, 문주현 회장을 지칭하는 수사는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어린 시절에는 사는 게 너무 힘들어 미래에 대한 꿈을 꿀 겨를이 없었다는 그의 말은 이제 여러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꿈을 거든다.


그가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말을 전할 때 그 말은 대체로 그가 살아온 고난을 딛고 나오기 때문이다. 꾸밈 없는 그의 말은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을 주고 싶다는 선한 욕망의 실천으로 바뀌고, 그토록 강조하는 '상상(想像)'은 '상생(相生)'의 더 넓은 자리로 나아가고 있다.

       

         


WRITER 아나드론

대한민국 최초 드론 전문 매거진



초보자를 위한 드론 전문 웹진, 아나드론스타팅!

www.anadronestarting.com

매거진의 이전글 아나드론 : 대한항공 이수근 부사장을 만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